문명 엔진 역할한 획기적 발명품, 경제 보조수단서 목표로 돌변
역사 지배하는 방향으로 변화, 사람들 공통된 믿음이 가치 기반돼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빌딩. 미국은 세계의 기축통화 달러를 공급하는 나라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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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년 11월 미국 퓨(Pew) 리서치센터는 ‘삶의 의미’에 관한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주요 선진 17개국 중에서 한국은 ‘물질적 풍요’를 1위로 꼽은 유일한 나라였다. 자본주의의 뿌리인 영국, 프랑스, 독일은 물론 현대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에서조차 삶의 의미를 주는 제1의 가치는 가족이라고 답했다. 심지어 한국인은 가족의 의미를 자신의 건강보다도 후순위에 뒀다.
이번 조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동·서양에 관한 통념을 깨버렸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인으로 개인주의 서구 문화권에서는 가족이나 직업(프랑스·독일), 친구(영국·미국)를 선택한 반면, 전통적으로 가족을 중시하는 유교권의 동아시아 사람들은 오히려 물질적 풍요를 우선순위에 뒀다. 일본과 대만은 각각 가족과 사회가 1순위로 꼽혔고, 물질적 풍요가 2위에 올랐다.
자본주의는 서구 문명이 발명했으나 동아시아에서 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하나의 여론조사 결과를 너무 중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동아시아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물신 숭배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1인 가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가족이나 사회가 돌보지 않는 노인 빈곤의 폭발적 증가, 출산율 폭락 등은 전형적 가족해체 현상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삶에서 물질적 풍요와 건강을 가장 많이 추구한다는 사실은 각자도생 사회의 진면목인 셈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분석에 일가견을 드러낸 막스 베버를 인용해 볼 수 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인류의 성향은 고대부터 보편적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서구의 특징은 이런 성향을 17~18세기에 체계적으로 조직화함으로써 근대적 자본주의를 생성해 냈다는 점이다. 이후 잘 다듬어진 근대 자본주의는 서구로부터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인류의 보편적 물욕과 재조합되면서 지역적 특성을 발휘하고 있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 정신이 서구에서 역사적으로 어느 순간 만들어졌다고 해서 서구가 영원히 그 정신에 가장 충실하리란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제자가 스승을 따라잡듯”이 후발 주자가 선발주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동아시아야말로 가족이나 친구, 직장 등의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풍요나 건강 등의 개인적 만족을 더 중시하게 된 지역일 수 있다.
돈과 문명의 기원
▎숫자와 문자의 기원인 진흙 토큰과 이를 담았던 그릇. 기원전 4000년경으로 추정된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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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돈은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경제학에서는 화폐가 가치를 계산하는 단위이자 교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이며, 가치를 저장하는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미 발달한 사회에서 돈이 수행하는 기능을 분석한 결과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돈은 자본주의 훨씬 이전부터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엔진이었고,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었다.
대표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문자의 탄생은 돈과 긴밀하게 연결돼 진행됐다. 초기의 화폐는 여러 가지 형태였다. 조개껍데기를 사용하는 문화가 다수 있었는데 이 경우 위조하기 어렵지만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계산의 단위라는 점이 의미가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 옥이나 보석도 화폐로 사용됐으나 너무 가치가 높고 작은 단위로 나누기가 곤란해 불편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곡식이나 가축, 과일과 재료 등을 진흙으로 만든 작은 조각으로 표현했다. 상형 문자 이전에 토큰 형식의 상형 조각이 존재한 셈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큰 진흙 그릇에 작은 조각들을 넣어 경제적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3차원의 조각을 점토판이라는 표면에 갈대로 그려 넣으면서 설형 문자가 탄생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분석하고 있다.
