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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3)] 미식(美食) 레스토랑 vs 패스트푸드 체인점

    • 등록일
      2021-03-17
    • 조회수
      279

프랑스·미국, 맛의 세계를 양분하다

 

후추 등 향신료 개척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대 열려, 식문화도 다양화
프랑스는 요리를 예술로 고급화, 미국은 대중음식 산업화 이끌어

▎루이스 파레 이 알카사르(Luis Paret y Alcázar)의 1775년 작품 [카를로스 3세의 궁정식사]. 왕족과 귀족은 먹지 못하고 선 채로 왕의 식사에 동반하는 역할만 수행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21세기는 식량과 관련해 거대한 아이러니를 안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식량 생산량은 최대인데 식량을 구하거나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는 상대적으로 가장 적다. 수렵채취 시대에는 과실을 줍고 따거나 사냥하기 위해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농경시대에도 인구 대다수가 피땀을 흘려 땅을 일궈야만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세기부터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농부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 현재는 지구촌 노동인구의 33% 정도만 농업에 종사한다. 미국은 농업 대국이지만 농업 종사자는 노동인구의 2% 미만이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식량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음식에 대한 관심이나 일자리는 여전히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화가 진행된 대부분의 국가에서 식품산업은 제일 중요한 산업이다. 식재료를 생산하는 일은 소수가 담당하지만, 이를 가공하고 포장하는 일이 새롭게 부상했기 때문이다. 식품은 유통산업의 제일 중요한 상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78억 인류는 매일 여러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데 농업 문화는 집에서 차려 먹는 경우가 많지만 산업화가 될수록 외식 빈도가 늘어난다. 대중급식이나 요식업이 중대한 산업으로 등장한 이유다.

 

전통적으로 농업은 쌀과 밀, 감자와 옥수수 같은 주식을 생산하는 일이다. 축산업은 소와 돼지를 키우고 어업은 생선을 잡거나 기르는 일이다. 자급자족의 전통 사회에서 이 같은 식재료는 획득한 즉시 곧바로 부엌에 도달해 요리를 한 뒤 식탁에 올랐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식재료의 생산에서 소비자의 입에 도달하는 과정을 매우 길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번 달의 주제는 먹거리의 ‘무엇’을 넘어 ‘어떻게’와 관련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요리(料理)란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헤아리고(料) 다스리는(理) 일이다. 요리의 첫걸음은 인간이 불을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인류의 조상은 불을 활용해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소화하는 일이 쉬워졌고, 그 결과 소화기의 크기와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었다. 여러 차례 되새김질하는 소의 몸통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소화기관의 축소는 체구를 가볍게 해 직립을 가능하게 했고, 여분의 에너지를 뇌가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뇌의 발전을 가져왔다. 소화에 할애하던 열량을 머리에서 쓰고 또 팔과 손을 움직이는데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에 익힌 요리, 즉 화식(火食)이 인류에게 문명의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됐다.

 

현대 사회에서 소금과 후추는 가장 기초적인 양념이다. 일반 음식점은 물론 학교나 직장의 구내식당에도 소금과 후추는 원하는 만큼 가미할 수 있게 비치돼 있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양념이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소금과 후추는 매우 귀중한 고가의 상품이었다.

 

특히 후추는 15세기 유럽 사람들이 위험을 무릎 쓰고 바다를 건너 원산지 인도와 동남아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목적이 될 정도였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 원정에서 후추를 가져온 이후 유럽인들에게 후추는 값비싼 이국적 향신료의 대명사가 됐다. 소금은 귀하긴 했지만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생산 가능했고, 내륙에서도 소금 광산이나 교역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아시아에서 생산된 후추는 인도와 아라비아를 거친 후에야 유럽까지 전달됐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비쌀수록 좋아 보이고 그래서 수요가 늘어나는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를 고대와 중세 유럽의 후추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의 씨앗, 후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판매하는 ‘바이아그라-고추’. / 사진:위키피디아

 

