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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2)] 네덜란드, ‘낮은 나라’의 세계적 비상(飛上) (11/17)

    • 등록일
      2019-12-12
    • 조회수
      964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2)] 네덜란드, ‘낮은 나라’의 세계적 비상(飛上)

“뉴욕, 런던 이전에 암스테르담이 있었다”


▎네덜란드가 17세기 황금시대에 지은 암스테르담 시청 건물. 현재는 네덜란드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진 : 위키피디아

네덜란드(Netherlands)라는 단어는 저지대 즉 ‘낮은 나라’라는 뜻이다. 네덜란드는 스위스처럼 높은 산이나 고원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바닷가의 평평한 지대, 심지어 바다보다도 낮은 땅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나라다. 이처럼 국가로 호칭할 만한 제대로 된 고유명사 하나 갖지 못한 이 지역이 어떻게 하나의 나라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세계를 지배하는 최강의 세력이자 부유한 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고대 바빌로니아부터 부국굴기 시리즈를 통해 차례차례 살펴본 결과, 부자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부터 솟아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부국은 대개 그 전의 다른 부국의 젖을 먹고 영향받으며 성장해 오다가 이를 극복한 뒤 새로운 모습을 띤 부국으로 탄생하곤 했다. 예컨대 그리스는 바빌로니아의 영양을 섭취하며 성장했다. 로마 제국 또한 그리스를 통해 배우다가 결국 그리스를 누르고 떠올랐다. 이런 점에서 네덜란드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16~17세기 스페인을 물리치고 신흥 부국으로 등장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부국은 지리적으로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에 자리 잡아 다양한 장점을 취사선택하고 흡수·개발하면서 성장했다. 강이나 바다 같은 물길이 있는 지역이 큰 이득을 봤다. 네덜란드가 위치한 저지대는 17세기 이후 강대국 및 부국으로 황금기를 경험하기 훨씬 전부터 북해의 대표적인 교역 중심지 역할을 했다. 실제 플랜더스라 불리는 지역의 브뤼헤는 북구의 베네치아로 통할 정도로 무역 허브 역할을 담당했다. 중세 후기에는 안트베르펜이 브뤼헤를 대체하면서 북해 무역의 중심이 됐다.

부국의 또 다른 공통점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물론 대부분 주변 지역이나 해외 멀리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능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유럽의 경우, 그리스 아테네나 로마 제국에서 보듯 지배적 군사력을 통해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정치적 자본주의’가 하나의 전통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역시 전형적으로 군사력을 세계에 투영해 제국을 형성했고, 이를 교역의 틀로 발전시킨 케이스다.


▎네덜란드는 일본에도 막부로부터 독점 교역권을 확보했다. 당시 무역이 가능했던 지역인 데지마를 묘사한 그림. / 사진 :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는 이런 부국의 공통점을 계승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무척 근대적인 특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네덜란드의 첫 번째 근대성은 강인한 정신으로 무장한 민족을 유럽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네덜란드는 프랑스 대혁명보다 200여 년 앞선 16세기 중반에 이미 근대 민족의 모델을 형성했다.

21세기에 네덜란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을 통해 입국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은 네덜란드를 풍차와 튤립의 나라로 생각한다. 만일 네덜란드 문화에 관심 있는 여행자라면 박물관에서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겠다고 벼를 수도 있다.

스키폴 공항은 원래 바다였던 곳에 둑을 쌓고 흙을 메워 육지로 만든 지역이다. 지대가 낮은 네덜란드는 고대부터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바다의 움직임에 따라 육지의 범위가 크게 좌우됐다. 폭풍으로 바다가 조금만 높아져도 경작지를 단숨에 집어삼킬 정도로 지형이 낮아졌다. 이런 자연환경에 맞춰 농토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바다에 둑을 쌓아 비상시에 대비해야 했다. 평야에 씨를 뿌린 뒤, 가을에 수확하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네덜란드인들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와 튤립도 이런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 풍차란 둑을 쌓은 뒤 바닷물을 빼내기 위한 장치다. 여행객이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풍차는 사실 네덜란드에서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네덜란드인들은 힘을 합쳐 둑을 쌓은 뒤 풍차로 물을 빼고, 그 자리를 흙으로 메워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사람들이다. 현대 네덜란드 영토 면적의 절반은 이처럼 바다를 땅으로 만든 결과다.

