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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9) 동아시아 선두 주자 일본의 두 얼굴 (20.06.17.)

    • 등록일
      2020-09-17
    • 조회수
      211

韓·中과 달리 메이지유신으로 선제적 개방, 기적 같은 부국강병 달성
2차대전 패망 딛고 경제부흥 이뤘지만 과거사 반성 않고 ‘퇴행’ 조짐

▎스모 경기를 관람하는 일본의 아베 총리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부부. / 사진:위키피디아

서구는 16세기부터 500년 가까이 세계 경제를 지배했다. 초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의 선두주자들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진출하면서 통합된 세계 경제 체제를 만들었고 이후 네덜란드·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대서양 양쪽의 서유럽과 북아메리카가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했다. 세계 자본주의는 유럽 문명의 뱃속에서 잉태돼 지구를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부상한 셈이다.

일본은 서구 중심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에 처음으로 균열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19세기 중반 서양 세력이 지구 반대편 동아시아까지 진출해 제국주의의 마수(魔手)를 뻗칠 무렵만 해도 중국과 일본의 사정은 비슷했다. 1840년대 당시 세계의 패권국 영국은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문을 열었고, 그로부터 10여년 뒤 미국은 페리 제독의 함대를 파견해 강제로 일본을 개방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충격이 전통을 중시하는 동아시아 두 대국의 내부 균형을 앗아간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외부 충격에 대한 두 나라의 경로는 완전히 달랐다. 청나라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시도했지만 근본적인 근대화 궤도에 올라서는 데 실패했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상징되는 변화의 기치를 내걸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진한 결과 서구와 견줄만한 근대 선진 국가 건설에 성공했다. 서양 세력이 강제로 두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지 반세기가 지나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중심 청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근대화에 성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20세기의 역사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일본은 동아시아 발전의 선두주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때로는 침략과 강탈의 제국주의 세력으로, 또 때로는 모방과 학습의 시범 사례로 앞서 달려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선두주자 일본의 성공과 한계를 밝히는 일은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과제다.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상업문화

일본의 신속한 근대화 성공을 단순히 한 시대 엘리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나 뛰어난 능력만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정치나 정책을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대부분의 전통적 역사관은 기존 일본의 조건보다는 메이지를 추진한 세력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근대화 이전 도쿠가와 막부(幕府) 시대(1600~1867년)의 일본은 이미 다양한 성공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는 정치의 안정과 분점이다. 일본은 16세기 말 한반도와 대륙을 차지하려는 전쟁에서 실패한 뒤 일본 열도의 막부 지배 체제를 탄탄히 구축해 270여 년에 달하는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막부제도는 권력의 집중과 분산을 교차시키는 흥미로운 형식의 정치를 실현했다. 국가의 상징적 권력은 여전히 천황(天皇)에게 있지만 실질적 권력은 막부에서 독점하는 집중·분산의 대항관계가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천황의 교토와 막부의 에도(江戶)가 대립하는 관계였다. 또한 실질 권력에서는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번(藩)이 공존했다. 동아시아에서 모든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됐던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 달리 일본을 유일한 봉건제로 보는 이유다. 물론 권력은 중앙 막부가 지배적이었지만, 지방의 번은 명목상 권력 분산의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정치 제도는 프랑스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프랑스 국왕이 베르사유 궁에 지방 봉건 귀족을 체류하게 하면서 지배력을 굳혔듯이 일본의 막부 또한 에도에 지방 번주(藩主)의 가족을 상주시켰다.

둘째는 상업문화의 발전이다. 정치 구조가 경제에 반영돼 막부가 있는 에도가 프랑스의 파리처럼 집중적으로 발전했다. 18세기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파리도 런던도 아닌 바로 에도, 즉 도쿄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근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전통 경제 체제에서 이미 세계 선두권의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대도시의 형성은 왕성한 경제활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쿠가와 일본에서 에도의 성장은 중심과 주변 지역의 잦은 왕래를 통해 가능했다. 전국의 번주들은 에도에 가족을 인질로 둔 채, 본인만 사무라이를 비롯한 신하 무리를 이끌고 에도와 번을 정기적으로 왕복했다. 지방 도시와 에도를 연결하는 번주의 잦은 교류 행렬은 일본 열도를 하나의 경제적 그물로 엮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상업 문화의 발전과 확대에 기여했던 것이다.