15~16세기 유럽인들이 경쟁적으로 인도 항로를 개척하는 모험에 나선 가장 큰 동기는 후추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92년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의 카리브 해 지역에 도착한 콜럼버스도 예외가 아니다. 불행히도 아메리카엔 후추가 없었다. 대신 매운맛의 고추라는 식물을 요리에 활용하는 인디언들을 볼 수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콜럼버스는 고추를 새로운 후추로 소개할 생각에 이름도 후추의 피미엔타(pimienta)와 유사하게 피미엔토(pimiento)라고 지었다. 단어 끝의 a를 o로 대체해 스페인어 여성명사를 남성형으로 바꿔 이해와 오해가 동시에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 피망(piment)으로 불리는 고추도 콜럼버스의 상업적 브랜딩의 후손인 셈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마젤란의 항해는 ‘진짜 후추’의 덕을 톡톡히 봤다. 1519년 스페인에서 출발한 마젤란의 함대는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이 동행했는데 항해 중에 대장 마젤란을 포함해 대부분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고, 빅토리아호 한 척과 18명의 선원만이 살아 돌아왔다. 놀라운 점은 빅토리아호 한 척에 실어온 동남아 후추를 판 금액이 당시 기준으로 거대했던 스페인 왕실의 마젤란 함대 투자금을 모두 환수하고도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우주탐사선 5대를 쏘아 올린 뒤 한 대만 귀환했고, 거기에 우주 광물을 실어 돌아왔는데도 투자금을 모두 회수한 것과 같은 이치다.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후추를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는 16~18세기 유럽 세력이 주도하는 세계 무역의 핵심 상품이었다. 당시엔 화물선도 나무로 만든 범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장거리를 항해하는 무역이었기 때문에 상품은 가벼운 고가품이어야 했다. 향신료는 이런 점에서 안성맞춤이었다. 따라서 향신료 생산의 중심이었던 인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을 각각 식민지로 차지한 영국과 네덜란드가 자본주의 발전을 주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초기 상업 자본주의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주식회사는 모두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후추라는 주요 상품을 성장의 밑천으로 발전했다. 후추와 더불어 계피와 육두구, 정향 등 아시아의 향신료는 유럽 자본의 축적과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자본주의 동력의 씨앗으로 작용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향신료를 실어 나르는 배의 밑창에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넣어 무게 중심을 잡았고, 그 위에 인도의 천과 옷을 얹어 유럽으로 가져갔다.

 

마젤란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만들어 놓은 항로를 통해 후추는 세계를 연결했다. 지구촌 사람들이 동일한 양념으로 통일되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셈이다. 콜럼버스가 기발하게 명명한 고추 또한 이 후추의 그물을 활용해서 세계 진출을 도모하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들이 아메리카의 매운 고추를 유럽으로 가져가 시장을 형성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고추는 유럽에서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향과 맛의 대결

 

유럽 요리에선 일반적으로 양념을 두 종류로 나눈다. 향을 내는 아로마(aromates) 형과 맛을 바꾸는 스파이스(spices) 형이다. 후추가 아로마 쪽이라면 고추는 스파이스에 가깝다. 콜럼버스의 유사성을 강조한 상업적 브랜딩에도 불구하고, 이 두 양념은 성격이 전혀 다른 셈이다. 구매력이 높은 유럽에 고추를 판매하는데 실패한 무역상들은 세계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매운 고추를 받아들이는 지역의 분포는 무척 흥미롭다. 멕시코 살사 소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메리카는 매운 음식을 즐긴다. 아메리카는 고추의 원산지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아프리카 또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매운 고추 소스를 더해 즐기는 문화다. 포르투갈의 신부들은 고추를 일본에 전달했다. 그런데 정작 일본보다 이웃의 한반도가 매운 고추를 적극 수용해 김치라는 민족음식을 탄생시켰다.

 

아시아의 요리 대국 중국과 인도의 태도도 대조적이다. 인도는 후추의 원산지이지만, 후추보다 고추가 잔뜩 들어간 카레를 민족음식으로 발전시켰다. 반면 중국은 인도에 비해 고추 수용에 미온적이었다. 물론 중국도 내륙 지역은 매운 음식으로 유명하다. 쓰촨 사람은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不怕辣)고, 구이저우 사람은 “매운 것도 두려워하지 않”(辣不怕)으며 후난 사람은 “안 매울까 두려워할”(怕不辣)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구의 무역 그물이 형성되고 여기에 아메리카의 신(新) 작물이 조합을 이루면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고추는 향신료에 속하는 비교적 신분이 명확한 작물이었다. 하지만 토마토는 채소인지 과일인지 알 수 없는 신기한 존재였다. 채소라고 여긴 사람들은 가지처럼 요리해 먹었고, 과일로 생각한 사람들은 멜론처럼 생으로 먹곤 했다. 17세기 말 스페인에선 기근이 닥치면 토마토를 감자처럼 주식으로 먹기도 했다.

