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서 희극으로, 감정 조절의 지혜
내일신문 9월 25일자
“삶은 느끼는 사람에게 비극이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희극이다.” 18세기 영국 작가 호레이스 월폴의 말이다. 2019년 여름이 가고 가을바람이 부는 데 한국은 여전히 조국의 임명을 놓고 나라가 양분되어 소모적 싸움으로 엉망진창이다. 국가의 관점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시급한 민생 과제가 한 둘이 아니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힘을 겨루는 지정학적 위기에 장관 하나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평등과 공정이라는 진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시민으로서 느끼는 좌절감은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반적 양심과 상식의 잣대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평등과 공정의 가치에 반(反)하는 인물을 ‘개혁의 적임자’로 내세우는 문재인 정권은 이해하기 어렵다. 가치는 사라지고 정략적 판단만 남았다. 하지만 평등과 공정은 진보의 영혼이다. 민주주의 역사는 영혼을 팔고 선거에서 승리해 봤자 장기적으로는 몰락하고 결국 극단의 포퓰리즘만 불러온다고 경고한다.
교수라는 직업을 갖고 정치와 사회에 대해 종종 발언을 하는 입장에서는 좌절감을 넘어 개인적 울분을 느낀다. 이 사태를 보며 시민들은 교수 집단이 자신의 지위와 연줄을 마구 이용하여 불공정한 계급 대물림에 몰두한 사람들로 여길 것 아닌가. 또 사회참여 지식인이란 입으로는 올바른 소리하면서 뒤에서 행동은 입신과 축재에 열중하는 위선자라고 속단할 것이 뻔하다.
나아가 입시제도는 물론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시민의 과도한 불신은 사회 기반을 뿌리 채 흔들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대학 강단에 선지 20년이 넘지만 자기 자식을 대학연구소 인턴으로 채용하거나 고등학생이 전문 학술지의 논문저자가 된 사례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전공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조국 패밀리의 행태는 대학 교수가 봐도 놀랄만한 극소수의 비정상적 모습이다.
월폴의 말처럼 비극을 넘어 희극으로 가려면 느끼기보다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생각이란 세상을 가슴이 아닌 뇌로 받아들이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재미있는 광경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래서 2015년 가을을 상기해 본다. 당시 한국은 국정 교과서를 놓고 지금처럼 양분되어 뜨겁게 대립하고 있었다. 나는 “잠자는 이성, 괴물은 낳는다”는 칼럼에서 ‘다양성의 자유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보수 정권이 ‘하나의 올바른 역사관’을 강제 교육하겠다는 ‘이념과 정책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보수가 영혼을 팔고 대통령의 고집에 무릎 꿇은 사건이다. 평등과 공정을 외치는 진보 정권이 도덕적 정의감은 팽개치고 ‘불법행위’가 증명된 것은 아니라며 무리수를 두는 2019년 가을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생각해 보니 결국 조국 사태도 국정 교과서처럼 시간이 지나면 진정되면서 반면교사로 입시제도 개선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 대해 느끼는 좌절감은 반대편의 한국 보수를 보면 약간의 위안을 받는다.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을 배출해 낸 정치세력이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능동성은 오히려 시민사회가 순수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축소시킨 듯하다. 정부·여당을 비판했다간 무능·부패 세력과 동일시되는 것이 두려워 목소리 내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전통사회에서나 희생으로 통하는 삭발을 애국가에 눈물까지 흘리며 연출했지만, 21세기 시민의 눈에는 새로운 헤어스타일 만들기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는 조국 사태의 확실한 희극 꼭지를 만들어 주었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보려는 마지막 노력으로 지난 5월 개봉한 영화 ‘악인전’의 배역놀이를 즐겨보자. 이 영화에는 악인 셋이 등장하는데 둘이 힘을 합쳐 다른 한명을 잡는 시나리오다. 여기서 형사는 “깡패랑 형사가 악마를 잡는다 XX, 거 재밌네!”라고 외친다. 대통령, 장관, 청와대, 여당, 야당, 검찰, 사법부, 언론을 대변하는 쟁쟁한 배우들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 모두 정치 ‘악인전’의 캐스팅이 되어 각각의 배역을 상상하는 게임으로 이 혼란하고 슬픈 시기를 넘기면 어떨까.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