금, 은, 동은 거의 보편적으로 화폐의 기능을 담당한 금속이다. 특히 은화는 이미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 화폐로 애용됐다. 금이나 은은 반짝이는 성분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다. 금화나 은화, 동전의 둥근 모양에서 돌고 도는 돈의 성격을 상상할 수 있고, 도는 것이기에 돈이라 부른다는 어원의 설명도 있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국가가 돈을 찍어내면서 화폐의 발전을 한 단계 더 올려놓았다. 고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던 대표적 도시국가 아테네의 은화에는 아테네 여신과 지혜를 의미하는 부엉이가 새겨져 있다. 아테네 은화는 단순한 경제적 도구가 아니라 신화와 상징을 통해 정치 공동체임을 강조한 결과다. 게다가 아테네의 권력이 보장하는 은화는 은 자체의 가치를 넘어 더 커다란 상징성을 보유함으로써 지중해 국제 무역의 지불 수단으로 떠올랐고, 아테네 시민들의 자부심을 강화하는 지배력의 도구였다.
세계 경제가 하나의 화폐로 묶이게 된 것은 16세기 유럽 세력들이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약탈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상품을 유통하면서부터다. 유럽은 세계를 지배할 만한 군사력과 대양을 가로질러 다니는 교통수단을 보유했고, 아프리카는 노예라는 ‘상품’을 제공했으며, 아시아는 인도의 직물과 동남아의 향신료, 중국의 차와 도자기 등 문명의 상품들을 풍부하게 갖고 있었다. 아메리카의 금과 은은 이런 상품들이 유통될 수 있는 유동성을 제공한 셈이다. 더 나아가 금과 은의 급속한 공급은 사람들의 더 큰 노력과 생산을 자극하는 효과를 낳았다. 자본주의적 동력이 발동하는 계기였다는 뜻이다.
주객전도와 물신숭배
▎아테네 여신과 부엉이가 새겨진 고대 그리스 은화.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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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긴 역사를 놓고 본다면, 초기 인간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동체의 생존 및 식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종종 발견한다. 사람들은 가축을 세거나 약속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 토큰 모양의 작은 조각이나 은화를 만들었다. 초기의 화폐란 인간 공동체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베버가 지적했듯이 물욕이란 역사와 문화를 뛰어넘는 보편적 성향이기에 어느 지역에서나 성현들은 물욕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했다. 물욕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하나는 물건이고 다른 하나는 욕심이다. 여기서 물건이란 곡식이나 고기와 같은 식량, 또는 식량 생산을 위한 도구와 토지부터 노예까지 대상이 매우 다양하다. 물건의 종류는 여럿이나 욕심은 탐하거나 누리려는 마음 하나다. 성경의 십계명에서도 마지막 계명은 “탐하지 말라”인데 이는 살인이나 절도 등 행동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금지하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화폐는 모든 물건의 가치를 나타내는 공통 기준이다. 식량이나 토지, 노예 등 다양한 욕망의 대상을 화폐라는 하나의 목표로 통일되도록 만든 셈이다. 이런 점에서 원시 사회의 물신 숭배가 다양한 신을 모시는 샤머니즘에 가깝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 숭배는 돈을 향한 유일신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공격하는 부분은 물신 숭배라는 측면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황금 송아지는 물신 숭배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종교의 정신적인 가치를 외면하면서 눈에 보이는 번쩍이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을 지적하는 셈이다. 논어에서 군자가 되기 위해 멀리해야 하는 세 가지 위험요소로 청년은 색(色)을, 장년은 싸움(鬪)을, 노년기에는 물욕(得)을 꼽았다. 한국에서도 고려 시대 최영 장군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격언은 물욕을 멀리하고 정신적 가치나 인간적 관계를 중시하라는 주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집착을 대립적으로 규정해 온 셈이다.