힘겨운 자연환경은 네덜란드에 부정적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공동체 구성원들의 협력 정신은 네덜란드라는 근대적 민족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동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무력을 통해 지배하는 귀족세력이 봉건적 질서를 앞세워 착취와 수탈의 사회 제도를 유지했다면,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 질서가 형성돼 있었다. 거대한 규모의 개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했다. 이런 현실을 토대로 네덜란드는 타 지역보다 훨씬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갔다.
지난 호에서 봤듯이 네덜란드와의 긴 전쟁으로 스페인은 국력을 탕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제국을 대상으로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는 17세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됐다. 과거 로마 제국 시대 노예는 머리를 박박 밀어야 했는데 노예에서 해방되는 순간 지난 시절 신분을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도록 했다. 이처럼 둥근 모자는 노예 해방의 상징이었는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도 독립 국가의 상징으로 이 모자를 선택했다. 그만큼 네덜란드의 민족 정체성은 강인한 투쟁을 통한 자유의 쟁취에서 찾을 수 있다. 렘브란트처럼 16~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들은 압제 세력인 스페인과 투쟁하며 자유의 횃불을 든 네덜란드 민족을 찬양하는 작품을 만들었다.주식회사, 세계를 지배하다


▎튤립은 네덜란드 자본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함축한 상징이었다. / 사진 : 위키피디아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동인도 주식회사는 최초의 근대적 회사로 유명하다. 비슷한 시기인 17세기 초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영국 런던에서 똑같이 동인도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형식의 사업체가 탄생했다. 영국은 EIC(East Indies Company), 네덜란드는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라는 각각의 약자로 잘 알려졌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주식회사는 1602년에 만들어졌는데 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하는 회사로 구상됐다.

지금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업체를 동인도 주식회사는 처음으로 실현했다. 우선 주식이라는 제도를 통해 하나의 특정 사업을 위한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다. 예컨대 VOC의 자본금은 640만 플로린(florin)이었는데 당시 네덜란드 도시민의 보통 주택 가격이 1000플로린 정도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얼마나 큰 액수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주식은 매매가 가능해 투자자가 필요할 때 사고팔 수 있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동인도 주식회사는 또 소유와 경영을 확실하게 구분해 전문적 회사 운영의 길을 열었다.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회사는 주로 자본을 투자하는 사람과 선박을 운영하는 사람이 합작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비해 네덜란드에서는 회사의 사업이나 경영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돈을 투자할 기회를 가졌다.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주의 유한책임 제도가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다만 당시 무법의 바다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 주식회사는 아시아 무역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였고, 이들 사이에는 심심치 않게 해전(海戰)이 벌어지곤 했다. 달리 말해 이들이 가진 독점권이란 같은 국적의 경쟁자를 배제한다는 의미일 뿐, 다른 나라의 회사와는 무기까지 동원해 싸워야 했다. 네덜란드 VOC는 80~100여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매년 3000~4000명의 선원을 새로 고용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배에서 일하는 선원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이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은 물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세계 제국에도 도전해 이들의 무역 독점을 깨나갔다. 아시아에서는 향신료의 원산지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지배하면서 말라카·스리랑카·대만·나가사키 등의 무역 기지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남단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은 물론, 남아메리카 포르투갈령 브라질에도 진입해 경쟁을 벌였다. 또 북아메리카에서 뉴욕 지역이 처음에는 네덜란드령 뉴 암스테르담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17세기 황금기 네덜란드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광범위한 세계 제국을 건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시장의 발전, 브뤼헤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네덜란드에서 동인도 주식회사와 같은 제도적 혁신이 성공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낮은 나라라 불리던 베네룩스(현대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은 중세만 하더라도 하나의 느슨한 집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정체성은 없었지만, 동부나 북부에 위치한 독일 게르만 세력, 남부의 프랑스 세력, 그리고 바다 건너 영국 세력의 사이에 자리 잡은 경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덜란드가 독립하면서 세계 제국을 형성한 데는 중세부터 지속해온 무역과 시장의 전통이 큰 힘이 됐다. 중세 베네룩스 지역의 발전은 브뤼헤라는 무역 도시의 번영으로 요약된다. 브뤼헤는 북해를 둘러싼 유럽 북부의 무역 중심으로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의 서부를 지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도시는 남유럽에서 육로나 해로를 통해 올라오는 비단과 향신료, 주변 국가인 영국·프랑스·독일 지역의 직물, 그리고 스칸디나비아나 러시아 같은 다소 먼 지역에서 온 밀, 동(銅)제품, 밍크 등을 사고파는 중심이 됐다.

