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과 오세훈
경향신문 2011-08-23
2008년 세계 경제위기의 재현을 막기 위해 주요 선진국 리더가 분주히 움직이는 요즈음, 한국은 오세훈표 주민투표로 시간과 예산과 에너지를 낭비하느라 바쁘다. 얼마 전 나는 파트릭 베이유라는 프랑스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주민투표 문제를 국제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베이유는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이민문제 전문가다. 그는 낙후지역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일에도 관심이 지대해 2007년 아이티 지진 사태 이후 ‘국경없는도서관(Libraries without borders)’이라는 단체를 설립해 제3세계에 책 보내기 운동을 전개해 왔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와 함께 남한산성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국내 정치의 화두인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로 이야기가 연결되었다.
외국인 친구에게 주민투표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만도 한 산등성이를 넘을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 지금 서울 유권자의 선택은 병자호란 때 산성에 고립돼 저항과 화친 사이에서 고민했던 인조의 선택보다 훨씬 복잡하다. 무상급식과 유상급식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며 무상교육의 확대 혹은 축소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베이유는 이처럼 조잡한 사안에 대해 주민투표라는 커다란 정치적 행사가 치러지는 것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의 힘겨운 설명으로 상황을 파악한 그는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들려줬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아. 문제는 어린이가 좋은 경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야. 몇 년 전 아이티의 비극을 보면서 나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고민한 끝에 버려지거나 외면당한 책을 모아서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일을 시작하게 됐어. 지금 프랑스는 학교에서 초등학생에게 ‘아침 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어. 하루를 배고프게 시작한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가난한 집이나 맞벌이 부모를 둔 아이들은 아침을 제대로 못 먹고 등교하기 쉽거든.”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인 한국도 더 이상 급식 문제가 정치게임으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 그보단 아이들이 건강히 자라면서 배움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고민해야 한다. 베이유는 노송에 몸을 기댄 채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가다운 진단을 내렸다.
“21세기에는 프랑스 인구가 다시 독일을 초월하면서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를 전망이지. 18세기처럼 유럽 중심이 되는 건데 그 배경에는 보육과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공공정책과 아이들이 평등하게 어울리면서 자라는 것이 좋다고 보는 문화적 인식이 있어. 어려서부터 사회통합을 몸에 익혀 가는 셈이지. 그래서 프랑스의 여성은 일하면서 아이를 낳아 무상 보육 및 교육으로 키우는 데 아무런 스스럼이 없는 거야. 덕분에 인구는 늘고 미래는 밝은 편이지.”
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무상급식을 ‘세금 폭탄’으로 표현한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공짜로 밥 먹이면 세금 폭탄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서울 시민이 바보는 아니다. 또한 아이들 밥값을 누군가가 내야 한다는 진실을 모를 만큼 무지하지도 않다. 우리가 안보와 치안을 위해 군대와 경찰을 유지하는 비용을 기꺼이 치르듯이 무상급식 또한 교육과 양육에 공적 투자를 하겠다는 선택일 뿐이다. 오세훈 시장도 공적 또는 사회적 투자의 필요성과 성격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방법론을 두고 정략적인 편가르기를 할 뿐이다. 달리 말해 현재의 투표 질문지는 전면 유상을 주장할 만큼의 용기도 없는 비겁함의 극치가 초래한 문항일 뿐이다.
진정한 보수라면 선진국의 성공한 보수로부터 배워야 한다. 자신이 추진한 국민투표에서 패하자 임기를 3년이나 남기고 사임한 드골 대통령의 책임 정치를 배울 순 없는가. 부와 가난을 어린이 가슴에 낙인찍어 카스트 사회를 만들지 말고 통합의 정치를 펼 수는 없는가. 단기적 주판알을 튕기는 정치가 아니라 장기적 미래 투자의 정치를 사고할 수는 없는가.
조홍식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