하지만 점차 화폐의 논리가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이뤄져 왔다. 돈이 경제의 보조 수단에서 목표 자체로 돌변했다. 21세기 세계 자본주의는 이런 장기적 변화의 결정판에 가깝다고 진단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200여 국가는 국내총생산이나 1인당 국민 소득으로 순위가 매겨지고 개인의 ‘몸값’이나 문화 자산의 ‘시장가’ 등을 통해 사회의 모든 가치를 화폐로 계산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금이나 은 등 화폐로 사용하는 금속은 누구나 원하기 때문에 희소성을 갖는다. 한국의 격언처럼 사람들이 황금을 돌처럼 본다면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금이나 은의 가치는 고유의 성격이 아니라 인간들이 욕망하기에 가치가 생겨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을 제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미다스(Midas)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스 왕은 디오니소스 신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소원을 성취한 미다스는 바위를 황금으로 만들었고 모래를 금싸라기로 바꿔버릴 수 있었다. 당시 왕국의 신민들을 물론 주변의 왕들도 모두 미다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다스는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빵도 고기도 먹을 수 없었고 심지어 물조차 마실 수 없었다. 인간은 금을 먹고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다스는 신에게 부탁해 소원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
금·은과 종이화폐의 신비한 결합
▎콜럼버스의 귀환.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금과 은은 세계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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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스의 실수를 논리적으로 파악해 학문의 초석으로 삼은 사람이 바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다. 16세기부터 아메리카의 금과 은이 세계를 돌며 곳곳의 경제 활동을 자극했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봤다. 사람들은 세계 무역을 가능하게 하는 금과 은이 바로 부(富)라고 착각했다. 한 나라의 부는 바로 그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금과 은의 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국부란 눈에 보이는 금과 은의 양이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과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능력이라고 역설했다. 나라의 창고에 아무리 많은 금과 은을 쌓아 놓았더라도 식량을 생산하거나 물건을 만들어 외국에 판매할 능력이 없으면 부국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수출을 많이 해서 금·은을 벌어들이고 이를 잔뜩 쌓아야 부자라고 생각했던 18세기 중상주의자들에게 스미스는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면서 진리의 불빛을 비춘 셈이다.
금이나 은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가치가 생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화폐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돈이란 스스로 가치를 갖는 것도 아니고 유용성을 지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환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환상은 모든 사람이 믿게 되고, 믿음이 모이는 순간 엄청난 힘을 가진 현실로 돌변한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의 발전은 돈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금·은화와 종이의 신비한 결합에서 탄생했다고 설명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폐의 가장 큰 장점은 간편함이다. 금이나 은보다 가볍기에 많은 액수를 쉽게 운반할 수 있고 액면가를 다양하게 발행하면 계산도 수월하다. 다만 지폐는 발행하는 사람이나 기관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중국은 지폐의 사용 측면에서 세계 첨단을 달렸다. 제일 처음 지폐를 사용한 것은 고대 당나라 시기로 알려졌으며, 중세 송대(宋代)가 되면 이미 광범위하게 상인들이 지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정부가 지폐를 발행하면서 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사형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후 지폐 발행을 남용하면서 심각한 물가 상승을 겪어야 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은 화폐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지금부터 불과 200여 년 전 세계는 화폐의 다양성 시대였다. 한 나라 안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화폐가 유통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상인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금·은화와 서민들의 동전 사이에 환율도 일정하지 않았다. 1868년 메이지 근대화 혁명 이전 일본에서도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금속 화폐는 무려 60여 개에 달했고 지폐는 1600종이었다. 주요 선진국에서 체계적인 화폐 제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다. 처음 시작한 국가는 영국이다. 지방마다 제각각인 동전이 아니라 국가 전체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똑같은 모양의 동전 생산이 가능했던 덕분이다. 영국은 증기기계를 활용해 대규모의 규격화된 동전을 발행하고 균질적인 지폐를 찍어낼 능력이 있었다.
산업혁명은 곧 화폐혁명
▎독일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떨어져 벽지로 사용하는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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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금본위제를 채택한 영국은 정부가 발행한 화폐가 금과 같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멋진 환상을 활용해 훌륭한 화폐의 기초를 다진 셈이다. 영국의 왕립조폐소(Royal Mint)가 기계를 활용한 산업 방식으로 대량의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한 것은 1821년이다. 돈을 뜻하는 영어의 머니(Money)는 “주조하다, 찍어 낸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Moneta’에서 왔다.