중세 브뤼헤의 위상을 이어받아 15세기 말 부상한 도시가 안트베르펜이다. 이곳은 위치상 라인 강을 통해 게르만 세력의 내부와 교역하기에 유리했다. 브뤼헤와 비교했을 때, 무역을 넘어 금융 기능까지도 추가한 베네룩스 지역 전부를 낮은 나라로 불렀지만, 독립 이후에는 독립된 지역이 그 명칭을 독차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변에 위치한 홀란드와 질란드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각인됐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이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자 유럽의 금융 중심은 암스테르담으로 급격하게 이동했다. 1609년 교환은행이라는 의미의 비슬방크(Wisselbank)의 설립은 암스테르담의 부상을 미리 준비한 셈이다. 이 공적 은행은 경제 주체들이 금이나 은을 예치하면 증서를 발행했고, 증서가 자유롭게 유통되도록 함으로써 국가가 보장하는 신뢰와 시장의 유연성을 동시에 가진 근대적 화폐 제도의 근간을 마련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여유 자금을 가진 자본가들은 쉽게 돈을 굴릴 수 있었다. 유동성이 필요한 사업가들은 싼 가격에 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동유럽의 거대한 평야에서 밀 농사를 짓는 베를린에서 온 귀족들, 브뤼셀에서 면직 사업을 하는 자본가들은 모두 암스테르담에 와서 자금을 융통하곤 했다. 또 이런 부호 귀족이나 사업가뿐 아니라 선원이나 군인과 같은 서민들도 미래의 월급을 담보로 돈을 끌어 쓸 수 있는 차용증이 널리 유통되기도 했다. 21세기 뉴욕이나 런던에서 볼 수 있는 혁신 금융의 원조는 암스테르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시장이라는 제도의 발전은 경제가 융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봉건주의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상인이나 사업가를 경시하면서 신분에 기초한 경직된 사회를 유지하느라 경제 발전의 가능성이 차단됐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영토가 부족해 귀족 세력은 약했던 반면, 도시는 발달해 이탈리아처럼 도시민, 특히 상인들의 목소리가 국가와 사회에 강력하게 반영됐다. 시장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튤립 마니아(Tulip Mania)

시장이란 제도의 특징이자 장점은 유연성에 있다. 유연성이 있는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선택에 따라 행동한다. 시장의 문제는 유연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때때로 가격이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불균형과 위기의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그 어느 문명보다도 시장의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네덜란드는 튤립 마니아라는 경험을 통해 거대한 시장에서 거품이 형성되고, 붕괴하는 전형적인 과정을 보여줬다.

튤립에 대한 투자 붐이 최고봉에 달한 1637년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라는 품종의 양파처럼 생긴 뿌리 하나 가격은 6000플로린까지 폭등했다. 이 금액은 당시 중산층이 사는 집 여섯 채 값에 해당했다. 손쉬운 이득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기에 동참했다. 그러나 1637년 거품이 순식간에 꺼지면서 그들 모두가 채무와 빈곤의 나락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시장의 단맛을 본만큼 지독하게 쓴맛도 경험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누구 탓을 하겠는가. 자본주의란 스스로 선택해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기 책임의 세상이 아닌가.

주요 부국의 1인당 국민소득을 추산해 본 연구에 의하면 1300년부터 1500년 정도까지 가장 부유한 나라는 베네치아·제노바·피렌체 등 이탈리아 중·북부의 도시국가들이었다. 이후 1600년부터 1800년 사이 가장 높은 1인당 소득을 자랑한 것은 네덜란드 지역인 홀란드다. 1600년의 수치를 보면 홀란드가 2662달러에 해당하는데 이 수치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중북부 이탈리아 1350달러, 프랑스 1300달러, 영국 1054달러 등으로 홀란드가 독보적 선두를 차지했다. 19세기가 시작하는 1800년에도 홀란드의 2408달러에 비해 두 번째로 뒤따라오는 영국은 2125달러에 불과하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의 가장 부자 나라로 알려졌고, 네덜란드 사람들도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을 소개하는 책자에는 과거 성경에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을 언급했듯이 홀란드와 암스테르담에는 젖과 치즈가 넘쳐나는 영토에 도시가 세워졌다고 선전하곤 했다. 그만큼 풍요로운 소비문화가 발달했다. 1638년 프랑스 여왕 마리 드 메디치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했을 때 상가를 돌며 쇼핑에 나서 뛰어난 가격 흥정 실력을 발휘한 일화는 유명하다.

