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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대처, 메르켈 그리고 박근혜의 길

  

  경향신문 2012-12-31

 

1848년 12월. 프랑스 대선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전권을 잃은 1815년 이후 33년 만에 ‘보나파르트 가문’이 재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1848년은 민중이 또다시 왕권을 무너뜨린 2월혁명 이후 최초로 남성이 보편적 투표권을 가진 해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선거에서 독재자의 후손이 선출된 것은 놀라운 결과였다.

 

2012년 12월 대한민국. 민주적으로 치러진 18대 대선에선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과반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역시 33년 만의 일이다. 지난 7월 당시 박근혜 캠프의 홍사덕 선대위원장은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던 안철수를 노동자와 농민, 귀족을 가리지 않고 포섭했던 루이 나폴레옹에 비유했다가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그가 역사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루이 나폴레옹은 안철수보다 박근혜와 훨씬 유사하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민주적 선거에서 당선된 나폴레옹 3세는 1851년 친위 쿠데타를 통해 공화정에 종지부를 찍고 제정을 선포하면서 황제로 등극했다. 이후 1870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그는 가끔씩 국민투표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장기 독재자로 군림했다. 33년 만의 민주적 복귀라는 숫자가 껄끄러운 이유다. 물론 21세기 한국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25년간 민주주의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와는 사정이 사뭇 다르기는 하다.

 

18대 대선을 통해 한국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뽑았다. 정치는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여성의 최고통치자 등장은 매우 드물고 진보적인 사건이다. 특히 유교 문화권인 아시아에서 여성 지도자 탄생은 획기적이다. 실제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등에서도 여성 대통령이나 총리는 전무하며 심지어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에서도 여성 대통령은 아직 선출된 적이 없다.

 

아쉬운 점은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독립적으로 정치적 성장을 한 것이 아니라 기반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부녀(父女) 대통령이나 총리는 인도의 네루-간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필리핀의 마카파갈, 파키스탄의 부토 등 매우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정치 문화를 가진 국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이라는 사실보다는 훌륭한 가문의 딸이라는 정치적 자본이 큰 힘을 발휘했다는 의미다.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는 영국의 대처 총리와 독일의 현직 메르켈 총리다. 아시아의 ‘공주 스타일’ 지도자와는 달리 대처는 동네가게 주인의 딸, 메르켈은 시골의 작은 교회 목사의 딸이다. ‘자수성가 스타일’인 것이다. 주변에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공주에 비해 자수성가한 지도자는 사회의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능력을 키웠기에 훨씬 민주적 리더십에 적합하다.

 

대처와 메르켈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대처는 양극화되어 있는 영국 정치 문화를 반영하듯이 야당과 자신의 반대 세력에 대해 무자비할 정도의 호전성과 공격성을 보여 ‘철의 여인’으로 통했다. 노조와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탄압의 채찍을 휘둘렀고, 아르헨티나와의 제국주의적 전쟁을 이끌었다. 여느 남성 지도자도 하지 못한 이념적 정책을 폈고 영국 사회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메르켈은 여성일 뿐 아니라 구(舊)동독 출신이라 통일 독일의 정치적 화합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소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합의와 융화를 중시하는 지도자다. 특히 독일은 다당제여서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메르켈은 우파인 기독교민주당을 대표하면서도 자유민주당이나 사회민주당 등 좌파와도 연정을 구성한 바 있다. 좌우를 연결하는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경험했고 내년 총선 뒤에도 재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2013년 새해는 한국의 신임 대통령이 국민과 신뢰의 관계를 구축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집권 5년간 국가를 잘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21세기 한국에서는 ‘33년 만의 복귀’를 통해 독재의 뿌리에서도 민주화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공주보다는 자수성가 스타일의 리더십을, 같은 보수 세력이지만 대처보다는 메르켈 방식의 화합 정치를 기대해 본다.

  

조홍식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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