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과 미국이 개발 주도한 교통혁신 덕에 19세기에 본격 발전
‘포디즘’은 자본주의 생존력 강화시켜… 미래는 TI와 친환경이 대세
▎2000년 개통한 덴마크와 스웨덴을 연결하는 외레순(Øresund) 다리. 교통의 확장은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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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나라의 발전 수준을 평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교통 상황을 살펴보는 일이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일수록 다양하고 편리하며, 예측 가능한 교통수단을 쉽게 활용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알프스처럼 높고 험한 산맥도 터널을 뚫어 차량으로 빠르게 통과할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척추를 형성하는 로키산맥도 미국의 많은 고속도로를 통해 편하고 신속하게 관통한다. 반면 도로 사정이 열악한 아프리카 대륙의 사하라 사막 횡단은 파리~다카르 경주처럼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모험에 속한다.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이 2010년대 세계를 향한 발전 전략을 일대일로(一帶一路)라고 부른 이유는 단순하다. 교통이야말로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고, 사람들의 왕래와 상품의 교역을 활성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2000여 년 전 실크로드를 통해 아시아 대륙을 넘어 유럽의 로마 제국과 연결돼 있었다. 실크, 즉 비단이란 고대 중국의 첨단 기술과 생산 능력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고, 실크로드란 당시 중국의 세계적 위상을 곳곳에 전파하는 통로였다. 일대일로 구상은 결국 지구적 교통망의 수립을 통해 중국의 역사적 부활을 알리는 계획이다.
사람과 물건의 효율적 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교통이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하나는 길이다. 사람이 자주 다니면 길이 생긴다는 말이 있지만, 인류 문명의 발전은 인간이 계획하고 계산해 의도적으로 만든 길을 통해 가능했다. 도로의 인프라가 문명의 큰 순환계를 형성했다는 의미다. 교통의 두 번째 요소는 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인간은 처음에는 말처럼 빠르고 힘 있는 동물이나 바다의 바람을 활용하면서 이동 에너지를 확보했고, 점차 석탄이나 석유, 가스, 전기 등을 통해 이동의 힘을 얻었다. 달리 말해 길과 힘, 즉 인프라와 에너지의 조합이 인류 교통의 발전을 주도해왔고, 이를 통해 현대 문명이 탄생했다.
문명의 발전에서 교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구대륙과 신대륙을 비교하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시아, 유럽, 북아프리카로 형성된 구대륙은 한 지역에서 이뤄진 발전이 다른 지역으로 쉽게 전파됐고, 문명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상향평준화’가 진행될 수 있었다. 반면 명목상 구대륙이지만 사하라 사막으로 고립된 아프리카 남부, 그리고 신대륙인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는 다른 지역과 격리돼 문명의 교류나 확산이 어려웠다.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총·균·쇠]에서 강조한 지리적 조건의 차이다. 하지만 교통의 발전은 세계를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의 고립을 해결해 주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가면서 최강대국으로 부상했고, 오세아니아의 호주와 뉴질랜드도 손꼽히는 부자나라로 성장했다.
역사의 여명 시기 구대륙에서 문명이 전파되는 과정도 교통에 의존했다. 예를 들어 남아시아의 인도부터 서유럽 끝까지 거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인도유럽어는 원래 러시아 남부 및 중앙아시아에서 발전한 선진 집단의 문화가 확산한 결과로 보인다. 이들은 말을 가축화해 뛰어난 이동성을 확보했고, 철을 통해 다양한 도구를 만들었다. 발달한 교통수단(말)과 무기체계(철)는 이 집단의 지배 영역을 넓혀주었고 동시에 언어를 포함한 문화의 확산을 도왔을 것이다. 영어가 함선을 타고 바다를 통해 인도로 침투하기 수천 년 전에 이미 말과 마차가 유라시아 대륙에 인도유럽어의 뿌리를 전파한 셈이다.