마르크스의 분석 때문에 자본가를 부르는 용어로 ‘부르주아’라는 프랑스어 표현이 일상화됐다. 하지만 프랑스의 부르주아보다 먼저 소비의 시대를 열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부르허레’(burgerij)였다. 당시 도시 목수의 1년 소득이 500플로린 정도였는데, 중산층 상인은 1000플로린 정도의 집을 소유하면서 가구나 그림, 조각 등 실내 장식에 1000플로린 정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네덜란드를 방문하는 유럽 여행객들이 놀라는 사실은 집집마다 그림이 빼곡히 걸려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네덜란드는 미술과 예술 시장을 처음 발전시킨 고장이기도 하다. 더 잘사는 자본가의 경우라면, 도시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시골에는 도시의 때를 벗을 수 있는 별장을 소유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주말농장의 선구자였던 셈이다.소비의 문화, “젖과 치즈가 넘치는 나라”


영국의 역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부의 당혹: 황금 세기 홀란드의 문화]라는 역작에서 네덜란드에 공존했던 금욕적 칼뱅주의 정신과 최초의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샤마의 흥미로운 해석에 따르면 한편에는 넘쳐나는 자본과 부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황금소를 비난하는 칼뱅주의 기독교가 있었다. ‘부의 당혹’이란 바로 이런 모순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홀란드 사람들은 부를 모아 재산을 축적하기보다는 아예 소비해버리는 성향을 보였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더 큰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20세기 케인즈가 이론화한 소비와 수요가 이끄는 경제 성장의 모델이 이미 17세기 네덜란드에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는 의미다.

네덜란드는 부국굴기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경제체제를 완성한 사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세계 차원의 제국을 형성했지만, 이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과 산업을 발전시키는 자본주의적 모델을 형성했지만 하나의 민족국가를 만들어내거나 세계적 시장을 개발하지는 못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세계 시장을 휘젓는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을 동시에 보유한 명실상부한 근대 자본주의 제국을 낳았다.

그렇다면 네덜란드에서 이런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될 수 있었던 궁극적 비결은 무엇일까. 네덜란드는 어려운 지리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생존이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불굴의 정신을 가지게 됐다. 이런 상황은 베네치아가 바다 위에 흙을 메워 도시를 건설해야 했던 과거를 상기시킨다. 또 네덜란드가 험한 지리 조건에 처해 있었지만 영국·프랑스·독일 등 다양한 세계를 연결하는 길목이었다는 사실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국제적 교역에 있어서 지리적 중심지라는 장점은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반도의 발전에도 적용되는 요인이었다.경쟁과 협력의 비결


▎렘브란트의 풍차 그림. 낭만적 풍경과 별개로 네덜란드인들의 자연과의 사투가 숨겨져 있다. / 사진 : 위키피디아

여기에 덧붙이자면 네덜란드는 바다에 접한 낮은 나라이자 동시에 많은 강이 흘러 당시 기준으로는 내부 교통이 가장 발달한 지역에 속했다. 유럽을 대표하는 라인 강은 북해 저지대와 게르만 세계를 긴밀하게 연결했고 뫼즈, 레스코 등의 강 역시 이 지역을 촘촘하게 가로질렀다. 게다가 낮은 지역이다 보니, 많은 운하를 통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운송망이 상대적으로 쉽게 마련됐다. 다시 말해 현대의 고속철이나 고속도로와 같은 효율적 교통 인프라인 운하가 도시와 도시를 긴밀하게 연결한 덕분에 당시로써는 유일한 교통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독립과 황금기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로 향해가는 역사적인 완성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다만 낮은 나라로 불리던 지역에서 북부만 네덜란드라는 명칭으로 독립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통적 저지대가 남북으로 분단된 모양이 됐다. 18세기가 되면 산업혁명의 시작과 함께 석탄을 보유한 남부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하지만, 정치적 분단으로 저지대 전체가 지녔던 상호 보완성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이나 프랑스 등이 국내 교통 인프라를 발전시키면서 보호주의적 발전 전략으로 나서자 네덜란드와 같은 선두주자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탓에 네덜란드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의 선두 자리를 내놓게 된 것은 불가피했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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