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6)] 스위스, 1인당 국민소득 8만 달러의 비결
(3월 17일)
땅에 갇힌 알프스의 나라, 풍요를 품다
▎스위스 경제수도라고 할 수 있는 취리히.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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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세계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나라다. 물론 면적으로만 보면 세계를 호령했던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도 작은 나라였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은 해외에 진출해 식민지를 차지하고 거대한 세계 제국을 형성했었다. 반면 스위스는 바다와 접한 지점이 전혀 없는 나라다. 영어로 ‘땅에 갇힌 나라(land-locked country)’라 불리는 이유다.
인류 역사에서 철도가 생기고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육지는 바다나 강에 비해 이동이 어려웠다. 평평하고 미끄러운 수면 위로 배가 움직이는 것보다 경사가 많은 땅에서 이동할 때 더 큰 비용이 들었다. 유럽의 주요 부국들은 고대 아테네부터 로마를 거쳐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까지 모두 해양 제국이었다.
게다가 스위스 영토는 독일처럼 거대한 평야를 가진 것도 아니다. 유럽의 유명한 알프스 산맥과 스위스는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될 정도로 스위스 국토 대부분은 산악지역이다. 산이 많으면 평야보다도 훨씬 더 이동이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든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땅에 갇힌 나라이자 산악에 위치한 국가가 부국으로 부상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가 거의 유일한 예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부국 스위스의 존재는 커다란 미스터리다. 이 신기한 비밀을 풀어나가는 첫 번째 열쇠는 베네치아나 네덜란드로부터 얻은 경험이다. 베네치아는 육지의 전쟁과 바다의 해적을 피해간 사람들이 석호(潟湖)에 흙을 부어 만든 땅이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도 바다를 막고 흙을 메워 만든 영토에 강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적대적인 자연조건이 반드시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는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강한 의지와 협력의 촉진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위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빌헬름 텔이 상징하는 강소국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를 상징하는 마터호른.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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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스위스는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나라로 손꼽힌다. 산과 초원이 어우러진 자연 속의 부자 나라 이미지가 멋지고 상쾌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스위스가 부자 나라로 부상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다. 전통적으로 스위스는 유럽 산악지역의 가난한 나라로 유명했다.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는데 이들은 각각 스위스란 나라의 독특한 역사를 반영한다.
어린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을 쏘는 빌헬름 텔(Wilhelm Tell)의 아슬아슬한 장면은 스위스 역사의 대표적 신화다. 중세 알프스 산골 마을의 포악한 영주는 도로변 막대기에 자신의 모자를 얹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했다. 텔은 이 명령을 어긴 죄로 체포당해 아들의 생명을 걸고 무자비한 사과 맞추기의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 전설은 14세기 초에 일어났다고 16세기에 기록됐지만, 19세기가 되면서 민주주의 바람을 타고 유럽 전역에서 대중적인 유명세를 누렸다. 압제에 저항하는 정신과 용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 스위스 민족 정체성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실제 역사에서 스위스의 모태(母胎)가 되는 산악 마을 간의 연합은 1291년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 등이 협력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루체른, 취리히, 베른 등의 도시를 포함하면서 점차 영역을 넓혔다. 원래 스위스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전제주의 대국으로 발전했다면, 스위스는 귀족이나 왕족의 지배를 거부하는 독립심이 강한 산악 마을과 도시의 연합체로 성장했다.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는 유럽의 전쟁에 동원되는 용병들이다. 스위스의 병사는 원래 캉통(canton)이라 불리는 주 단위에서 운영하는 군대에 속했다. 15세기 스위스 군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용맹한 전사로 명성을 떨쳤다. 스위스는 이런 점에서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이미 군주가 아니라 소속 공동체를 위해 싸우는 근대적 군대의 씨앗이 됐다.
이런 유명세 덕분에 16세기부터는 외국 군주들이 스위스 군인들을 용병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군인들이었지만 돈을 챙기는 쪽은 캉통 정부였다. 1701년 스위스 용병은 5만400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만5000명은 프랑스, 1만1000명은 네덜란드에 속해 전투를 벌였다. 이처럼 스위스가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국에서 활약하는 용병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 용병은 당연히 자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다용도 스위스 칼은 유명한 관광 상품으로 팔린다. 이 칼 또한 스위스 군대와 민주적 역사의 산물이다. 귀족만이 무장(武裝)할 수 있었던 유럽의 전통과 달리 스위스에서는 누구나 칼을 몸에 지닐 수 있었다. 그만큼 스위스는 민주적인 국가였던 셈이다. 총이 칼을 대신하게 된 19세기 말 스위스는 총의 분해와 조립에 필요한 도구이자 근대 식품인 깡통을 열기 위해 군대용 다용도 칼을 개발하였다. 민주 전통의 군대와 선진적인 산업의 결합이 스위스 군대 칼(Swiss army knife)을 낳은 것이다.
다양성의 모델, 언어와 종교의 모자이크
유럽은 작은 대륙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많은 편이다. 중소 규모의 국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인데 스위스는 그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스위스가 가진 다양성은 유럽에서도 독보적이다. 한국에서 민족의 기본 조건이라고 여기는 언어와 문화만 보더라도 스위스는 크게 3개의 언어권으로 나뉘어있다. 독일어(62%), 프랑스어(23%), 이탈리아어(8%)가 스위스의 주요 언어다.
