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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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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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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식의 세계속으로] 조국 없는 쿠르드족의 비극(10/28)

    • 등록일
      2019-10-29
    • 조회수
      426

[조홍식의 세계속으로] 조국 없는 쿠르드족의 비극

美 철군으로 난국… 국제정치의 ‘데자뷔’ / 소수민족, 탄압과 억제·동화와 흡수 대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덕스러운 시리아 철군 결정으로 서방 세력을 믿고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에 나섰던 시리아 쿠르드족이 난국에 빠졌다. 지난 4년 동안 시리아 동북부의 쿠르드족은 1만명에 달하는 생명의 희생을 치르면서도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동참했다. 덕분에 IS의 위협이 축소되자 미국은 시리아에서 발을 급하게 빼버렸고, 터키는 그 틈을 노려 쿠르드족이 사는 지역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시리아 쿠르드족은 생존을 위해 이전의 적이었던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 정권과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태에서 트럼프라는 불확실성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외부 세력에게 도움을 준 뒤 버려지는 쿠르드족의 비극은 국제정치의 ‘데자뷔’에 속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는 오토만제국의 폐허 위에 쿠르드 민족의 나라를 약속했지만 결국은 전략적 계산에 따라 쿠르드족의 삶의 터전을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네 나라로 갈래갈래 찢어버렸다. 1980년대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을 벌일 때도 두 나라는 모두 상대 국가에 있는 쿠르드족을 이용하고 난 뒤 냉정하게 외면한 역사가 있다. 1990~91년 첫 걸프전에서 미국 중심의 연합군을 믿고 봉기에 나섰던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참혹한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쿠르드족은 긴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12세기 유럽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은 쿠르드를 넘어 이슬람 세계의 대표적인 역사 영웅이다. 살라딘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이 제국을 특별히 쿠르드 민족의 나라라고 보기는 어려운 이유다. 이후 서남아시아는 15~16세기 오토만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쿠르드족은 오토만과 페르시아제국의 경계에서 양분된 민족으로 살아왔다.

현 상황에서 쿠르드족의 나라가 미래 언젠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강한 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뭉치지 못한다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나라로 발전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남아시아처럼 권위주의 또는 신정(神政) 독재 체제가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하나의 통합된 민족운동을 벌일 수 있는 사회적 공간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각각의 네 나라에 사는 쿠르드족은 언제나 소속된 국가에 동화라는 선택지의 유혹이 존재한다. 불확실한 민족의 미래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성공을 선택하는 전략 말이다. 특히 경제가 좋아지고 정치가 개방되면 요원한 쿠르드 국가 건설보다는 소속 국가의 소수 민족으로의 삶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최소한의 자치권이라도 확보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이는 쿠르드인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 희망이자 대안인지도 모른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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