 

18세기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선 토마토로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정작 토마토의 화려한 시대가 열린 것은 19세기다. 이탈리아에서는 토마토 주스가 전국적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민족 정체성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비의 이름을 딴 마르게리타 피자는 국기처럼 적색(토마토), 녹색(루콜라), 백색(모차렐라 치즈)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1880~1890년대 식품산업에서 토마토소스를 대량 생산하면서 파스타와 피자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는 1820년대 토마토를 활용한 케첩이 등장했다. 다양한 조미료를 섞어 토마토 원래의 맛은 찾아보기 어려운 케첩은 유리나 금속 통 안에 넣어 몇 년이라도 보관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19세기 미국에서 서부를 개발하고 남북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케첩은 요긴한 조미료로 부상했고 미국 정체성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심지어 1906년에는 케첩의 조리법과 명칭을 보호하는 법까지 제정됨으로써 동부 보스턴부터 서부의 샌프란시스코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맛의 통일이 이뤄졌다.

 

 

테이블과 민주주의


▎1848년 프랑스 대혁명의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공화국 연회’의 한 사례로 1847년 샤토루즈 모임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먹거리에 관한 ‘어떻게’라는 질문에 향신료는 ‘맛있게’라는 문명적 해답을 제공한 셈이다.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먹는 문제는 당연히 사회적 위계질서나 정치적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힘을 가진 높은 사람일수록 높고 넓은 자리에서 자유로운 자세로 귀한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왕은 눕거나 커다란 의자에 앉아 식사하는 동안 왕족은 작은 의자에서 식사에 동참했다. 귀족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간신히 앉아 식탁 모퉁이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서브하는 고기의 양도 왕족이 왕의 절반, 귀족은 왕족의 절반, 하는 식으로 점점 줄었다. 왕의 혼인과 같은 나라의 잔치라도 벌어지면, 백성은 식탁에 앉진 못해도 먼발치에서 행사를 구경한 뒤 남은 음식을 받아먹을 수 있었다.

 

식탁을 둘러싼 자리의 배치와 음식의 분배는 현대 사회에서도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위계질서와 의전에 민감한 외교관들은 상황에 맞게 정리된 국제무대의 규칙을 학습해야 할 정도다. 개인 파티를 하면서 포도주의 병권(甁權)을 쥐거나 바비큐 파티에서 고기를 구워 대형 포크와 칼로 썰어 나눠주는 것 또한 초대한 집의 남자 주인이다. 이런 습관이 ‘레이디 퍼스트’ 문화의 반영인지, 아니면 원시적 남성 권력의 잔재인지 조금 애매하다.

 

인류에게 민주주의의 모델을 제공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는 식사의 평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심포지엄’이라고 불리던 시민의 공동 식사는 공개적으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점에서 평등을 실천하는 초석이었다. 스파르타와 같이 평등을 특별히 중시하는 국가에서 모든 시민이 빠짐없이 소박한 식사 의식에 동참하는 것은 의무사항이었다. 미리 집에서 몰래 먹고 오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리스의 민주적 도시국가와 달리 로마 제국에 와서는 오히려 사치스런 삶의 방식이 유행했다. 목욕을 즐긴 뒤 누워서 식사와 음주를 즐겼던 로마인들은 화려한 잔치를 벌여 개인의 부를 자랑하면서 나눠주는 일을 즐겼다. 이때 냅킨이 등장하는데, 손님들이 남은 음식을 냅킨에 담아갈 수 있도록 제공한 배려였다고 한다.

 

중세와 근세의 유럽은 민주적인 사회였던 그리스보다 불평등한 로마의 습관을 계승해 발전시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는 돌고 돌아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잠자던 민주주의가 깨어나면서 공동 식사의 전통도 부활했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대중이 참여하는 ‘공화국 연회’는 그리스 심포지움의 근대판이다. 일례로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당시 프랑스 지방단체장 2만30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화국 연회가 열렸다. 구(舊)소련이나 중국에서 혁명 이후 추진된 공산사회의 공동 식사나 급식도 그리스 전통이 먼 훗날 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식의 사슬


▎근대 식품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프랑스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 핀란드 화가 알베르트 에델펠트의 1885년 작품. / 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유행한 공화국 연회는 함께 식사함으로써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드높이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심지어 스파르타는 개인적 식사를 이기적 일탈로 비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특징은 공동 식사와 동시에 레스토랑이라는 개인적 식사의 공간이 퍼지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파리에 처음 레스토랑이라는 전문적이고 상업적인 식사 공간이 만들어진 것은 18세기다. 초기의 레스토랑이란 쇠고기 뼈를 비롯해 다양한 부위를 넣어 끓인 곰탕을 쇠약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곳이었다. 이후 점차 다양한 요리를 팔기 시작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해인 1789년이 되면 파리에 100여 군데 레스토랑이 영업을 하게 됐다.

