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가로막는 장벽일까
한겨레 2012-01-10
`왜 대의민주주의인가’
SNS 등 참여 늘며 대의제 비판
제도보다 대표의 역할 문제
‘대리인’ 아닌 ‘수탁자’ 필요해
공공선 위한 `심의’ 구실 강조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 가운데 최근 두드러지는 담론의 구도는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기존 정치체제가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대표의 위기’가 심화되는 현실이 그 핵심에 놓여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부터 우리 사회에서 강하게 제기된 ‘대표의 위기’는 최근 안철수 현상에서 볼 수 있듯 ‘정당 민주주의의 위기’로까지 이어졌고, 급기야는 대의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새로운 정치 참여의 장이 열리면서, 대의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를 가로막는 낡은 장벽처럼 취급받고 있는 것이 전세계적인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대의민주주의 정치사상과 역사적 기원을 짚고 ‘심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틀로서 대의민주주의의 의의를 강조한 책이 나왔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 등 아홉 명의 정치학자들이 지은이로 참여한 <왜 대의민주주의인가>(이학사 펴냄)는 “대의제가 오히려 민주적 참여를 확대해준다는 주장들을 주목하라”며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변론을 펼친다. 한국정치사상학회가 총서로 펴내고 있는 시리즈 가운데 두번째 책이다.
흔히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여러 현실적인 제약 요소가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도입된 차선책’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들은 “대의제는 단순히 물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더 높은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도입됐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핵심 기능인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심의’의 구실이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는 총론에서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대표는 유권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대리인(delegate)이어야 하는가, 국민의 이익을 위해 때로 그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도 불사하는 수탁자(trustee)여야 하는가? 대의정치가 대중의 정치 참여를 봉쇄하기 위한 기제로 고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리인 개념을 선호하지만, 대의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수탁자 개념을 선호한다고 한다.
대의민주주의자들은 고대 아테네식 직접 또는 참여민주주의가 생각과 취향, 이익 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는 등 감정적인 선동으로 지배되기 쉽기 때문에 공동선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는 공화주의적인 이성의 심의 기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선 자율적으로 이성적인 심의를 펼 수 있는 대표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본다.
때문에 지은이들은 현대 민주주의에 대해 제기되는 ‘대표의 문제’는 사실상 대표하는 제도 그 자체의 문제이기보다는, 대표의 구실인 이성적 심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곧 대리만을 좇으며 심의보다는 유권자들의 ‘선호 집합’, 곧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무리를 짓는 데 치중하거나 당파 이해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정치만 일삼는 것이 문제라는 것.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 역시 직접민주주의보다는 심의민주주의의 확대로 모아진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매디슨의 대의민주주의론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제도적 정교함을 살폈다. 고대 아테네에서 펼쳐졌던 민주주의는 근대 민족국가의 틀이 형성되면서 대의제를 기틀로 삼아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는 아테네와 같이 작은 공간에서 직접민주주의를 펼치기 어려운 ‘규모의 제약’, 대의제가 다수 무리의 지배로 흐르는 ‘파당의 해악’, ‘이기적 개인과 집단적 공공선의 충돌’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대해 임 교수는 매디슨이 ‘민주적 공화정’이라는 이상을 내세우고, 현실적으론 연방주의 국가, 잦은 주기적 선거 실시, 권력분립 등의 제도적 디자인을 해내면서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했던 사실에 주목했다.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민주주의 모델과 제도는 계속 고안되고 또 발전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 너무 암울하다는 데 있다. 서병훈 교수는 “대의민주주의의 자화상은 그 꿈과 너무 거리가 멀고, 어쩌면 대의민주주의자들이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면서도 “문제는 이 길(대의민주주의) 말고는 민주주의를 살릴 방도가 없다는 데 있다”고 단언한다.
낡은 체제로만 오해되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기초적인 변론을 넘어, 직접민주주의론자들과 좀더 실질적이고 본격적인 논의와 논쟁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최원형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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