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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9) (8/17)

    • 등록일
      2019-09-11
    • 조회수
      629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9)] 내륙국가 피렌체, 금융과 산업 양 날개로 날다

메디치 가문이 낳은 르네상스의 밀알


▎피렌체의 랜드마크인 두오모 성당.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오는 로맨틱한 공간으로 각인된다. / 사진:위키피디아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솟아오른 세력을 상징한다. 제노바는 배산임수의 항구국가다. 그리고 피렌체는 이탈리아 반도의 심장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내륙 도시국가다. 중세 중·북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도시국가의 자본주의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꼽는 사례가 베네치아와 제노바다. 두 도시국가의 상인들은 지중해를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을 연결하는 교역의 그물을 치며 해양 자본주의를 대표했다.

반면,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륙에서 꽃피운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사실 이탈리아 중·북부에는 수많은 도시국가가 존재했다. 이들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또는 피사를 통해 들어온 바다의 물건들을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샹파뉴 시장을 비롯해 유럽 대륙으로 운반, 판매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2세기 말 중부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성인의 이름은 ‘프랑스인’이라는 의미다. 아버지가 프랑스와 실크 무역을 하는 상인이어서 붙게 된 이름이다. 프랑스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로마까지 가는 길은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즉 프랑스 길이라 불렸고 이 지역에서 밀라노·피렌체·시에나 등의 내륙 도시 상인들이 활발하게 교역 활동을 했다. 내륙 무역이 처음에는 프란체스코의 아버지처럼 상인들이 이동하는 패턴이었지만 점차 정주(定住) 상인 형태로 발전하면서 다수의 지점을 열어 회사를 구성했다.금융 자본주의와 메디치가의 부상

내륙 자본주의는 해양 교역에 비해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정주 상인의 네트워크에 의존하면서 신뢰에 기초한 회사의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금융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실제 강이나 육지에서 이동하려면 통과하는 지역의 군주나 강도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자연히 금·은의 화폐를 직접 나르기보다 신뢰에 기초한 거래를 터는 것이 필요해졌다.

또 다른 특징은 무역에 주로 의존했던 해양 자본주의와 달리 내륙에서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베네치아, 제노바 그리고 피사는 바다를 제패한 뒤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어도 무역만으로 충분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반면 수많은 도시가 경쟁하는 내륙에서는 상업만으로 생존하기가 어려웠기에 직물 산업이나 무기 생산 등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피렌체는 위의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결합해 이탈리아 금융 및 산업 자본주의의 대표주자 역할을 했다. 피렌체보다 일찍 내륙에서 금융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도시국가로는 피아첸차나 시에나를 들 수 있다. 피아첸차와 시에나는 각각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주요 교역로의 교차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북부의 밀라노도 빼놓을 수 없다.

반면, 피렌체는 금융과 산업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게다가 피렌체는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재력을 쌓은 뒤 이를 바탕으로 최고의 영향력을 행세했던 메디치 가문과 운명을 함께하면서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를 발전시켜 나간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됐다.유럽 최고의 천을 생산하는 산업 자본주의


▎르네상스의 걸작 [신곡]을 쓴 단테의 조각상. / 사진:키 피 디 아

이탈리아 금융 자본주의의 시대를 연 것은 11~12세기 피아첸차의 상인들이었다. 피아첸차는 이탈리아 북부를 관통하는 포 강과 유럽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비아 프란치제나의 교차지점이라 이 도시의 상인들은 일찍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특히 제노바가 동방에서 가져온 상품을 유통시켰다. 동시에 어음이나 교환증서 등을 활용해 금융업을 발전시키는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보리니·카포니·스코티 등 피아첸차 금융업자들은 파리에 정주하면서 프랑스 왕실과 거래를 튼 후 귀화까지 해 프랑스 자본의 모태가 되었다. 실제 13세기 말 프랑스 최고의 부자는 피아첸차 출신의 간돌포 델리 아르첼리였다.