 

혁명으로 왕족과 귀족들이 대거 외국으로 도망가자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들이 레스토랑을 차리면서 요리를 위한 근대적인 전문 공간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 결과 1800년이 되면 파리의 레스토랑 수는 600개로 늘어난다. 혁명이라는 정치적 변화가 일궈낸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혁신인 셈이다. 명문가에서 실력을 발휘하던 요리사들은 이제 경제력을 가진 시민들, 즉 부르주아를 대상으로 귀족 같은 밥상을 차려 판매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미식의 세계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다. 물론 훌륭한 요리사와 지갑이 두터운 고객만으로 미식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미식 문학이 꽃을 피운다.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평론이 예술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듯 요리 평가에 문학적 능력을 동원함으로써 혀와 두뇌의 쾌락이 공명(共鳴)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미식평론가 그리모(1758~1838)는 요리사의 소스란 “화가의 마지막 붓 터치”와 같다면서 동양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연상케 했다.

 

미식의 사슬에는 요리 학교나 레시피 책의 등장도 중요한 단계다. 19세기 프랑스 요리사 마리 앙투안 카렘의 레시피 책은 무려 78가지의 소스 제조법을 제공한다. ‘코르동 블뢰’(Cordon Bleu)라는 요리 잡지사는 1895년 요리 학교를 개설하였고 현재 국제적 명성을 누리며 20여 개국에서 2만여 명의 요리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발전했다. 미식의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 또한 1900년 프랑스의 타이어 회사 미슐랭이다. 미슐랭 가이드(Guide Michelin)는 처음에는 타이어를 구매하는 고객에게 공짜로 제공하는 도로와 레스토랑에 대한 정보 책자였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는 판매용으로 제작됐고, 레스토랑 수준에 따라 별을 나눠줄 정도의 권위를 확보하게 된다. 코르동 블뢰처럼 미슐랭 가이드도 이제 세계 지도를 별표로 채울 정도로 지구촌을 포괄하는 활동 범위를 갖게 됐다. 상호 시너지를 강하게 발휘하는 요리와 미식의 세계적 사슬이 완성된 셈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대충돌


▎맥도널드가 프랑스 현지화의 목적으로 출시한 맥바게트. / 사진:조홍식

 

프랑스와 미국은 19~20세기 매우 대조적인 음식과 요리의 세상을 만들어 세계에 모델로 제시했다. 프랑스가 미식의 사슬을 완성하는 동안, 미국은 대중적 음식의 체인을 만들어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코르동 블뢰와 미슐랭의 나라 프랑스에 맞서 미국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KFC)과 맥도널드라는 글로벌 브랜드로 대항한다. 프랑스가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고급화에서 첨단을 달린다면, 미국은 음식의 산업화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인 주자다. 사회학자 조지 리처의 저서 [맥도널드 그리고 맥도널드화]는 이 체인점이 현대사회의 핵심을 상징하고 대표한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을 예측, 계산, 통제 가능하게 효율적으로 규격화함으로써 저렴한 가격에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위생적이고 친화적인 대중 공간을 창출해 냈기 때문이다.

 

2019년 현재 맥도널드는 3만6000개의 점포를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서 운영하고 있다.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각국의 물가를 비교하기 위해 맥도널드의 인기 햄버거 빅맥 지수를 개발했을 정도다. 뉴욕이나 서울, 런던이나 뭄바이의 빅맥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지역별로 가격을 비교할 경우 꽤 정확하게 각 나라의 물가 수준을 나타낼 수 있다는 가정이다.

 

맛보다 영양과 위생을 중시하는 미국의 전통은 뚜렷한 역사적 계보를 갖는다. 1860대 미국 필라델피아의 실베스타 그레이엄 목사는 술이나 고기, 향신료 등은 건강에 나쁘다며 음식의 첫 번째 조건은 맛이 아니라 위생이라고 강조했다. 1870년대 미국의 영양학자들 또한 칼로리의 개념을 본격 음식에 도입하면서 맛을 중시할 필요는 없으며 미래에는 인공 단백질만 섭취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식사가 가능하다고 선전했다. 패스트푸드가 만개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는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셈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대립은 서구 음식 문화의 공통 유산인 치즈에서 쉽게 발견된다. 샌드위치나 햄버거에 들어가는 미국의 치즈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사각형의 균일한 노란색 치즈다. 반면 프랑스 치즈는 소젖은 물론 염소젖도 활용하고 종류도 지역마다 달라 수백 가지 인데다 대부분 고린내를 풍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위생과 영양의 미국 치즈와 맛과 향의 프랑스 치즈는 이처럼 확연하게 다르다.

