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부의 당혹: 황금 세기 홀란드의 문화]라는 역작에서 네덜란드에 공존했던 금욕적 칼뱅주의 정신과 최초의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샤마의 흥미로운 해석에 따르면 한편에는 넘쳐나는 자본과 부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황금소를 비난하는 칼뱅주의 기독교가 있었다. ‘부의 당혹’이란 바로 이런 모순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홀란드 사람들은 부를 모아 재산을 축적하기보다는 아예 소비해버리는 성향을 보였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더 큰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20세기 케인즈가 이론화한 소비와 수요가 이끄는 경제 성장의 모델이 이미 17세기 네덜란드에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는 의미다.
네덜란드는 부국굴기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경제체제를 완성한 사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세계 차원의 제국을 형성했지만, 이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과 산업을 발전시키는 자본주의적 모델을 형성했지만 하나의 민족국가를 만들어내거나 세계적 시장을 개발하지는 못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세계 시장을 휘젓는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을 동시에 보유한 명실상부한 근대 자본주의 제국을 낳았다.그렇다면 네덜란드에서 이런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될 수 있었던 궁극적 비결은 무엇일까. 네덜란드는 어려운 지리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생존이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불굴의 정신을 가지게 됐다. 이런 상황은 베네치아가 바다 위에 흙을 메워 도시를 건설해야 했던 과거를 상기시킨다. 또 네덜란드가 험한 지리 조건에 처해 있었지만 영국·프랑스·독일 등 다양한 세계를 연결하는 길목이었다는 사실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국제적 교역에 있어서 지리적 중심지라는 장점은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반도의 발전에도 적용되는 요인이었다.경쟁과 협력의 비결
▎렘브란트의 풍차 그림. 낭만적 풍경과 별개로 네덜란드인들의 자연과의 사투가 숨겨져 있다. / 사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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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덧붙이자면 네덜란드는 바다에 접한 낮은 나라이자 동시에 많은 강이 흘러 당시 기준으로는 내부 교통이 가장 발달한 지역에 속했다. 유럽을 대표하는 라인 강은 북해 저지대와 게르만 세계를 긴밀하게 연결했고 뫼즈, 레스코 등의 강 역시 이 지역을 촘촘하게 가로질렀다. 게다가 낮은 지역이다 보니, 많은 운하를 통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운송망이 상대적으로 쉽게 마련됐다. 다시 말해 현대의 고속철이나 고속도로와 같은 효율적 교통 인프라인 운하가 도시와 도시를 긴밀하게 연결한 덕분에 당시로써는 유일한 교통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독립과 황금기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로 향해가는 역사적인 완성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다만 낮은 나라로 불리던 지역에서 북부만 네덜란드라는 명칭으로 독립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통적 저지대가 남북으로 분단된 모양이 됐다. 18세기가 되면 산업혁명의 시작과 함께 석탄을 보유한 남부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하지만, 정치적 분단으로 저지대 전체가 지녔던 상호 보완성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이나 프랑스 등이 국내 교통 인프라를 발전시키면서 보호주의적 발전 전략으로 나서자 네덜란드와 같은 선두주자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탓에 네덜란드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의 선두 자리를 내놓게 된 것은 불가피했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