13세기가 되면 서서히 시에나의 상인과 금융업자들이 부상한다. 시에나는 비아 프란체지나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가톨릭 교회의 중심인 로마와 가장 가까웠다. 시에나 상인들은 북유럽 플랜더스의 직물을 수입해 이탈리아에 유통시켰다. 동시에 로마 가톨릭교회 재정을 담당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시에나는 피아첸차보다 금융 자본주의의 시작은 늦었지만 톨로메이나 부온시뇨리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금융회사를 일궜다.

피렌체는 13세기부터 서서히 피아첸차나 시에나와 경쟁하면서 금융산업을 발전시켰다. 피렌체의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활동을 벌였다. 무역을 동반하는 금융가들은 당시 전쟁 벌이기를 좋아했던 군주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챙겼다.

14세기 피렌체의 페루치 회사는 10만 플로린의 자본금을 자랑하는 금융 공룡이었다. 이 회사는 페루치 가문이 중심을 이루기는 했지만 다른 동업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투자한 자금의 규모에 따라 이익 분배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연 8% 정도의 고정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페루치는 베네치아·제노바·나폴리 등 이탈리아 전역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 해외에는 아비뇽·브뤼헤·런던·튀니스·마요르카·키프로스 등에도 지점을 열었다.

초기 금융 자본주의의 맹점은 한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 회사가 파산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페루치 회사는 런던 지점과 나폴리 지점이 각각 영국과 나폴리 왕에게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자 파산하고 말았다. 같은 피렌체 회사인 바르디·보나코르시·아치아올리 등도 비슷한 이유로 14세기에 파산했다.

메디치 가문과 회사가 부상하게 된 데에는 피렌체 경쟁 회사들의 파산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메디치 은행은 1397년부터 17세기까지 유럽을 대표하는 금융 회사로 운영됐다. 특히 시에나 금융회사에 이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정까지 담당하면서 메디치의 영향력은 하늘을 찌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메디치 은행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로마·밀라노·베네치아·브뤼헤·아비뇽 등에 지점을 두고 활동했다.

또 메디치 은행은 자본주의 발전에 오래 기여할 혁신들을 도입했다. 주요 지점 사이에 정기 우편 시스템을 도입해 정보의 유통이 자본주의의 신경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피렌체에서 완성된 복식기장법(double entry bookkeeping)은 메디치 은행을 통해 베네치아와 제노바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확대됐다.

메디치 은행은 또 교환 증서의 보편화에도 기여했다. 특히 메디치 회사는 유럽 경제사에서도 드물게 꼼꼼한 자료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당장 돈을 버는 일뿐 아니라 기록을 통해 미래를 구상하고 준비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길을 밟았다는 의미다.

메디치 가문, 나아가 피렌체가 성공한 비결은 금융업과 산업 투자를 동시에 추진했다는 점이다. 피아첸차나 시에나는 상업과 금융에서 유럽을 지배할 만한 능력을 축적했지만 사업의 다변화에는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부 금융회사가 파산을 선고하면 회복하거나 만회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반면 피렌체는 금융 자본주의와 동시에 산업을 키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메디치 가문은 은행뿐 아니라 직물 산업을 동시에 벌였다.

중세에 가장 중요한 산업은 다양한 직물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었다. 유럽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역의 축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에서 가져온 사치품과 북유럽 플랜더스에서 생산한 최고의 모직물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양모로 짠 모직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상품이었다. 따뜻한 이불과 옷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향신료나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를 팔아 북유럽 모직을 수입하는 일이 이탈리아 상업 자본주의의 먹거리였다.

하지만 중개 무역만으로 생존하기에 내륙 도시국가는 한계가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자체적인 직물 산업을 육성하면서 자본주의를 산업차원으로 한 단계 높였다. 피렌체 상인들은 당시 최고 품질인 프랑스와 플랜더스의 모직을 수입해 아시아에서 들여온 재료로 붉고 푸르고 노란색의 화려한 천을 만들어냈다. 제노바 상인들이 즐겨 거래하던 명반은 이처럼 다양한 색상으로 염색이 잘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피렌체에서 화려하게 염색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모직은 유럽 최고의 천이 됐던 것이다.

