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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일신문] 모스크바의 ‘전승절’과 스트라스부르의 ‘유럽미래회의’ (22.05.12)

    • 등록일
      2022-05-16
    • 조회수
      171

예상하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군대와 시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쟁이 넉달째 돌입한 가운데 세계의 관심은 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세계대전 종전 기념행사에 집중됐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생각과 전략을 가늠하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푸틴은 원래 신속하게 우크라이나를 전쟁에서 누르고 기념일을 승리의 축제로 삼을 심산이었을 테다. 푸틴은 이날 열병식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특수작전은 피할 수 없는 조치였다고 강변했다. 국제사회가 우려하던 것처럼 핵무기 위협이나 전면전을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모스크바 붉은광장을 가득 메운 군인과 무기는 러시아의 전투의지를 표명하고 다지는 행사였다.

 

같은 날, 프랑스와 독일 국경 지역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유럽미래회의’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임이 있었다. 유럽연합(EU)의 시민 대표들이 모여 일년 동안 열띤 토론을 통해 힘겹게 만들어낸 유럽의 미래를 위한 제안을 발표하는 행사였다.

 

5월 9일은 1945년 나치 독일에 대한 소련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자,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독일과 화해를 기반으로 유럽 석탄·철강산업의 통합을 제안한 날이기도 하다. 유럽은 이날을 통합의 기점으로 삼아 ‘유럽데이’라 부르며 국경일처럼 기념하곤 한다. 국가의 경사에 해당하는 EU의 축일(祝日)인 셈이다.

 

같은 날 러시아는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유럽은 전쟁을 극복하는 화해의 시작을 기리는 대조적 현상은 매년 계속됐으나 올해만큼 두 행사의 의미가 엇갈린 적은 없었다. 한편에서는 붉은광장을 가득 메운 군대와 인파가 한 독재자의 연설을 경청하고, 다른 편에서는 시민들의 제안을 정치 지도자들이 귀 기울여 수용하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직접 제안하는 유럽의 미래

 

‘유럽미래회의’는 작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시작된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이고 과정이다. 유럽 전역에서 보통 시민들 가운데 800명을 제비뽑기로 선발해 유럽의 미래를 위한 제안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유럽의회 및 회원국 국회의원들과 협력하여 1년 동안 열심히 작업했고 그 결과물로 미래에 추진할 49개의 목표와 325개의 구체적인 조치를 마련했다.

 

시민들은 EU가 더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정책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현재 집행위원회가 독점하고 있는 입법 제안 권한을 유럽의회도 나눠가져야 한다거나, 청소년들에게 16세부터 유럽선거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는 제안이다.

 

또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농업보조금을 친환경 분야로 집중하고 EU 전체를 포괄하는 최소한의 공동의료 기준도 마련해야 한다는 등 상세한 부분까지 시민의 요구와 목소리를 반영했다.

 

이날 행사가 열린 도시 스트라스부르는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19세기부터 20세기 두차례 세계대전까지 피 흘리며 싸웠던 알자스 지방의 중심이다. 그곳에는 이제 EU 민의를 반영하는 유럽의회 본부가 있다. 시민들이 마련한 제안은 이날 EU 최고 지도자들에게 전달됐다.

 

유럽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과 회원국 정부를 대표하는 유럽이사회의 순회 의장인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그리고 유럽의회 로베르타 메촐라 의장이 EU를 책임지는 3대 지도자다. 두명의 여성과 한명의 남성, 국적은 독일인 라이엔과 프랑스인 마크롱, 그리고 몰타인 메촐라로 다양성이 눈에 띈다. 나이도 라이엔은 60대지만 마크롱과 메촐라는 40대 젊은 정치인이다.

 

유럽정치 중심으로 부상한 마크롱

 

이날 단연 관심이 집중된 스타는 지난달 재선에 성공한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유럽을 이끄는 주도세력이고 프랑스는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외교 강국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게다가 지난 5년간 유럽정치를 경험한 마크롱이 다시 5년 임기의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최근 은퇴한 앙겔라 메르켈을 대신하는 유럽의 실질적 리더로 부상하게 된 모습이다.

 

무엇보다 마크롱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의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로 부상하려고 한다. 그는 이미 첫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2017년 9월 ‘소르본 연설’을 통해 유럽의 미래비전을 밝혔다. ‘유럽주권’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도 이때다.

 

미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발전해야 하지만 동시에 유럽의 독자적인 외교·안보 능력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유럽이 외교·안보는 물론 경제 분야에서도 티격태격하며 마찰을 빚던 시기였다.

 

5년 전 마크롱의 유럽비전은 단순히 ‘연설’이라 불렸다. 이번 유럽의회에서 연설은 마크롱 스스로 ‘스트라스부르 선서(Serment)’라고 지칭했다. 역사적으로 선서란 신(神)과 왕국 앞에 국왕의 약속을 가리키는 용어다. ‘유럽미래회의’라는 21세기의 ‘민주적 신’과 EU 공식 지도자들로 구성된 ‘왕국’ 앞에서 마크롱이 선서하는 상징적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 선서’는 과거 ‘소르본 연설’의 정신을 이어받는다. 주권을 가진 더 강한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같다. 소르본 연설에서 마크롱은 유럽의 다양한 정책 분야를 나열하면서 유럽의 역할 강화를 주장했다. 이번에는 정책의 나열보다 제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부 국가가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만장일치제를 줄이고 다수결을 확대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마크롱은 EU가 최근 겪은 코로나 위기와 우크라이나전쟁을 언급하며 더 강하고 신속하게 공동의 결정을 내리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코로나 위기가 세계 공급사슬의 취약성을 부각했다면, 우크라이나전쟁은 유럽의 대외 에너지 의존을 뼈아프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EU는 20여 년 전 이미 유럽헌법을 추진했으나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부결돼 실패한 바 있다. 반드시 기본조약을 개정하는 작업이 아니더라도 제도 개혁은 27개 회원국 전체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그 과정은 항상 길고 어렵다. 이미 13개 회원국은 지난 9일 공동선언을 통해 현재 조약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으며, 따라서 조약 개정을 성급하게 추진할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여전한 유럽의 심화·확산의 딜레마

 

강한 유럽을 만들기 위해 성큼 앞으로 나가려는 프랑스에 반대하는 세력의 분포는 흥미롭다. 동유럽 9개국(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발트 3국)과 북유럽 3개국(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지중해의 몰타다. 헝가리는 이 선언에는 동참하지 않았으나 석유 수입금지와 같은 강한 러시아 제재를 반대하는 등 유럽 내에서 독자행보를 보이는 대표적 회원국이다.

 

바로 여기서 유럽통합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딜레마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나 독일 등 1950년대 통합을 시작한 나라들이 통합의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싶어도 뒤늦게 가입한 북유럽이나 동유럽 국가들은 보조금이나 나눠주는 단일시장 정도의 EU에 만족한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심화 vs 확산의 딜레마라 부르는 현상이다.

 

이같은 EU 정치의 파편은 실상 우크라이나로 튀었다. 새로 가입한 회원국들이 정책통합에는 시큰둥하면서 경제적 혜택만 누리려는 태도로 일관하자 초기부터 통합을 주도해온 서유럽은 신규 확산에 큰 거부감을 보이게 됐다.

 

신속한 가입을 희망하던 우크라이나에 마크롱이 ‘정치 공동체’라는 형식적 틀만 제시하고 정식 가입은 수십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며 찬물을 끼얹은 이유다. 유럽 안에서 기존 질서를 흔드는 헝가리나 폴란드가 유럽 밖에서 대기하는 우크라이나의 진입을 요원하게 만드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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