문명의 발전을 좌우한 교통
말은 몽골이라는 중세 시대인 13세기에 몽골이라는 인류 최대 제국을 건설하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려 있는 소에 비해 말은 앞으로 끄는 힘이 강했기 때문에 밭을 가는데 훨씬 유용했다. 게다가 말은 달리는 속도가 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인 몽골은 신속한 이동성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중국부터 서남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포괄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고대에 인간이 말을 교통 및 전투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20세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말에 의존했다. 말이 힘차게 달릴 수 있는 평야는 뻥 뚫린 고속도로와 같았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기마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패였다. 러시아부터 폴란드와 독일을 거쳐 프랑스까지 연결되는 유럽의 평야 지대는 고대의 훈족부터 중세의 샤를마뉴나 근세의 나폴레옹을 거쳐 현대의 히틀러와 스탈린까지 유럽 지정학의 전쟁 통로가 됐다. 평야와 초원에서 말이 고속열차였다면 건조한 지역에서는 낙타가 말을 대신했다. 인류 문명이 일찍부터 발달한 서남아시아 지역은 말과 낙타를 모두 활용했다. 중국의 실크는 낙타의 등에 실려 아라비아를 지나 지중해로 옮겨졌고, 아프리카의 황금도 낙타 행렬을 통해 사하라를 넘어 유럽과 아시아에 전해졌다.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과 달리 로마 제국은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체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은 탄탄한 도로를 건설함으로써 군사의 이동과 물자의 운송을 위한 장기적 투자에 나섰다. 따라서 세력의 확장은 더뎠으나 지배의 토대는 확고했다. 이탈리아 중심에서 시작한 로마는 서로마 제국의 경우 1000년을 갔고, 그리고 비잔틴이라 불렸던 동로마 제국은 1000년을 더 유지했다.
도로로 엮은 로마 제국 2000년 존속
▎이탈리아 남부 폼페이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길.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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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전천후 도로 체계를 처음으로 만든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도로 폭은 5m에 달해 마차 두 대가 왕복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게다가 자갈이나 조약돌, 또는 커다란 돌판을 시멘트나 회반죽으로 고정하는 포장도로의 성격을 가졌다. 로마의 도로는 비가 내려도 사용할 수 있도록 배수 시설이 마련됐다. 게다가 도로의 두께도 1m 정도로 영구적인 사용을 전제하는 장기 투자였다. 로마가 정성을 들여 건설한 최초의 로마식 도로는 세력을 확장하던 초기인 기원전 312년경 작품이다. 로마로부터 남부의 카푸아(Capua)라는 도시를 연결하는 200㎞가 넘는 ‘아피아 도로’(Via Appia)다. 로마가 아직 작은 도시국가였던 시기에 남부 지역 정복에 나서면서 군대와 군수물자의 이동을 보장하기 위한 도로였다. 로마군이 남부로 진군하기 위해서는 늪지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탄탄한 포장도로 건설은 전쟁을 넘어 장기적 지배의 의지를 표명한 셈이었다.
600여 년이 지난 서기 4세기가 시작할 무렵 로마는 무려 8만5000㎞에 달하는 엄청난 도로망을 보유하게 된다. 이탈리아반도에서 시작한 로마 제국의 도로 체계는 영국부터 아프리카의 사하라까지, 그리고 스페인부터 서남아시아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촘촘한 지배와 이동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에너지 전문가 바츨라프 스밀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평균 2만 명의 노동자가 600년 동안 계속 일해야 이 정도 규모의 도로 체계를 건설(10억 노동일에 해당)하고 관리(30억 노동일과 동일)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로마 제국은 도로라는 뼈대가 만들어낸 역사적 성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 로마 제국의 지리적 중심을 형성하는 황금표식(Milliarium Aureum)이나 로마시 배꼽(Umbilicus Urbis Romae)은 로마 포럼에 위치한다. 중세에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표현이 만들어졌지만, 진정 고대 시기 모든 길의 출발점이자 중심은 수도 로마였다.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과 견줄만한 도로 체계를 다시 갖게 된 것은 19세기의 일이고, 동유럽의 경우 20세기가 돼서야 고대의 도로 밀도나 수준을 회복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로마 제국은 일찍이 교통 인프라의 표준을 세웠다. 로마는 견고한 도로 체계로 장기 지배에 성공했으며 동시에 아무리 단단한 도로망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빠르게 붕괴해 버린다는 교훈도 남겼다.