획일적으로 생각한다면 스위스의 언어는 소수의 언어를 다수의 독일어가 흡수해 통일했어야 한다. 또는 스위스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각각 주변의 강한 국가로 통합됐어야 한다. 독일어 사용자는 독일로, 프랑스어 집단은 프랑스로,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말하는 사람들은 이탈리아로 합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스위스는 언어가 달라도 하나의 민족으로 똘똘 뭉쳐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 시민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에 대한 배려는 극소수만이 사용하는 로망슈어를 1938년 국어로 인정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이 언어는 불과 3만여 명, 즉 국민의 1% 미만이 사용하지만 독일·프랑스·이탈리아어와 함께 스위스의 공용어다. 스위스 4개 공용어 인구를 다 합해도 100%가 되지 않는 이유는 스위스는 외국인이 대거 거주하기 때문이다. 스위스 인구에서 외국인 비중은 25%를 넘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스위스의 다양성은 언어뿐 아니라 종교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유럽의 역사에서 심각한 대립과 전쟁의 원인이었던 가톨릭(구교)과 프로테스탄트(신교)가 스위스에서는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데 성공했다. 2018년 현재 스위스에는 64%가 기독교에 속하는데 가톨릭이 프로테스탄트보다 조금 더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민자를 중심으로 5% 정도가 무슬림이며, 28%는 종교를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다.
많은 부국굴기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하나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부자나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16세기 언어와 종교를 달리하는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의 지배 세력과 싸우면서 부국강병을 이룬 네덜란드나, 17~18세기 영국처럼 잉글랜드가 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흡수하며 대영제국을 형성한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스위스는 이들보다 늦게 발전했지만,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부국의 모델을 제시했다. 영국과 비교하더라도 소수를 흡수하는 다양성의 소화(消化)가 아니라 차이점을 그대로 살려 배려와 공존이 가져오는 풍요를 만들어낸 것이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 이슬람교의 모스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결정을 내려 스위스가 폐쇄적인 국가인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스위스는 인구 850만 명 가운데 25% 이상이 외국 출신일 정도로 이민자 비율이 높은 개방적인 국가다. 또 외국인을 인구의 10% 미만으로 제한하자는 국민투표를 1970년 이후 여러 차례 실시했지만, 매번 실패한 바 있다.
스위스의 역사는 13세기에 시작되었지만, 근대적인 연방국가가 세워진 것은 1848년이다. 스위스는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어와 종교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캉통이라 불리는 26개의 주(州)로 구성되어 있다. 외교와 국방, 세관과 화폐만 연방 단위에서 관리하고 나머지 정책은 모두 주 단위에서 결정하고 시행한다. 사법·치안·교육·보건·교통·세제 등이 대부분 주의 권한이다.
요즘은 비밀투표가 일반화됐지만, 스위스의 두 캉통에서는 여전히 란즈게마인더(Landsgemeinde)라 불리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다.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거수(擧手)투표를 하는 14세기의 전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정형화해야 속이 풀리는 근대에 스위스는 작지만 색다름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보존하는 독특한 사회를 만들어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다양성의 존중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지역이 중시하는 전통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때로는 무척 보수적인 전통이 개선되지 못하는 장벽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이 투표권을 얻게 된 남녀평등에 관한 한 후진국이다. 1960년에 제네바에서 여성이 지역 사안에 대해 투표권을 얻기 시작했는데, 연방 차원에서 투표권이 인정되려면 국민투표를 통해 시민의 다수와 캉통의 다수라는 2중 다수를 충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미국’, 낮은 조세 부담과 공공지출
▎빌헬름 텔의 사과 맞추기 이야기를 보여주는 벽화.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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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을 만드는 데 중요한 정치·경제의 관점에서 스위스는 ‘유럽의 미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은 19세기 비슷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로 경제발전을 시작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의 시장 중심모델과 유럽의 혼합경제로 분화됐다. 국가의 역할을 최소로 줄이는 미국과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유럽으로 대립했던 시대에 스위스는 유럽에 있으면서도 미국에 가까운 정치경제의 특징을 보여준다.
스위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지출이 35% 미만인 나라다. 프랑스가 55%가 넘는 큰 정부의 대표주자라면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은 50%를 넘는 복지 국가들이고, 영국이나 독일, 이탈리아도 45%를 넘어선다. 참고로 미국도 41%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위스는 부국 가운데 가장 작은 정부를 가진 나라라 할 수 있다. 스위스의 국내총생산 대비 조세부담률 역시 29%에 불과해 민간 시장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스위스의 작은 정부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7명에 불과한 장관의 수다. 스위스는 대통령도 따로 선출하지 않고 장관이 돌아가면서 담당하기 때문에 국민은 누가 대통령인지 잘 알지도 못할 정도다.
작은 정부와 낮은 세금은 스위스가 강소국이 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사업하기도 어려운데 국가가 비즈니스에 기생하면서 부를 빼앗아 버린다면 부자나라가 되기는 요원하다. 스위스는 오래전부터 다수의 캉통이 서로를 견제하는 연방주의 모델을 발전시킴으로써 중앙정부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는 장치를 소유했던 것이다. 풀뿌리 캉통 민주주의가 연방정부를 제한하는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