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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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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자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정치학과 인간 본성(本性)

   인간 사회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학에서 연구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정치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은 동서를 불문하고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두 가지의 시각으로 나뉜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거나 혹은 선하다는 주장으로 인해 인간계는 선한 인간들이 사는 세계와 악한 인간들이 사는 세계로 구분된다. 예컨대 악한 인간들이 사는 세계의 전형은 토마스 홉스가 고안한 ‘자연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다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반대로 선한 인간들이 사는 세계는 어디가 있을까. 글쎄, 아마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마을 정도가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까.


  모든 물질의 본질을 하나의 원칙으로 규정해내는 서구적인 사유체계에서는 인간의 본성 또한 두 가지일 수 없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서양의 철학사조 때문에 서양세계에서는 두 가지의 인성론 중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 아마 동양의 경우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대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았을까.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선과 성악의 대립구도는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공자를 이어 유가 철학을 부흥시킨 맹자의 성선설과 유가의 이단아라 불리는 순자의 성악설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순자⌟는 그 중에서 물론 순자의 철학, 즉 성악설의 내용을 담은 책이다. 물론 ⌜순자⌟에 담긴 내용이 성악설에 국한된다고 하면 위대한 현자에 대한 결례일 따름이겠지만, 정치학을 공부하는 입장에 있어서 순자의 성악설은 책의 내용 중 단연 돋보이는 내용이다. 천리(天理)를 중시하는 맹자의 성선설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순자의 성악설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순자의 철학은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는데 있어서 현대정치이론과 유사한 인식을 공유한다. 덕분에 2000여년이라는 간극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독자들에게 더 강한 설득력과 매력을 전달하는 듯 보인다. 현대의 관점에서 순자를 평가하자면, 마치 현대사회에서 개인(혹은 권력)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권력분립이라는 보편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한 것과도 같이 성악설을 바탕으로 악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다음으로는 ⌜순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순자의 성악설을 중점적으로 소개해 보도록 한다.

 

순자(荀子)의 성악(性惡)설

  서두에서 순자 철학의 위대함(?)에 대해 찬사를 보내긴 했지만, 사실 순자에 관해서는 그의 친필로 추정되는 ‘순자’32편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사기’에도 짤막하게 기억되어 있을뿐더러 순자의 생몰 연대도 정확하지 않다. 그의 학문적 권위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남아있는 자료는 매우 소략하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 사상계에서 이단아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유가(乳痂) 일변도의 중국 사상의 조류 속에서 ‘천명(天命)과 천리(天理)’를 거부한 순자는 스스로를 유가의 일원이라 부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유가의 이단아로 평가된다.

  하지만 순자의 저서들은 그 어떤 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특히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순자의 인간 본성론은 현실적인 예증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순자는 같은 유가로서 맹자에게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맹자의 논리를 비판하며 자신의 이론을 공고화한다. 특히 자신의 ‘성악설’에 대해 설파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더더욱 맹자의 논리를 반증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순자⌟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하자.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74

  ‘사람의 본성이 악함’을 밝히는 순자 제 23편에서는 그 첫째 장의 첫 문장부터 맹자의 성선설을 부정하며 시작한다. 그것에 대한 예증으로 순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감정의 존재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하기 위함이 아니다. 맹자를 위시한 유학의 주관(主觀)파에서 주장하는 ‘덕치(德治)’가 불가능한 것임을 밝히고 자신의 ‘예치(禮治)’가 타당한 것임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그대로 따른다면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뺏게 될 것이라 말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가 있어야만 다스림이 가능할 것이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굽은 나무와 무딘 쇠의 예증을 통해 설득력을 높이는데, 다음과 같다. 