인류의 교통은 19세기까지 말이 지배했다. 심지어 20세기 중반의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말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동원한 말의 수는 60만 마리가 넘었고 전쟁 말기 소련이 독일로 진군해 들어갈 때도 수십만 마리의 말을 활용했다. 오죽했으면 19세기 새로 등장한 기차를 철마(Iron Horse)라고 불렀겠는가.
철도의 등장은 여러 면에서 교통 역사에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우선 말의 속도를 능가하는 교통수단이 수천 년 만에 나타난 셈이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육지에서 말보다 빨리 이동하는 방법은 없었다. 로마군이나 몽골 부대, 나폴레옹의 군대는 기본으로 말의 이동 속도에 종속된 셈이었다. 1840년대부터 유럽의 군대는 철도를 통해 신속한 대규모 이동이 가능해졌다. 군사력뿐 아니라 철도를 통한 상품의 간편한 운송은 왜 자본주의가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됐는지 설명해 주는 요소다.
초기 철도란 철로와 증기기관의 조합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달리 말해서 인프라와 에너지, 길과 힘의 기발한 조합이라는 뜻이다. 로마의 포장도로 이후 도로 인프라의 혁신은 영국 탄광에서 이뤄졌다. 처음에는 나무판으로 길을 만들어 석탄 실은 수레를 굴리다가 나중에는 나무 위에 고정한 평행의 철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기 철로의 석탄 수레를 끄는 것은 여전히 말이었고, 19세기 유럽 도시에서는 말이 끄는 철로의 차들이 대중교통을 담당하곤 했다. 철길로 운반하던 석탄을 때워 증기기관을 돌리면서 드디어 말을 뛰어넘는 교통수단이 탄생했다. 영국은 철강으로 철로를 깐 뒤 그 위에 석탄을 태우는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면서 산업혁명을 주도해 나갔다. 영국은 철도의 혁신을 이루었으나 철도의 잠재력이 폭발적으로 발휘된 것은 오히려 미국이라는 대륙적 규모의 새 나라였다.
철도는 미국의 중서부 개발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840~50년대는 유럽으로부터 이민이 대폭 늘어난 시기다. 감자 기근으로 아일랜드 인구의 20%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왔고, 1848년 유럽 대륙에서 혁명이 실패하자 수십만 명의 이민자가 독일 등지에서 미국으로 향했다. 일리노이, 인디애나, 미시간 등 미국 중부의 철도 건설은 이들 이민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얼마간 저축을 한 뒤 토지를 구매해 농민으로 정착했다. 길을 놓아 영토를 개척한 뒤 그곳에 자신들이 정착해 땅을 일군 셈이다. 미국 중서부의 드넓은 평원 지대는 인구가 400만 명까지 늘어나면서 미국이 독립하던 시기에 지배 지역이었던 동부나 남부와 맞먹는 수준으로 발전해 나갔다. 시카고는 미국 농업과 철도의 허브로 부상하면서 앵글로 색슨 중심의 청교도적인 동부나 노예에 기초한 목화 재배를 하는 남부와는 다른 새로운 미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돌로 만든 탄탄한 로마의 도로 체계가 제국의 뼈대를 형성했듯,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골격은 대륙 곳곳을 연결하는 철로로 이뤄졌고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철마가 피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철로와 증기기관의 조합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자동차라고 불리는 새로운 이동수단이 움트고 있었다. 기차는 철로라는 인프라에 종속된 존재였다. 이에 비해 자동차는 인간에게 익숙한 말에 더 가까웠다. 차를 타고 혼자 또는 몇 명이 소규모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보다 작은 자동차를 움직이는 에너지 방식을 놓고 증기기관과 내연기관, 전기모터가 서로 경쟁했지만 결국 가볍고 효율적인 내연기관이 승리를 거뒀다.
