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경제적 손해 불구 ‘탈원전’ 전격 추진
佛 마크롱 원전 고수… 주변국들 ‘보험’ 역할
한국에서 프랑스가 낭만적인 나라의 대명사라면 독일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성격의 국가다. 프랑스는 패션과 미식, 그리고 명품으로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한편 독일은 자동차와 기계의 수출 대국이라는 사실이 이런 편견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에 대한 두 나라의 정책은 이런 전통적 인식과는 정반대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충격 속에서 전격적인 탈원전을 결정했다. 2022년까지 원전을 종결시키고 점차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비중을 늘려나가겠다는 방향 설정이다.
물론 원전을 포기해도 당장 재생 에너지로 대체는 어렵다. 이에 일단은 온실가스 배출이나 대기오염 등 환경 피해가 확실한 석탄, 석유, 가스 등 화석 에너지에 대한 의존이 심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재생 에너지에 대한 연구개발과 초기투자로 에너지의 경제적 비용도 상승할 것이 확실하다.
경제와 환경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탈원전이라는 이상적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돋보이는 이유다. 지난 9월 총선 이후 진행되는 연정 협상을 통해 녹색당을 포함하는 정부가 출범한다면 이런 정책은 계속되거나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에서는 독일 외에 스페인이나 벨기에 등이 탈원전을 선언한 상태다.
지난 9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앞으로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50년에 탄소 중립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재생 에너지에 대한 개발과 투자를 강화해야 하지만 원전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 마크롱의 현실적 계산이다.
세계에서 프랑스는 현재 미국(93개)에 이어 가장 많은 56개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으며, 발전(發電)에서 원전의 비중이 70%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참고로 한국의 원전 의존은 28% 수준으로 프랑스 다음이며, 미국이나 러시아는 20% 정도다. 이들 나라에서 탈원전이 초래하는 전환비용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원전 관련 프랑스 정치는 양분됐다. 극좌나 사회당, 녹색당은 탈원전을 주장하는 한편 공화당이나 극우는 원전 지속을 지향한다. 이 과정에서 중도의 현직 대통령은 지속을 선택한 셈이다. 프랑스는 특히 독립적인 군사세력으로 남으려면 원자력 능력의 보유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민간 원자력의 정치가 단순히 경제나 환경의 논리만 반영해서는 곤란하고 미래 군사력이나 독립적 외교 등 국가전략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상당히 강하다.
브렉시트로 영국이 빠진 상황에서 유럽의 안보 중심은 역시 프랑스다. 유럽은 미국과 나토를 통해 긴밀한 안보동맹을 형성하고 있지만,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유럽이 전략적 자율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프랑스가 원자력 능력을 유지하는 일이 유럽의 안보와 직결된다는 뜻이다.
독일을 비롯해 스페인이나 벨기에 등 프랑스를 둘러싼 이웃 나라들이 줄지어 탈원전을 선언하면서도 프랑스의 원전 강화 정책에 정부 차원에서 불만을 토로했다는 소식은 없다. 프랑스의 현실적 실용주의는 주변 국가의 이상주의 정책을 지탱해 주는 보험이 되기도 한다. 탈원전으로 전기가 모자라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그렇다면 프랑스의 넘치는 전기를 수입할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