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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5)] 이슬람 세계, 동·서양의 교차로로 번영하다

    • 등록일
      2019-05-13
    • 조회수
      710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5)] 이슬람 세계, 동·서양의 교차로로 번영하다

“기도가 끝나면 알라의 부(富)를 찾아 가거라”


▎이슬람의 관용성이 담겨 있는 터키 이스탄불의 성(聖) 소피아 성당. 6세기 비잔틴제국이 건설했지만 15세기 오토만제국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다. / 사진:연합뉴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한 부국굴기의 여정은 중세가 되면서 다시 서남아시아로 돌아간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전성기였던 기원전 6세기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을 거치면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남아시아와 남유럽, 그리고 북아프리카 지역은 천 년 이상 쉴 새 없이 철학과 종교, 상품과 인간 등 모든 분야가 교류하면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류 공통의 세상을 만들어왔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남아시아의 아라비아 반도에 등장한 이슬람은 통합과 분열의 씨앗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종교로 묶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역시 아랍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거대한 지역에 걸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통합했다. 실제 이슬람은 대서양부터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수천㎞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고 점차 그 범위를 중앙아시아 초원부터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까지 확대해 나갔다.

이슬람이 잉태한 분열의 씨앗은 기독교와의 대립이다. 사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뿌리는 둘 다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서로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강하게 상존한다. 종교로 규정된 기독교권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대립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둘은 서로 경쟁적인 관계의 문명권을 형성해갔다.

초기에 선두를 치고 나가면서 인류의 등불 역할을 한 것은 이슬람 세계다.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으로 똘똘 뭉친 아랍제국은 서남아시아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해 메소포타미아·아나톨리아·팔레스타인 등을 집어 삼킨 뒤, 서쪽으로는 이집트·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 등으로 세력을 넓혔고,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 북부까지 진출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시기는 ‘빛나는 이슬람 세계의 황금기’로 불리는 8~11세기다.

이슬람 지역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널드 핀리와 케빈 오루크는 [권력과 부: 두 번째 천년의 무역, 전쟁, 세계경제]라는 역작에서 세계를 7개 권역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그런데 이 중 다른 모든 권역과 맞닿아 있는 유일한 지역이 이슬람 세계다. 이는 서유럽·동유럽·중앙아시아·남아시아·동남아·동아시아 등 다른 6개 지역 모두와 밀접하게 직접 교류를 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종교와 상업을 동시에 확산시키다


▎이슬람교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운집한 신자들. 이슬람 문명은 언어의 통합과 상업의 융성을 이뤘다.

혹자는 동아시아는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항의할 수도 있지만 751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제국과 동아시아 패권국인 당나라가 벌인 탈라스 전투만 보더라도 두 권역은 서로 직접 어깨를 부대끼는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879년 황소(黃巢)의 난을 일으킨 반란군이 광주를 약탈하고 학살할 때 주요 공격대상은 12만 명 규모에 달하는 아랍, 페르시아 등 서남아시아인 공동체였다. 달리 말해 동아시아는 이슬람 제국이 직접 지배하는 지역은 아니었지만, 이슬람 상인들은 동아시아 끝까지 진출해 활발하게 세계 무역을 주도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명칭이 코리아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슬람의 황금기가 고려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 상인들은 서남아시아에 진출하지 않았다. 이런 비대칭적 관계가 만들어진 이유는 이슬람 세력과 상인들이 대서양부터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까지 이미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다른 상인이나 세력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상인들은 아프리카 지역까지 적극 진출해 노예와 금, 상아와 목재 등을 가져다 세계에 유통시켰다.

이슬람 종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자신이 상인이었다는 사실은 이슬람과 상업의 긴밀한 관계를 잘 설명한다. 코란 62장 10절에는 “기도가 끝나면 흩어져서 알라의 은혜를 구하라, 그러면 번영하리라”라는 구절이 등장할 정도다. 물론 중세의 상업이 반드시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무력을 통한 약탈과 평화로운 교역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이런 모습은 19세기 영국의 아편전쟁이나 21세기 정치 목적을 위한 미국의 경제제재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속되는 모양새다.
미세먼지 나타날 정도로 도시 번성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 바그다드 지도. 둥근 도심에서 사방을 향해 문이 난 무역도시의 구조를 갖췄다. / 사진 : 조홍식

부국굴기의 다양한 사례를 검토하면서 인구가 경제 발전의 중요한 척도라는 사실은 반복해서 확인됐다. 식량을 제대로 생산해야 인구의 증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세계라고 부르는 지역의 인구는 7세기부터 15세기까지 2000~3500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이 인구는 이후 19세기까지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만큼 중세의 경제 발전은 일단 이루어진 이후에는 정체하는 경향을 나타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실질 임금이나 소득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비숙련 노동자의 경우에도 임금 수준은 생존에 필요한 구매력과 비교했을 때 1.3~2배쯤 됐다고 추정한다. 평균 소득은 생존 수준보다 2~3배였다고 하니 상당한 여유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했던 14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 부유한 지역의 임금과 소득이 유럽의 부유한 지역보다 높았다.