철마(鐵馬)의 시대
▎1869년 미국 횡단 철도가 유타주에서 완성되는 광경.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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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1900년에 창간된 자동차 전문 잡지의 이름은 ‘말 없는 시대’(Horseless Age)였다. 앞으로는 자동차가 말을 본격적으로 대신하는 시대가 열린다는 선언이었다.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승객이었다. 하지만 자동차는 승객이 직접 운전하는 자유와 해방의 이동수단으로 부상했다. 기차가 도시와 도시를 시간표에 맞춰 정기적으로 연결하는 집단적 교통이었다면, 자동차는 개개인이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도구였다. 이런 점에서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자동차 문화가 만개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자동차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도시는 자유 시장의 모델과 흡사하다. 공권력이 개입해 공동의 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말 없는 시대’는 충돌과 사고라는 위험한 죽음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교통 시장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교통법규가 제정되고 신호등이 설치됐다. 또 자동차 등록, 시력검사, 운전 면허증 등의 제도도 만들어졌다. 오른쪽에서 자동차가 주행하는 미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좌측통행을 선택한 영국의 사례는 교통법규의 인위적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했던 자동차는 20세기 중반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외모를 바꿔놓는 거대한 변화의 쓰나미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1945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트럭이 담당하는 상품 운송은 기차의 1/5에 불과했다. 미국은 1956년 6만5000㎞에 달하는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에 나섰다. 로마 제국의 돌길 체계에 버금가는 고속도로망을 미국은 훨씬 신속하게 구축했고, 도로는 미국적 삶의 방식을 디자인했다. 자동차와 고속도로는 미국의 중산층이 복잡한 도심을 떠나 자연과 가까운 근교 개인 주택생활을 가능하게 해 줬다. 자동차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거대한 쇼핑몰과 현기증 날 정도로 넓은 주차장은 미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 존 스타인벡은 1960년 미국인의 삶을 조사하기 위한 자동차 여행에 나섰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뉴욕부터 캘리포니아까지 똑같은 고속도로를 따라 대형 트럭과 함께 달릴 수 있는 전국적인 획일성뿐이었다. 지역적 특성이나 지방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아기자기한 상점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성격을 바꿔놓은 단 한 명의 기업가를 꼽으라면 헨리 포드가 가장 유력할 것이다. 포드는 20세기 전반기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자동차 산업의 대명사다. 19세기 영국에서 발전한 야만적 자본주의는 정글의 법칙을 연상시켰다. 탄광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이런 비극을 상징했다. 하지만 포드는 자동차 산업을 통해 노동자도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음을 증명했고, 자본주의의 생존력을 대폭으로 강화한 1등 공신이다.
‘말(馬) 없는 시대’
▎1908년 미국 포드 자동차 모델T 광고.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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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서 돈의 힘은 막강하다. 초기 자동차 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올즈모빌로 유명한 랜섬 올즈(Ransom Olds)나 데이비드 뷰익(David Buick) 등 자동차의 천재 발명가들은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영업이나 금융의 힘에 밀려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포드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Henry Ford Company)에서 축출된 경험이 있다. 이후 그는 1903년 Ford Motor Company를 새로 꾸린 뒤 회사의 주도권을 평생 유지하면서 자신이 상상하고 기획한 상품을 만들고, 자신의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포드는 대량 생산이 산업 발전과 사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초기 자동차 시장의 경향은 부자 구매자들의 취향에 맞춰 자동차를 개인별 맞춤 생산을 하는 패턴이었다. 포드는 개별 생산을 포기하고 대량 생산을 추구했다. 비용 절감을 위해서 부품을 규격화하면서 모델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포드사는 1908년 모델T를 개발한 뒤 향후 19년 동안 한 모델만 생산했다. 특히 시카고 정육 공장에서 가축을 부위별로 해부하는 체인에서 영감을 얻어 역으로 자동차의 조립 체인을 개발했다. 포드사의 규격화, 분업, 자동화 원리는 현대적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다.
자본주의 성격 바꾼 포디즘
▎미술관으로 용도가 전환된 파리 오르세 역의 전경.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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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마르크스의 [자본론] 출간 이후 사람들은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대립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포드는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높여주는 경영이 대규모 시장을 형성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에 공헌한다고 믿었다. 1914년 포드는 노동자의 임금을 2배로 늘려 “하루에 5달러”를 보장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동시에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고 1일 3교대 체제를 만들었다. 1916년 모델T의 가격은 360달러까지 내려갔다. 하루 5달러를 받는 포드 공장의 노동자가 72일만 일하면 새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노동자도 3개월만 일하면 자가용을 가질 수 있는 나라 미국은 당시 잔혹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유럽과 대비되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조국임을 증명했다. 착취의 체제가 아니라 풍요를 선사하는 자본주의 말이다.