1844년 영국 정부를 대표하는 영란은행은 지폐 발행의 독점권을 확보한다. 기술적인 발전이 제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영란은행에서 지폐를 만들 때 80여 명의 직원이 발행 날짜나 일련번호, 서명 등을 손으로 써넣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 사람이 기껏해야 하루에 400장 정도의 지폐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동판을 강철판으로 대체하고 2가지 색으로 인쇄하는 기술 등이 개발되면서 위조하기 어려운 대량 지폐 생산법이 놀랍게 발전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힘들게 완성되었는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수작업 지폐가 일반적이었던 시대에는 화폐위조 범죄는 정부의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영국의 경우 1797년부터 1817년까지 20여 년 동안 화폐위조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300명에 달할 정도였다.
국가가 종잇조각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은 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마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나 모방하여 흉내를 내는 족속은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뒤 처음 재무성 내에 비밀경찰(Secret Service) 조직을 설립하여 화폐위조 범죄를 막도록 했다. 살인과 같은 범죄를 막는 연방수사국(FBI)의 설립(19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위조지폐를 방지하려는 국가 조직을 출범시켰다는 말이다. 서부영화의 시대 배경인 19세기 중·후반 범죄가 창궐하는 무법 사회를 바로잡는 일보다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내는 국가의 마술을 은밀하게 보호하는 임무가 더 급했던 모양이다.
영국에서 시작한 국가 화폐의 제도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으로 점차 확산했다. 20세기가 되면 ‘1국=1화폐’라는 등식이 일반화되면서 화폐 단위가 그 나라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영국의 파운드와 미국의 달러는 경제 대국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프랑스의 프랑, 독일의 마르크, 이탈리아의 리라, 일본의 엔 등은 국기(國旗)만큼이나 대표적인 민족의 표상으로 등장했다. 21세기 미·중 대립의 시대에도 그린백이라 불리는 미국의 녹색 지폐와 모택동이 그려진 빨간색의 중국 인민폐는 경쟁하는 두 세력의 상징이다.
주어진 영토에서 통일된 지폐와 동전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과정은 앞서 보았듯 무척 길고 힘든 일이었다. 중앙은행이 만드는 화폐만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면서 동시에 경쟁 가능성이 있는 다른 화폐를 모두 제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독점을 달성한 뒤에는 다른 문제가 대두했다. 바로 정부가 무책임하게 화폐 발행권을 남용하는 행태다. 화폐 발행권의 과도한 사용은 이후 많은 정부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유혹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20년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인플레이션은 너무나 유명한 역사적 사례다. 맥주를 마시러 들어가면 일단 많이 주문해서 돈부터 낸 뒤 마시라고 할 정도였다. 술을 마시는 동안 술값이 급격히 오를 수도 있다는 비유인데 실제 지폐의 가치가 너무 떨어져 나중에는 벽을 도배하는 데 지폐를 사용할 정도였다!
유럽이라는 선진 지역에서 독일처럼 국가 전통이 강한 나라에서조차 정부가 무책임한 화폐 발행의 유혹에 빠졌으니, 취약한 정부가 들어선 신생 국가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많은 정부는 화폐 발행의 남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빈번하게 경험했다. 가장 최근에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사례가 충격적이었다. 1980년 짐바브웨 독립 당시 미국과 짐바브웨의 달러는 비슷한 가치였다. 그러나 2009년 미국의 1달러는 10의 25제곱 짐바브웨 달러 수준까지 도달했고, 짐바브웨는 자국 화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돈의 흔적을 남겨라
▎과거 금·은처럼 암호화폐를 채굴하는 ‘컴퓨터 광산.’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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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부 국가에서는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가 문제였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고액권의 지폐가 부정부패와 탈세의 유용한 수단으로 돌변하면서 새로운 고민을 안겼다. 정부의 역할이 증가하면서 세수를 확보하고 징세를 수행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고액권 거래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21세기 들어 유럽의 프랑스나 이탈리아 정부는 각각 1000유로와 3000유로 수준으로 현금 거래 액수를 제한할 정도다. 고액 거래는 은행 송금이나 카드 등 기록이 남는 방식으로 진행하라는 뜻이다. 자신들이 발행한 화폐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형도 서슴지 않던 정부들이 이번에는 세금 징수를 위해 역으로 공식 지폐 사용에 제한을 두고 있는 아이러니다.