덧붙여 도시의 규모는 경제 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징표다. 이슬람이 출범한 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제국의 수도가 됐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는 이미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을 형성했던 무역 도시였다. 동아시아부터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향하는 대상(隊商)행렬들이 모여드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당시 다마스쿠스의 인구는 수십만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8세기 중반에는 왕조가 변하면서 이슬람 제국의 수도가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로 이전했다. 바그다드는 인구가 200만에 달했다는 가설도 있지만 학자들은 100만 명에 더 가까웠다고 본다. 메카나 메디나, 다마스쿠스와는 달리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변에 있었고, 유프라테스 강과 운하로 연결돼 있었다. 즉, 육지의 대상과 강을 통한 수송이 모두 가능했던 것이다. 걸프 만에는 바스라와 쿠파가 각각 인구 20만과 15만의 대도시로 존재했는데 무역과 농업이 모두 발달한 해안 항구였다. 예를 들어 바스라에서는 883년 노예들이 역사에 남는 잔즈(Zanj)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로 아프리카 노예를 활용한 대규모 사탕건물에 2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다. 그 뿐 아니라 모스크나 회의실 등 공공건물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았으며 ‘지식의 집’이라 불리는 도서관에는 수많은 책은 물론 종이와 잉크, 펜이 마련돼 있어서 지식을 마음껏 베껴가게 해 줬다. 도시의 높은 인구밀도에 검은 구름, 즉 미세먼지로 골머리를 앓았다는 기록까지 전해진다.

유럽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이슬람 제국 역시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아랍인들이 갖고 있던 관개시설의 비법을 유럽에 전파해 지하수로를 활용했고 이를 수차로 끌어올려 농사를 지었다. 쌀이나 사탕수수, 면화나 오렌지 등 다양한 농작물을 유럽 대륙에 전파했고 심지어 포도 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대도시는 코르도바였는데 인구가 50만에 달했다고 하니 이슬람 세계 서부의 별이었던 셈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이슬람 세계 또는 제국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사실 정치적으로 잦은 분열과 대립을 경험했다.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 카이로와 코르도바는 각각 다른 왕조나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세기부터 11세기의 이슬람 세계는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르얍(Ziryab, 789~852년)이라는 예술가의 삶은 이런 이슬람 세계의 통합성을 잘 보여준다. 지르얍은 원래 바그다드 궁정에서 활동하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바그다드를 떠나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거쳐, 코르도바로 이주해 왔다. 중세 이슬람판 ‘고웨스트’(Go West)인 것이다. 그는 코르도바에서 활동하면서 예술은 물론 패션과 취향을 유행시켰다. 예를 들어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음식을 차례차례 나누어 먹는 코스요리를 전파했다. 또 치약을 사용하거나 겨드랑이에 향수를 뿌리는 습관을 유행시키기도 하였다. 이라크와 스페인이 동일한 유행의 리듬에 춤을 추었던 것이다.개방성이 초래한 노예군인 정권


▎히잡(왼쪽)과 눈만 내놓은 니카브 차림의 이집트 여성들. 이슬람의 권위주의적 이미지로 비쳐지지만 원래 개방적 사회였다.

황금기의 이슬람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거나 폐쇄적인 문화라면 초기 창시자가 세웠던 제국에서 오히려 더 개방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이슬람이 보여주는 중세의 개방성과 현대의 폐쇄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문화는 진화하는 생명체다. 하나의 본질로 규정해 고정시켜 볼 수 없는 대상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폐쇄적이거나 개방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환경과 사회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것이 종교이고 또 문화다.

이슬람은 황금기에 무척 개방적 성격을 가졌었다. 대표적 사례가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사회적 흡수력이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이슬람 세계도 처음에는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거래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동화시켰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 가운데 해방된 빌랄을 이슬람 최초의 무에진(muezzin), 즉 기도를 위해 신도를 불러 모으는 성직자로 삼았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는 천 년이 넘게 이슬람 세계에 공급됐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차별된 공동체로 고립되진 않았다.

처음 이슬람 세계에 도입됐던 흑인 대부분이 노예였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슬람 세계야 말로 다양한 민족과 종족의 공존을 가능하게 했던 중세의 멜팅 팟(melting pot) 사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슬람 지배계층이 현지 기독교인들과 공존했고, 유대인 집단을 중간 매개 집단으로 활용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문화와 기독교를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남아시아에서는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의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고 이들의 네트워크가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이집트만 보더라도 기독교의 한 분파인 콥트 교도가 다수 있었으며 관료나 상인으로 활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이나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터키족, 심지어 수단의 누비아족이나 러시아의 슬라브족은 노예 군인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됐다. 처음에 다른 민족을 노예로 데려와 군사 업무를 맡긴 이유는 이들이 군주에게만 충성할 수 있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들만의 세력을 형성하게 됐고, 급기야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맘루크(Mamluk), 즉 노예군인의 정권을 세우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황금기가 종말을 향해 가는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 문화나 지역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개방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2~13세기가 되면 이슬람은 서서히 황금기가 종료되면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뒤지는 경향을 보인다.