셋째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발달한 학습에 대한 열정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하는 논어는 동아시아 문화의 공통분모다. 유럽과 서구 문명이 만들어낸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가장 성공적으로 학습한 후발주자들이 동아시아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일본은 쇄국정책을 시행하면서도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간헐적으로 개방해 네덜란드와 교역을 유지했다. 그 결과 유럽의 정보와 학문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학문이라 해서 ‘란학(蘭學)’이라 불리는 지식 인프라는 메이지 이후 일본이 서구 문명을 신속하게 받아들이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은 개국 이전에 서구의 언어를 학습하기 위한 사전이 있었고, 이미 번역된 책이 다수 존재했으며, 이를 전공하는 상당수의 사무라이 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유교의 학습 열정과 란학의 인프라가 조우하면서 서구 문명의 대량 수입을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다.

일반적으로 일본 근대화의 결정적 사건으로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꼽지만 도쿠가와 사회의 잠재적 능력을 보여주는 증표는 많다. 에도 일본은 정치적 안정을 누렸지만 그렇다고 진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견고함과 경직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 질서가 지배적이었지만, 발달한 상업 문화는 두터운 상인 계층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또 문화적 학습 열정은 고전뿐 아니라 해외의 선진 문물에 대한 문을 열어 놓았다.

 

일본 군함, 태평양을 건너다

▎일본에 흑선의 공포를 안긴 미국 페리 제독이 상륙하는 광경. / 사진:위키피디아

메이지를 통한 본격적 정치 개혁 이전에 이미 일본은 서구를 모델로 하는 부국강병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1853년 미국 증기선의 위력을 경험한 일본은 곧바로 선진국 따라잡기 전략에 착수했다. 아편전쟁을 통해 대국 청나라가 서방의 함선에 힘없이 무너진 소식을 이미 접했던 일본은 바다를 지배하는 증기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방과 학습에 뛰어든 것이다.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선박을 긴급 수입했고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을 통해 항해술을 배웠다. 일본 최초의 근대적 군함 간린마루(咸臨丸)는 1860년 일본 시나가와를 출발하여, 한 달 남짓 항해한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의 위력을 통한 개국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거대한 태평양을 자신의 힘으로 가로질러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하였고 7년 만에 성공했던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지(福澤諭吉)는 태평양을 건너가 미국에서 웹스터 사전을 사 들고 귀국했다. 그리고 기존의 란학을 바탕으로 영어, 프랑스어 등 서구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 학문과 기술을 일본의 것으로 소화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일본은 부국강병을 추진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미국은 물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의 다양한 전략을 학습했다.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 비교해 보면 일본은 특징적으로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번들이 일종의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었다. 일례로 1863년 조슈(長州) 번은 5명의 무사를 런던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중앙 막부에 대한 무력도전(일명 도막(倒幕)운동)을 준비했다.

중앙의 막부가 지배하지만, 형식적으로 다원 구조를 가졌던 일본에서는 번을 중심으로 개방 정책에 나선 셈이고 결국 이 운동이 천황-막부의 이원 구조를 활용해 메이지 유신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런던에 파견된 무사 가운데 한 명이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였고 귀국 후 그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 부국강병의 대표적 인물로 성장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은 막부의 종말을 고하면서 새로운 근대 국가의 건설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메이지는 달리 말해 죠슈(長州)와 사쓰마(薩摩) 번의 연합 세력이 천황을 중심으로 통일 정권을 수립하는 한편, 중앙정부가 위로부터의 근대화 전략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시발점이 됐다. 이때부터 일본은 놀라운 근대화의 경로를 걷게 된다.

미국의 민족주의 전문가 리아 그린펠드는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을 중심으로 한 나라의 동력이 집중되면서 성공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저서에서 17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시너지가 이후 프랑스와 독일로 전파됐고, 19세기가 되면 유럽을 넘어 일본과 미국으로 확산됐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특히 일본은 부국강병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와 경제발전이 뒤엉켜 하나로 인식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

 

기업가가 된 사무라이

▎개항기 활발한 무역이 이뤄지는 요코하마 항. / 사진:위키피디아

실제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국가의 가장 커다란 목표는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무라이 집단이다. 무사 집단은 동아시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본만의 특징이다. 중국이나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은 평화적인 유교 전통의 휴머니스트 학자였지 칼을 다루는 무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전쟁을 업으로 삼는 기사와 귀족이 지배하는 유럽과 비슷했다. 일본이 서구의 전투적인 문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입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서유럽과 비교했을 때 일본은 무사의 수도 엄청나게 많았다. 프랑스의 경우 귀족의 비중은 인구의 2% 남짓이었다면 일본은 5~7%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사 계층을 형성했다. 도쿠가와의 평화 시대에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사 계층은 불필요한 잉여 집단으로 전락했고. 상당수가 거지와 다름없는 낭인이 될 정도로 신분이 하락했다. 이들에게 메이지 유신과 근대 국가 건설은 300년을 기다린 단비와 같았다. 1873년 농민도 무기를 들 수 있는 국민징병제가 시행되면서 사무라이는 전통적 군인의 특권을 상실했지만 근대화의 첨병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칼을 버리고 책을 든 사무라이는 근대 국가의 관료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들은 마치 전쟁을 하듯 국민을 동원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근대 국가 건설의 임무를 수행하려 나섰다.