1960년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지불 수단이 등장했다. 같은 국가의 화폐지만 카드라는 형식을 통해 전자 거래로 발전한 것이다. 익명의 현금은 도난의 대상이 되지만 기명의 카드는 안전했고 신용을 담을 수도 있어서 간편했다. 화폐와 금융의 기능이 하나의 지불 수단에 담기면서 소비자들은 신용 및 할부 구매를 통해 마음껏 쇼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현금과 카드의 사용을 통해 서로 다른 민족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미국인은 카드를 통한 신용구매에 선두를 달리며, 한국은 카드 과용으로 2000년대 카드 대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그러나 독일인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금 사용 비율이 80% 정도다. 슐트(Schuld)라는 같은 단어가 빚과 죄악을 뜻하는데 빚을 지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화폐의 진화 그리고 미래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화폐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경험했다. 하나는 유로라는 새로운 국제 화폐의 등장이다. 19~20세기 나라마다 자신만의 화폐 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동시에 국제 교류에서는 강대국의 화폐가 우선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예컨대 19세기 세계는 무역과 투자의 화폐로 당시 최고 강대국인 영국의 파운드를 사용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20세기 중반부터 미국의 달러는 세계 경제를 돌리는 유동성의 지위를 갖게 됐다.
유로의 탄생은 이런 경향을 뒤바꿔 놓았다. 한 나라의 화폐가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화폐를 하나의 가치로 묶는 획기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사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스페인의 페세타, 포르투갈의 이스쿠두, 네덜란드의 플로린, 프랑스의 프랑, 독일의 마르크 등이 사라지고 1999년부터 유로가 이 모두를 대신하게 됐다. 세계 화폐 질서는 달러가 여전히 지배적이지만 유로가 언제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화폐가 점점 탈(脫)물질화된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영국을 기점으로 만든 화폐 제도는 금본위제다.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의 양에 따라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이다. 영국의 금본위제가 안정적이고 신뢰받는 제도로 자리 잡자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 너도나도 이 제도를 선택했다. 제2차 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는 금 태환제(Gold Exchange Standard)가 만들어졌다. 미국만 금본위제를 유지하면서 다른 주요 국가들은 미국 달러와 고정 환율을 통해 안정적인 통화 질서를 형성한다는 개념이다. 프랑스의 프랑이나 일본의 엔화를 달러로 바꾼 뒤 금을 요구하면 미국의 중앙은행이 금을 내준다는 이론적 청사진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 제도를 1971년 일방적으로 종결했다. 이제 달러조차 금과 같은 물질적 기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들의 신뢰에 의존하게 되었다. ‘잘 만들어진 환상’으로서 화폐가 완성돼가는 과정이다. 미국의 달러는 굳이 황금빛의 금괴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세계인이 신뢰하는 환상으로 작동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2008년 등장한 암호화폐 비트코인은 국가가 보장하지 않더라도 탄탄한 소프트웨어만으로 기존의 화폐와 어느 정도 유사한 가치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비트코인은 컴퓨터 속에만 존재하는 디지털 화폐의 가능성을 열었고, 이제는 각국 중앙은행이 직접 디지털 화폐를 준비하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이나 중국은 2030년쯤 지폐와 동전을 폐기하고 디지털 화폐로 넘어간다는 계획을 고려하는 중이다.
경제학은 가치에 대해 다양한 이론을 세웠다. 스미스나 마르크스는 노동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믿었고, 상품의 유용성이나 희소성이 가치의 기반이 된다는 다른 학자들의 설명과 경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자본주의 상업 사회에서 가치의 기반은 노동도, 유용성도, 희소성도 아닌 돈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된 욕망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란 돈이라는 환상을 향한 사회적 믿음으로 쌓아 올린 마천루인 셈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