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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식의세계속으로] ‘EU 택소노미’와 대선 토론

    • 등록일
      2022-02-09
    • 조회수
      219
생소한 전문용어 남발은 정치혐오 불러
지식자랑 아닌 정책 토론의 장 열어야

지난주 만감이 교차하는 흥미진진의 대선 토론이었다. 미국과 중국에 항상 가려 눈에 띄지 못하던 유럽연합(EU)이 국내 대권 토론의 한 구석을 차지하니 소위 유럽 전문가로서 감회가 깊었다. 하지만 곧바로 패닉이 덮쳤다. EU 택소노미?!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는가 싶어 자괴감도 들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린 택소노미’란 EU의 환경정책에서 산업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특정 산업이 환경친화적인지를 구분하는 지표인 셈이다. 최근 원전과 가스를 여기 집어넣으려는 프랑스와 반대하는 독일이 대립하여 유럽 정치의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결국 녹색 라벨을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택소노미는 유럽의 언론들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전문용어다. 영국의 엘리트가 즐겨 읽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난해한 고급 단어를 쓰는 언론으로 유명하다. 이 잡지마저 택소노미라는 용어를 쓸 때는 따옴표를 활용한다. 게다가 ‘지속가능한 투자를 규정하는 의미의 목록으로서 “택소노미”’식으로 부연설명한다.

 

프랑스 엘리트의 매체 르몽드는 지난 1월 사설에서 EU가 선택한 택소노미라는 표현에 대해 ‘혐오감을 주는’(rebarbatif) 용어라고 비판했다. EU의 전문가 집단이 제조해 낸 자신들만의 해괴한 은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정치·행정 엘리트가 이런 생소한 전문용어를 남발해 시민의 정치 혐오가 강해지고 민주주의가 퇴보한다는 인식이 유럽에서는 보편적이다.

 

주말에 파리의 친구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는 자리에서 은행 간부, 30년 경력의 프랑스어 교사, 의사, 대학원생, ‘고3’ 수험생 등 다수의 프랑스 사람들에게 EU 택소노미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두 토끼 같은 둥근 눈으로 신기함을 표현했다. 그런 단어가 존재했던가? 언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교사는 세금(택스) 관련 단어냐고 오히려 되물었고, 은행 간부만 어렴풋이 내용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한국의 식자라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특히 공사다망한 대선 후보라면 아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유럽 엘리트에게도 부연설명이 필요한 이 괴팍한 용어는 환경 전문가만의 난해한 은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얄팍한 지식과 정책 수행 능력은 별개다. 일례로 훌륭한 코로나 방역정책을 세우는 데 ‘SARS-CoV-2’를 번역하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코로나바이러스-2라는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

 

슬픈 일은 질문을 던진 후보가 택소노미라는 어려운 용어의 껍데기만 알았지 유럽 환경정책이라는 알맹이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치열한 논쟁 끝에 원전과 가스를 그린으로 규정한 유럽 사례를 탈원전을 추진해온 여당 후보가 꺼낼 주제는 아니다. 원전이 많은 문제가 있으나 포기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EU가 결국 인정했기 때문이다.

 

국제적 흐름이 자신에게 불리한데도 굳이 토론에 들고 온 이유는 아무래도 말장난으로 상대방을 골탕 먹이려는 계산이었던 듯하다. 소박한 바람은 후보들이 놀이터의 어린이처럼 암기 실력으로 으스대지 말고 진정한 정책 토론의 장을 여는 것이다. 민주국가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전문가 뺨치는 지식이 아니라 가장 복잡한 사안을 이해한 뒤 쉽게 풀어서 국민에게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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