근대 기업가도 사무라이 계층에서 대거 탄생했다. 물론 도쿠가와 시대의 상업 문화 전통을 이어가는 미쓰이나 스미토모 같은 기업도 있었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를 이끄는 것은 무사 출신의 기업인들이었다. 이들은 사업을 이익 창출을 위한 자본주의 활동이라기보다는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의 집단적 노력으로 생각했다. 과거 유교에서 천시하던 상인의 문화는 비난하면서, 장기적인 신뢰와 충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내세웠다. 서구에서 상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본주의 문화가 일본에 와서는 국가 건설과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새로운 버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895년의 청일전쟁과 1905년의 러일전쟁은 반세기 동안 지속한 일본의 근대화 노력이 거둔 성공을 증명하는 사건들이다. 이 두 전쟁은 동아시아 한반도를 무대로 삼아 진행된 세력 다툼으로 일본의 총체적 국력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확장됐는지를 잘 보여줬다. 일본은 두 전쟁을 계기로 대만과 한반도를 제국의 영토로 병합함으로써 서구로부터 근대 국가는 물론 제국주의까지 답습하고 나섰다. 이제 승승장구하는 일본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동아시아 무대를 넘어 세계적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일본이 모델로 삼는 영국·프랑스·독일 등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이었으며 미국 또한 태평양과 대서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세계적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1922년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해군조약은 일본이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해군 강대국으로 부상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5개국이 체결한 이 조약은 전함과 항공모함의 규모를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 등이 각각 순서대로 5(미)-5(영)-3(일)-1.75(프)-1.75(이)의 규모로 분배해 제한했다. 서세동점의 상징인 해군력에 있어 일본은 과거 흑선의 충격을 극복하고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제3의 해군 보유국가로 부상한 것이다. 19세기 세계경제의 중심은 영국이었고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제일 중요한 산업은 면직 산업이었다. 면화 원재료를 생산하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하던 1860년, 세계 면직 기계의 2/3는 영국에 있을 정도로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라는 등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867년 일본의 사쓰마 번은 영국으로부터 면직 기계를 처음 수입했다. 현대적 산업화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중앙 에도의 막부 정부가 아니라 지방의 번이었던 셈이다.

 

서구 열강과 어깨를 겨누는 일본

▎2005년 아이치 만국박람회의 도요타관. / 사진:위키피디아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내무경을 맡은 이토 히로부미는 1880년대 일본 국내 면직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가 역량을 동원했다. 그 결과 1890년대가 되면 일본 국내 면직 시장은 거의 일본 자체 생산으로 대체되면서 가내 수공업의 면직은 사라지게 됐다. 그러다 1920년에서 1937년 기간에는 일본 면직 산업이 황금기를 맞게 된다. 1933년은 일본의 면직 의류 수출이 영국을 초월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다. 일본은 해군력과 마찬가지로 면직 산업에서도 영국과 미국을 바로 뒤쫓는 제3의 세력으로 떠올랐다.

면직 산업은 원래 산업혁명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산업이다. 또 면직뿐 아니라 공산품 생산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일본의 부상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1929년 세계 공산품 수출 시장에서 영국, 독일, 미국은 각각 20% 정도의 시장 규모를 차지했고 프랑스가 10%, 그리고 일본이 4%로 5위였다. 1937년이 되면 일본은 세계시장의 6.9%를 차지하는 수준으로 성장함으로써 5.8%로 하락한 프랑스를 제치고 4대 공산품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당시 1930년대는 경제 대공황으로 세계가 어려움에 부닥쳤던 시기다. 기존의 강대국 틈새를 비집고 성장해 자신의 입지를 굳혀야 하는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와의 충돌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했고, 군부의 모험주의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맞부딪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은 흑선의 충격 이후 100년 가까운 기간에 놀라운 경제 발전의 성과를 이룩했지만, 부국강병의 생존 전략을 무리하게 확장해 제국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반복되는 승리에 도취해 무력을 통한 지배를 과신했고 그 결과 처참한 원폭 피해와 패배를 경험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 질서인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일본은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린 나라였다. 미국은 냉전의 상황에서 자유 진영 국가들에 자국의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수출을 통한 경제발전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특히 저평가된 엔화를 통해 수출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국방을 미국이 담당함으로써 군사비용의 부담을 덜 수도 있었다.