 

유럽 안에서 음식문화는 남부 지중해 지역이 프랑스에 가깝고 북부의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등은 미국과 유사하다. 남쪽에서 빵~올리브 기름~포도주의 조합이 지배한다면, 북쪽은 햄~버터~맥주의 콤비네이션으로 대립각을 형성한다. 게다가 15세기 종교개혁부터는 식탐을 죄악시하는 프로테스탄트 금욕 문화가 북부를 지배하면서 남북 대립은 더 강화됐다. 세계적 차원에서 본다면 미국식 음식 문화보다 프랑스식 미식의 전통이 더 강세를 보인다. 중국이나 인도 등 인구 대국들은 여전히 향신료를 즐겨 사용하며 지역적 다양성과 특색 있는 요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량 산업 생산과 맛의 규격화를 주도하는 미국식 음식 문화의 확장성을 무시할 순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과 프랑스를 대조적으로 소개했지만 사실 고급화와 대중화는 어느 사회나 공존하는 현대의 경향이다. 일례로 1804년 통조림을 처음 개발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의 니콜라 아페르라는 요리사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스퇴르도 프랑스 학자다. 살균을 통한 대중적 식품 생산의 길을 여는데 프랑스는 적어도 미국만큼 기여한 셈이다.

 

 

요리의 미래

 

2017년 현재 세계 자본주의에서 식품산업의 비중은 자동차 산업 규모의 두 배에 달한다. 이 분야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10대 기업은 모두 미국과 유럽이 독차지한다. 미국 쪽에는 마르스, 크래프트 하인즈, 몬델레즈, 코카콜라, 펩시콜라가 있고, 유럽 측에는 네슬레, 유니레버, 다논, 하이네켄, 에이비인베브 등이 있다. 크래프트 하인즈는 위에서 보았듯이 토마토케첩으로 미국인의 입맛을 통일해 성장한 기업이다. 10대 기업에는 못 들어도 미국의 켈록스는 위에서 언급한 그레이엄 목사의 제자인 켈록 박사가 요양원 환자들을 위해 콘플레이크를 개발하면서 1920년대 만든 회사다. 땅콩버터나 초콜릿, 껌 등 미국식 군것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을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됐다. 1867년 분유 생산으로 출범한 네슬레는 스위스 기업이고, 영국의 유니레버는 마가린과 비누로 성장한 일상용품 제조업체다. 프랑스의 다논은 우유나 야쿠르트 등 유제품으로 유명한 다국적기업이다. 흥미롭게도 코카와 펩시라는 미국의 음료 기업은 소다수 전문이고, 유럽의 하이네켄과 에이비인베브는 맥주 업체다. 금욕적 미국과 관용적 유럽이 대비되는 그림이다. 세계 자본주의 경쟁에서 중국이 G2의 자리까지 부상했지만, 아직 식품 분야에선 뚜렷한 대표 주자를 발견하기 어렵다.

 

음식과 요리의 미래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대량 생산과 규격화가 지배하는 식품산업의 경향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구에 생존하는 동·식물의 종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음식과 요리의 다양성 또한 대량 생산으로 사라지는 추세다. 주부는 사라지고 여성도 대부분 직장을 가진 현대 사회에서 외식과 공동 식사가 늘어나는 만큼 가족이나 친지와 함께 하는 식사는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사무실에서 식사를 대충 때우거나 군것질로 대신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흐름이다. 오죽하면 1989년에 요리를 천천히 만들어서 여유를 갖고 즐기자는 ‘슬로푸드 운동’이 파리에서 선포됐다. 프랑스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여 전식, 본식, 후식은 물론 아페리티프(식전 술)와 디제스티프(식후 술)를 즐기는 ‘프랑스 미식’을 2010년 유네스코의 인류 무형자산에 등재시키는데 성공했다. 21세기 프랑스에 미국식 패스트푸드점보다 일본이나 중국 식당이 더 많다는 통계는 음식문화의 산업화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국은 이 맛의 세계대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냉장고를 가득 채우는 향을 내뿜는 김치를 매일 먹는 민족은, 어지러울 정도의 고린내 나는 치즈를 먹는 프랑스에 가까울 것이다. 반면 라면과 햇반의 성공을 보면 한국은 미국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요리에 대한 선호도는 미국과 유럽이 지배하는 요리와 식품산업의 저울을 어느 쪽으로든 기울게 할 것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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