“굽은 나무는 반드시 댈나무를 대고 쪄서 바로잡은 뒤에라야 곧아지며,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에 간 뒤에라야 날카로워지듯이, 지금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은 반드시 스승의 법도의 가르침이 있은 뒤에라야 다스려지는 것이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75

  굽은 나무와 무딘 쇠는 모두 본성이 악한 사람을 뜻한다. 맹자의 말처럼 만약 모든 이의 본성이 착하고 바르지 않다는 증거로 그는 굽은 나무와 무딘 쇠처럼 애초부터 바르지 못한 존재들을 예시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것들이 바르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댈나무를 대고 찌거나, 숫돌에 간 뒤에야 가능한 것이라며 ‘법도와 예의’를 통한 사람의 교화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순자는 옛 성왕의 시대에 법도와 예의를 제정했던 것이 결국 이러한 이치에서 이뤄졌던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작위가 쌓여 예의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것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90

  즉 작위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은 본성과는 다르다는 것으로, 앞서 설명했던 작위와 본성의 구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예의라는 것은 성인이 만들어낸 것으로 ‘작위’이고, 작위가 쌓여 인간의 악한 본성을 누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이 본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제도와 법의 중요성이다. 만약 모든 인간이 작위로 하여금 성인의 본성을 가질 수 있다면, 언젠가 법이란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인간의 본성은 변함없이 악(惡)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예로써 다스려야 한다면 제도와 법의 중요성은 가히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 가지 더 찾아볼 수 있는 순자의 논리는 ‘누구나 다 악하지만 예를 통해서 교정할 수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우임금이 우임금으로서 존경을 받은 까닭은 그가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중략) 길거리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 수 있는 자질이 있고, 모두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 그들도 우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94

  11번째 장에서 순자는 ‘길거리의 모든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하여 앞서 주장했던 인간의 본질적인 ‘악’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논리에서 전환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로 우임금이든 길거리의 소인이든 모두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같은 본성에서 시작해 우임금은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고 행했기 때문에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며, 나머지 길거리의 소인들은 그럴 능력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인으로 남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누구나가 다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만, 이것은 누구다 나 성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이에 대해 순자는 ‘되지 못한 것과 될 수 있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97)’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길거리의 모든 사람에게도 우임금과 마찬가지로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 수 있는 능력’, 즉 ‘지(知)’가 존재하며, 그 때문에 모든 이들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성인이 되지 않은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이가 곧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되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번약(繁弱)과 거서(鋸黍)는 옛날의 좋은 활이다. 그러나 활을 바로잡아 주는 활도고리가 없다면 스스로 올바르게 될 수 없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803

  순자는 마지막으로 활과 활도고리의 예를 들며 훌륭한 스승과 좋은 벗의 역할이 중요함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순자의 성악설이 단순히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관계론)’임을 나타내는 부분으로 보인다. 만약 인간의 본성이 다른 존재와는 전혀 상관없이 계속해서 악하다면 좋은 친구나 훌륭한 스승이라 한 들 그것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을 통해 ‘악을 선으로 이끌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순자는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 관계론적인 측면에서 강조되어야 함을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순자는 “지금 좋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면, 곧 그가 듣는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일일 것이며, 그가 보는 것은 더럽고 음란하고 사악하고 이익을 탐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중략) 주어진 환경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804)”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순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았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성인이든 소인이든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사악하고 이익을 좇으며 음란하다. 이러한 본성은 결코 다른 것으로 바뀌거나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성인들이 만들어낸 ‘예의’라는 작위를 통해 악한 본성의 교화(敎化)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지(知)’를 가지고 있으며, 성인 또한 그것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오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비록 인간의 본성은 틀림없이 악할지라도 예치(禮治)를 통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에 덕치(德治)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내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바른 이해

  이렇게 본다면 순자의 성악설은 틀림없는 ‘존재론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양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관계론적 사고’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만약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데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다. 따라서 순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인성론이 아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순자의 성악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인성론이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순자의 학문을 대변하는 예(禮)와 제도(制度)를 이끌어내기 위해 성악설이라는 전제를 구성했다는 해석이다. 순자가 살던 시기는 전국시대로 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했던 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순자는 인(仁)보다는 예(禮)를 강조하기 위해 천명론에 근거한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 아래 두었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가지겠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불변한 본질’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통한 인성의 교화’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실천적 인성론이라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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