개국 이후 100여 년이 부국강병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시기였다면, 20세기 후반부터는 군사력을 포기한 평화 노선을 헌법으로 정해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평화로운 경제 중심 전략에서 일본은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성공을 거뒀다. 이 시기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그 어떤 선진국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1955~75년 사이 일본의 연평균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8.6%에 달했고,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은 9%라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경제중심 발전국가의 모델

▎일본 도쿄 신주쿠의 광경. / 사진:위키피디아

20세기 전반기에 일본이 면직 산업에서 영국을 추월했듯이 후반기에는 자동차 산업에서 미국에 도전장을 내미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원래 직물 기계 산업을 기반으로 사업을 일으킨 도요타는 1930년대부터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올라섰다. 일본은 도요타 외에도 닛산, 미쓰비시, 혼다, 마쓰다 등 다수의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또 전자산업에서도 세계를 주도하는 리더로 떠올랐다. 1960년대에는 트랜지스터를 활용하는 가내 전자제품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차지하면서 소니, 도시바, 히타치, NEC, 파나소닉 등 다수의 세계적 브랜드를 보유하게 됐다. 카메라의 캐논이나 팬탁스, 복사기의 리코 등은 20세기 후반 세계 전자 제품의 시장을 풍미한 브랜드들이다.

이처럼 다수의 유능한 기업군을 정부가 조정하고 조율하면서 일본은 세계시장을 점령해 나갔다. 그것은 마치 군대의 사령관이 다수의 사단을 전선에 배치해 작전을 펴나가는 모습과 유사했다. 무기를 버렸을 뿐 경제 부문에서의 전쟁은 지속하는 셈이었고, 일본의 이런 모델은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유형으로 정치경제학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을 다수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은 분명 부국이었지만, 국민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국민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작은 집에 살았고, 작은 차를 몰았으며, 소비보다는 저축에 더 전념하는 편이었다. 아마도 일본인이 가장 적극적인 소비에 나섰다면 그것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택에 대한 투자였을 것이다. 기업과 시민이 동시에 몰려들면서 만들어진 부동산 버블이 1990년에 붕괴하면서 일본은 장기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부동산만이 장기 침체의 원인은 아니다. 인구의 정체와 고령화, 비생산적인 공공부문의 투자, 혁신적 사고와 시도를 억누르는 보수적 문화 등이 모두 침체를 지속시키는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한동안 일본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장밋빛 예측이 나돌기도 했지만 이제 일본은 화석화되는 공룡의 모습이다.

세력의 흥망성쇠는 인류 역사의 기본 패턴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군사적 전성기를 구가했고, 경제적으로는 전후인 1950년대부터 1990년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경제 부국의 관점에서 일본은 여전히 세계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 규모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의 수출산업은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다. 특히 동아시아 국제 분업 구조에서 일본은 한국·대만·중국으로 연결되는 생산 사슬의 중요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가장 부가가치가 높고 핵심적인 부품 생산에서 여전히 경쟁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일본을 더 이상 동아시아 경제의 기관차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일본 없는 동아시아 경제 세력을 말하기는 힘들다. 그만큼 핵심 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후발주자 일본과 독일

부국의 계보에서 일본은 독일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나라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경제발전의 후발주자에 속하는데 각각 1868년의 메이지 유신과 1871년의 독일 제국 건국과 함께 신속한 발전의 궤도에 올랐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경제적 성공의 결실을 군사적 모험으로 날려버렸다는 사실도 공유한다. 또 두 나라 모두 전후(戰後)에는 강병(强兵)의 선택지를 버리고 경제에 집중한 결과 놀라운 경제적 기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일본과 독일은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걸어왔다. 독일은 통일을 이룸으로써 국가의 규모를 키워 다시 웅비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특히 유럽통합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과거를 반성하고 이웃을 안심시키면서 미래 발전의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달리 표현하자면 독일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유럽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인구 감소의 한계도 순혈주의를 포기하고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으로 전환해 새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반면 일본은 과거의 영광을 되씹으며 이웃과의 관계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평화적 경제발전의 길에서 벗어나 지금은 다시 군사적 ‘정상국가’를 꿈꾸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일본은 실제 인구가 매년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이민이라는 새로운 피를 대거 수혈할 상상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이 유럽연합이라는 세계 최대 경제 공동체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일본은 중국에 동아시아 중심의 자리를 빼앗긴 것은 물론 한국과도 역사를 둘러싼 분쟁으로 힘을 합치지 못하는 형국이다. 향후 일본이 동아시아 발전의 선두주자라는 역사적 징표만을 남긴 채 무기력하게 침몰할지, 아니면 솔직한 반성과 새로운 정신을 바탕으로 19세기 중반과 같은 혁신의 능력을 보여줄지 의문이다. 2020년대는 역사적으로 대립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략적 이익과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미래를 고민하는 시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 두 풍경] 등이 있다.

 

 

(원문 보기 링크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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