포드는 기업가로 이즘(ism)이란 개념을 남긴 거의 유일한 경우다. 포디즘은 대량 생산과 비용 절감을 위해 규격화라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을 동원한 분업 체계를 의미한다. 또 대량 소비와 구매력 증진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의 비용을 아끼지 않고 선순환의 구조를 만드는 노력을 뜻한다. 20세기 전반기 포드라는 회사에서 시작한 포디즘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커다란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포디즘은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타협을 상징하는 깃발로 부상했다.
길과 힘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인간의 이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19세기에 말의 속도를 능가하는 철도와 자동차라는 이동수단이 등장한 이후 지구촌의 역사는 철로와 도로가 촘촘히 육지를 뒤덮는 과정이었다. 말과 마부는 사라지고 택시와 기사들이 도시를 누비게 됐다. 철도가 도달하는 도심의 역은 그 도시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예로 파리의 오르세 역 건물이 지금은 대표적인 박물관(Muséed’ Orsay)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현재까지도 자본주의 교통 혁신은 진행 중이다.
길이라는 인프라와 관련하여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터널의 활용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해저터널을 뚫어 연결하자는 계획은 19세기 초반부터 있었다. 실제 도버 해협을 건너는 터널이 완성된 것은 1996년이다. 런던이나 파리에서 시작한 지하철은 대도시에서 자동차와 철도가 지상과 지하를 나눠 사용하도록 만든 출발점이다. 현재 세계에서 제일 긴 터널 도로는 중국 광저우의 지하철 3호선으로 65㎞에 달한다. 알프스산맥을 관통해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고타르 터널(57㎞)이나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세이칸 터널(53㎞)보다 길다.
20세기의 미국이 고속도로의 대륙이었다면 21세기의 중국은 고속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전 세계 고속철 노선의 절반이 중국에 있을 정도다. 21세기의 다리는 물을 건너기 위해서라기보다 기차가 속도를 내기 위해 육지에도 짓는다. 베이징과 상하이를 연결하는 고속철은 2010년 164㎞에 달하는 세계 최장 단쿤특대교(丹昆特大橋)를 완성한 바 있다.
계속되는 창조적 파괴
20세기 내내 이동의 에너지로 군림한 것은 석유다. 휘발유와 디젤은 내연기관의 양대 연료로 자동차는 물론 기차, 그리고 바다나 하늘을 누비는 교통수단까지 책임졌다. 하지만 탄소 연료가 생산하는 공해와 지구 온난화 등의 환경 악화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인류는 탄소 에너지 활용을 강력하게 억제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특히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전기와 같은 ‘깨끗한 에너지’를 장려하는 움직임이 돋보인다. 전기차를 대량생산하는 테슬라가 인기를 끌며 떴고, 자동차 산업의 최대 기업 폭스바겐조차 2035년까지 탄소 에너지를 사용하는 차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교통 인프라와 에너지의 중대한 변화와 함께 첨단 정보통신(IT) 산업의 발달로 이동수단을 운전하는 인간조차 사라지는 현실이 빠르게 다가오는 중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자율주행 차의 등장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다. 자동차를 소유하는 대신 이용한다는 개념이 일반화된다면 도시를 잠식해 온 거대한 주차공간을 축소할 수도 있다. 도시의 택시나 장거리를 달리는 트럭 기사 등 수많은 교통업 종사자가 과거 마부의 운명을 맞을 가능성도 크다. 게다가 환경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면서 역설적으로 인간 에너지를 활용하는 자전거가 다시 유행을 타고 있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이미 배기량이 큰 고급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개념 없는 졸부’로 인식하고 대신 걷거나 자전거를 애용하는 친환경적 선택을 하도록 사회가 장려하는 흐름이다. 이런 변화가 얼마만큼 확장성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는 특정 국가의 미래뿐 아니라 지구촌과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변수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