중세 시대에 의류 유행이 바뀐 것도 피렌체로서는 행운이었다. 전통적으로 귀족이나 부자들은 가죽과 털옷을 즐겨 입었는데, 이 산업은 피렌체에서 가까운 피사가 전문이었다. 그런데 중세 후기부터는 사회 지도층이 가죽이나 털보다는 천으로 만든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피렌체의 섬유산업은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최초의 노동 혁명?


▎아르테 델라 라나의 문장. 피렌체 모직 길드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피렌체에서는 다양한 직능을 조직한 길드를 ‘아르테’라고 불렀는데 1206년에는 환전상들의 모임인 ‘아르테메르카티’가, 그리고 모직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는 1212년에 구성됐다. 또 금융과 모직산업 말고도 다른 다양한 직종의 길드가 존재해 의사·수예품·식품점·모피 등의 길드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다양한 도시국가를 비교하다 보면 피렌체와 유사한 사례로 밀라노를 꼽을 수 있다. 밀라노는 포 강 유역의 평야와 알프스 산맥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 지리적으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중간에 있다. 밀라노는 내륙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면서 피렌체 못지않은 섬유산업을 키웠다. 밀라노의 모직물과 마직물, 의류와 실크산업은 중세에 크게 성장했고 철로 만든 무기 또한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밀라노는 피렌체와는 달리 금융업은 부수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정치 체제는 일반적으로 상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다양성도 존재했다. 베네치아의 경우 귀족과 상인의 계급이 서로 융합해 강력한 집단 지도체제를 수 세기 동안 운영했다. 반면 제노바는 주요 가문이 서로 견제하고 권력 투쟁을 벌이느라 정치 체제가 무척 취약했다. 내륙국가 밀라노의 경우 전쟁 귀족인 비스콘티 가문이 왕국과 유사한 세습 체제를 만들어 지배했다.

13세기 피렌체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의 정치체제는 특수했다. 피렌체에서는 말을 타고 무기를 다루는 귀족들을 도시의 정치에서 배제하면서 부유한 상인 중심의 체제를 만들었다. 위에서 살펴본 직능 조직인 길드가 대표를 뽑아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베네치아의 체제와 상당히 유사했다. 주요 메이저 아르테라고 할 수 있는 금융이나 산업자본의 대표들이 번갈아 가면서 도시국가의 정치를 주도했다.

문제는 시민사회의 다수를 형성하는 소규모나 중하층 아르테에서는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요 아르테와 달리 국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어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378년 7월에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기록할 만한 노동혁명이 일어난다. 일명 치옴피의 난인데, 치옴피(Ciompi)란 모직공장에서 양의 털을 빗질하는 단순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다. 노동자들은 도시 국가의 정부 청사를 점령한 뒤 민중 정부를 세웠다. 물론 이 혁명이 성공한 것은 치옴피뿐 아니라 도시의 서민층을 형성하는 시민들이 대거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푸줏간, 구둣가게, 철물점, 벽돌공, 목수 등 정부에서 제외된 중소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하지만 민중 정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일단 정권을 잡았지만 내부적으로 자영업의 마이너 아르테를 구성하는 시민 계층과 노동자들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大) 자본가들은 도시를 떠나고 공장 문을 닫아 노동자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결국 같은 해 9월에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거리에서 충돌했고 결국 강경 노동자 세력은 패배한 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주요 노동자 지도자들은 처형을 당했고 점진적으로 피렌체 정치는 대자본 중심으로 운영되는 과두제의 성향을 강화했다.

15세기 전반에는 알비치 가문이 강력한 정권을 형성했고, 그 뒤에는 메디치 가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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