경제발전의 장기 경주에서 이슬람 세계가 황금기 이후 서서히 정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쟁이 분분하다. 하나는 이슬람의 제도나 관습이 지; border-spacing: 0px; orphans: 2; widows: 2; margin: 5px 0px 10px 20px; letter-spacing: normal; text-indent: 0px; font-variant-ligatures: normal; font-variant-caps: normal; -webkit-text-stroke-width: 0px; text-decoration-style: initial; text-decoration-color: initial”>


▎중세 이슬람의 성화(聖畵). 노예군인들인 13세기의 맘루크 병사를 형상화했다.

중세 초기 유럽보다 높은 생활수준과 경제발전을 이룩했던 이슬람 세계는 12세기 이후 점차 정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의 관점에서 볼 때 중세 이후 유럽과 이슬람 세계가 보여준 장기 추세는 흥미로운 비교의 대상이다. 거리가 먼 중국과 유럽의 비교보다 더 직접적인 대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시각에서 본다면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이슬람 세계의 정치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베네치·아제노바 등의 도시국가들은 상인이나 자본가들이 정치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상인과 무역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이민족 용병 노예를 즐겨 활용하다가 이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군부는 정치를 지배하면서 상업이나 무역 자본을 보호하기보다는 세금을 거두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따라서 지중해를 오가면서 활발하게 무역을 벌이는 베네치아나 제노바 선단은 세금만 내면 자유롭게 이슬람 세계의 항구를 출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기독교 유럽의 영향력 하에 있는 지역과 이슬람 지역으로 양분돼 있었다. 반면 이슬람 세계의 상인들은 유럽의 항구에 가서 무역을 벌일 수 없었다. 유럽 도시국가의 정치 체제는 자국 상인과 자본을 철저하게 보호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이슬람 사이에 존재하던 중세 초기의 비대칭성이 이제는 이슬람과 유럽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이슬람 세계는 또 장기적으로 자본을 축적하기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이슬람의 상속제도는 매우 평등한 분배 원칙을 적용한다. 그 결과 사업가가 사망하면 다수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재산이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례로 17세기 카이로에서 현대의 스타벅스처럼 커피하우스 체인점을 운영하면서 사탕수수에도 투자했던 부호 이스마일 아부 타키야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재산은 4명의 부인과 11명의 자식에게 분산됐다고 한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는 법인(法人)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을 한 사업체로 모으는 일 자체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 사업을 장기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보장하기는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특히 중세 초기처럼 개인적 친분이나 친족 집단에 기초한 무역과 경제 활동에서는 이슬람이 뛰어났지만 이후 익명성을 통한 더 발전한 형태의 경제 활동에서는 유럽이 우세함을 보여줬다는 분석이다.

물론 이슬람 세계에서 황금기가 종결되었다고 이 지역이 빈곤과 퇴보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학자들은 유럽이 임금이나 소득에서 이슬람 세계를 앞지르게 된 것을 14세기 초로 추정한다. 이 시기는 흑사병이 유행하기 이전이다. 따라서 인구 감소로 인해 갑작스레 소득이 증가한 것은 아니며 그보다는 유럽의 경제 발전이 상당히 이뤄진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 세계의 실질임금은 중세 이후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카이로나 이스탄불의 실질임금 수준은 15세기나 18세기 말이나 큰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중세 후기부터 유럽의 성장이 훨씬 빨랐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의 수준을 초과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19세기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유럽의 소득 수준이 이슬람 세계의 두 배 이상을 넘지는 않았다. 유럽이 더 잘 살았지만 그 차이는 산업혁명 이후처럼 커다란 수준은 아니었다는 말이다.오토만 제국의 비대한 정치권력


▎터키 남부도시 안탈리아. 고대 그리스·로마, 비잔틴, 오토만 제국의 유적이 공존하는 곳이다.

정치적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15세기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부상한 터키계 오토만 제국이다. 몽골에 이어 중앙아시아에서 성장한 군사 세력이 다시 이슬람 세계 권력의 중심이 되는데 성공한 셈이다. 권력을 잡은 오토만은 몽골보다 훨씬 오랜 기간 이슬람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지배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발칸반도까지 점령하면서 유럽의 중심 세력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실로 오토만 제국은 20세기까지 생존하면서 유럽의 강대국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국제정치를 논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군사 권력으로 출발했던 오토만은 거대한 영토를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탄탄한 경제 기반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군부 장교와 군인들에게 봉급 대신 농토를 지급하는 제도로 인해 국가 재정의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앙 정부만을 위한 세원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처럼 오토만 제국은 상업을 육성하여 자본가의 성장을 도모하면서 미래에 세금을 거둘 기반을 마련했던 유럽과는 대조적인 체제였던 것이다. 19세기부터 유럽의 세력은 오토만 제국을 야금야금 식민지로 전환시키면서 이슬람 세계를 점령했고 두 지역의 균형 잡힌 공존은 이제 일방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전환됐다. 장기 경주에서 처음에는 뒤쳐졌던 유럽이 기나긴 시간을 통해 앞서 나가면서 구조적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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