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 숭실대 교수, 정치학
‘가장 오랜 동맹.’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식민지 미국이 18세기 후반 종주국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도왔으니 프랑스는 미국에 250여년 역사의 태생적 동맹인 셈이다.
지난주 프랑스의 엠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부부는 미국을 국빈 방문하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환대를 누렸다. 양국 유명인사 수백명이 참석하는 백악관 만찬은 물론 바이든-마크롱 부부만의 개별적 식사도 나누며 우정을 과시했다. 마크롱은 이번 워싱턴 방문을 통해 바이든행정부 최초의 국빈 영접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게다가 지난 2018년 트럼프행정부에서도 미국을 국빈 방문한 경험이 있어 마크롱은 특수한 프랑스-미국 관계의 최대 수혜자가 된 셈이다.
요동치는 2022년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과 프랑스 정상회담의 메뉴에는 다양한 주제가 올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과 서방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대립구도는 두 나라의 특수한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국제무대의 배경이다. 물론 안보 분야에서 지난해 9월 미국이 영국과 호주를 하나로 묶는 군사협력체 오커스(AUKUS)를 출범시키면서 프랑스와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제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더 시급한 과제 앞에 일단락된 듯하다.
유럽연합의 대표라는 이미지 만들기
이번 마크롱 방미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한미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다. 바이든행정부는 지난 8월 인플레이션을 감축한다는 그럴싸한 목표를 내걸고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는 거대한 정책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기후변화를 방지하기 위한 친환경 정책 분야만 하더라도 3690억달러의 거대한 재정투입이 예정돼 있다.
특히 전기차 구매를 장려하기 위해 7500달러(1000만원) 정도의 지원금을 배정하는 관대한 조항은 미국의 새로운 친환경정책 방향을 상징한다. 문제는 북미지역에서 생산된 자동차만 지원금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보호주의적 내용이다. 미국이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유럽에서 생산된 전기차도 모두 지원금 혜택이 제한되고 있다.
마크롱은 방미에 나서면서 미국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미국의 IRA는 프랑스 기업에 ‘매우 공격적’인 조치라며 아쉬움을 표명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서방의 중심인 미국과 프랑스가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와중에 등장한 분열적 정책을 비판했다. 이에 바이든은 미국 정책에 부분적 결함(glitches)이 있을 수 있다며 외교적으로 한발 양보했으나 핵심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크롱은 이번 방미에서 IRA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의 산업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유럽에서 자동차 수출의 리더는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이다. 이웃 나라 독일이 가장 중시하는 정책 쟁점을 미국에 와서 던짐으로써 마크롱은 상징적으로 두 마리의 새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유럽 내부에서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으며, 유럽 밖 미국의 눈에도 유럽을 대표하는 목소리로 부상할 수 있다. EU라는 지역공동체를 외교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프랑스의 전형적 접근법이다.
미국 IRA의 전기차 문제는 실제 EU 전체에 골칫거리다. EU는 지난 수십여년 간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정책의 선구자라는 이미지를 쌓아왔다. 유럽은 미국과 중국이 화석연료를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환경보호 정책에는 인색하다고 비판해왔다. 이번에 미국이 친환경 정책에 드디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유럽은 환영하는 것이 당연하다. 친환경이라는 포장 속에 보호주의라는 씁쓸한 알맹이만 없다면 말이다.
미국 민주당 행정부의 목표는 명백하다. 환경주의와 보호주의를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국내 정치적 기반을 탄탄히 하는 일이다. 환경주의는 국내·외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정책 방향이다. 민주당 지지층은 물론 EU 같은 국제무대의 친환경 세력에게 만족감을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보호주의는 국제투자를 유치해 미국 고용을 증진하려는 국내 노동세력의 숙원이다. 공화당과 트럼프로 넘어간 지지층을 되찾기 위한 뚜렷한 선거 전략이라는 말이다.
자유무역 파수꾼으로서의 고민 반영
환경주의와 보호주의를 적절히 결합한 미국 IRA의 전기차 조항이 향후 미세하게 조정될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24년 공화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더라도 미국의 보호주의 경향은 사라지기보다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미국이 반중정서를 동원해 산업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이나 동아시아의 동맹국들까지 피해가 미칠 위험은 적지 않다.
프랑스를 넘어 유럽 차원의 고민이 심각한 이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서방세계에 대한 권위주의 독재의 위협을 인식시켜 주었다. 중국이 러시아의 행태를 방관하면서 권위주의 세력의 협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트럼프 시기 금 갔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심 서방동맹은 다시 강화되었다. 동시에 미국 군사력에 대한 유럽의 의존과 종속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미국은 마크롱처럼 영리한 지도자의 계산된 불평을 외교적 수사로 무마했으나 유럽이 미국을 감히 등질 수 없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유럽은 자신이 2020년대 유일하게 남은 다자주의 자유무역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무역의 혜택을 최대한 누리며 성공한 중국은 이제 노골적으로 중국 중심 발전전략으로 나가고 있으며, 미국조차 트럼프 이후 공화·민주의 정치색깔을 막론하고 보호주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로운 보호주의 경향에 대한 대응을 놓고 유럽은 역내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독일을 중심으로 네덜란드나 스칸디나비아 등 북유럽은 자유무역에 대한 의지가 강한 편이다. 프랑스를 위시한 남유럽에서는 미국의 보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유럽도 유사한 전략으로 협상의 지렛대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일단 EU도 ‘유럽구매법'(Buy European Act)을 추진한 뒤 상호주의에 기초해 미국과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전략이다.
이번 방미에서 마크롱이 IRA를 강조한 진짜 이유는 요원한 미국의 정책 변화보다는 유럽 내 파트너를 향한 명분쌓기였는지 모른다. 외교적으로 아무리 강력하게 항의해도 미국은 변하지 않으니 EU도 협상할 만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의 일환으로 말이다. 마크롱이 주도하는 프랑스의 전략은 세계 차원의 자유무역을 얻어내려면 우선 유럽의 도구적 보호주의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아시아와 함께 미·중에 대응하자는 전략
미국과 중국의 대립 속에서 세계무역이 보호주의의 늪으로 빠진 것이 이미 여러 해다. 결속력이 미·중만큼 강하지는 않으나 유럽연합도 힘을 합치면 거대한 행위자다. 경제적 선진국 가운데 세계무대에서 외톨이는 결국 동아시아의 한국 일본 대만이다. 미국 중국 유럽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쳐도 모자란 판국에 동아시아 시장경제 나라들은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느라 여념이 없다.
마크롱은 지난달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APEC)에 프랑스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해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코끼리 두 마리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대립하는 정글 세계에서 호랑이나 원숭이와 같은 다른 동물들이 협력해 평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호랑이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동아시아와 무리로 생활하는 유럽의 원숭이 비유였다.
마크롱은 유럽의 역내 에너지를 하나로 묶고 먼 태평양 지역의 호랑이들까지 끌어들이는 세계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셈이다. 정글의 제왕은 되지 못할지언정 생존을 위한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계획과 전략을 가진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