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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13)] 나라마다 다른 환경·문화에 맞춰 진화한 ‘자본주의 혈관’ 유통

    • 등록일
      2022-01-11
    • 조회수
      260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13)] 나라마다 다른 환경·문화에 맞춰 진화한 ‘자본주의 혈관’ 유통

 

백화점·월마트·편의점엔 사회가 담겨 있다

 

도시 발달 유럽은 백화점, 자동차 시대 열린 미국선 창고 매장 번성
인구밀도 높고 노동시간 많은 한국·일본 24시간 편의점 뿌리 내려


▎1887년 완공된 프랑스 파리의 초기 백화점 봉마르셰.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으로 묘사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교역이 평화를 가져오는가. [법의 정신]으로 유명한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무역하는 나라 사이에는 전쟁의 위험이 줄어든다고 관찰했다. 이런 주장은 훗날 국제정치학에서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평화가 정상적인 상태라는 민주평화론으로 전개됐다. 다만 21세기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면 교역의 폭발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몽테스키외의 주장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물론 18세기의 몽테스키외를 빌어다 21세기의 세계정치를 살펴보는 일 자체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18세기의 무역이란 기본적으로 상인과 상품이 함께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고대 실크로드부터 중세 유럽의 상인을 거쳐 조선의 보부상까지 교역의 기본은 상인과 상품이 동시에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교역이 평화를 가져오기보다는 평화가 교역의 기본 조건이 되는 셈이다.

 

애덤 스미스가 주목한 시장의 성장은 또 다른 원칙을 따른다. 상인과 상품이 지리적으로 집중해 있는 상황에서 구매자 또는 소비자들이 이동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흔히 쇼핑이라고 부르는 활동을 말한다. 19세기부터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라서고 대량 소비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 걸어서, 또는 차를 타고 분주하게 움직이게 됐다. 20세기와 21세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상인도 구매자도 움직이지 않고 상품만 이동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처음에는 우편으로 보내던 주문을 이제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고, 최근에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별의별 구매를 다 할 수 있다. 돛단배에 목숨을 걸고 대양으로 나아가 세계를 누비던 상인의 시대는 가고 거실 소파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해외에 직접 주문해 집으로 배송받는 편안한 교역의 세상이 펼쳐졌다. 유통의 인프라라는 자본주의의 그물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덕분이다.

 

국제시장의 탄생, 샹파뉴

 


▎“시간은 돈”이라고 규정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화, 조지프 뒤플레시스 작. / 사진:위키피디아

샴페인은 파리에서 동쪽으로 100~200㎞ 정도 떨어진 프랑스의 역사적인 지방 이름이다. 원래 프랑스어 발음은 샹파뉴지만 영어로 발음하면 샴페인이 된다. 세계 소비자에게 샴페인은 가장 비싼 편에 속하는 고급 포도주를 뜻한다. 샴페인은 19세기에 이미 자본주의의 럭셔리 마케팅 시대를 열었다. 축제나 기념일에 터뜨리는 ‘축하의 와인’이라는 이미지를 널리 알렸고, 모조품을 만들지 못하도록 특정 지역을 상표로 제도화한 특수 상품이기도 하다. 샴페인 지방은 이미 중세 12~13세기에 유럽 자본주의의 기원을 형성하는 핵심 고리였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했던 북유럽 네덜란드와 남유럽 이탈리아 사이에 지리적으로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쪽에는 독일이, 서쪽으로는 프랑스가 자리하고 있어 유럽 경제의 교차로인 셈이었다.

 

샴페인 이전에도 인류 역사에는 다양한 시장이 존재했다. 고대 바빌론이나 아테네와 로마, 중세 이슬람 제국의 바그다드나 송나라의 변경(汴京)은 모두 발달한 도시 시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해당 나라나 제국의 수도로서 정치적 기능을 동반하는 상업이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샴페인은 달랐다. 그곳에는 어떤 정치적 기능도 없었다. 다양한 나라의 상인들이 상품의 유통을 위해 만든 교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샴페인 페어(Fair)란 실제 샹파뉴 지역의 4개 도시를 순회하는 장이었다. 런던의 양털과 브뤼헤의 모직, 제노바 상인들이 가져온 동방의 향신료와 염색약, 프랑스의 포도주, 독일의 모피가 샹파뉴에서 교역의 대상이 됐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국제시장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질서와 안전이 필요했다. 샴페인을 지배하는 백작들은 장이 열리는 도시에서 상업 활동이 만개할 수 있도록 치안을 보장했다. 게다가 신용을 바탕으로 진입 장벽을 만들었다. 거래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상인들만이 계속 장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세워졌다. 또 공통 측량의 기준을 제공해 상인들의 거래 비용을 낮추는 공공재를 보장했다. 샴페인의 국제시장 형성은 향후 자본주의 발전의 비법을 상당히 명백하게 제시했다. 치안과 질서가 바로 설만큼 공권력이 강해야 하지만 상업을 위축시킬 정도로 입김이 강해지면 곤란하다. 거래의 약속을 보장할 수 있는 신뢰가 필요하나 너무 강한 규제는 상인들을 도망가게 만든다. 이러한 질서와 자유의 균형, 공권력과 시장의 긴장이야말로 물처럼 흐르는 상품의 유통을 보장하는 비밀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문화적으로 분석한 대표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을 길게 인용한다. 프랭클린은 청년들에게 청교도적 윤리관에 기반한 성실하고 근면한 삶을 제안하면서 오늘의 저축이 이자라는 수많은 새끼를 낳는 미래 재산의 종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프랭클린은 “시간은 돈”이기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마치 죄를 짓는 것과 같다는 근대적 논리를 명확하게 확립한 장본인이다. 18세기에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세우거나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주(駐)프랑스 대사를 역임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 나라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런 프랭클린의 업적에 가려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그가 미국 초대 체신부장(Postmaster General)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라는 미래 자본주의 강대국의 경제적 정신을 세운 사람이 동시에 초대 체신부장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의 우체국, 유통을 통한 국가건설

 


▎1913년 우체국이 배달하는 소포 마차. 미국 농촌을 하나로 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당시 미국은 거대한 대륙을 차지했으나 인구는 400만 명에 불과한 지극히 작은 나라였다. 미국이 하나의 나라로 뭉쳐서 독립하기 위해서는 서로 소통하는 일이 무엇보다 결정적 요소임을 프랭클린은 간파했던 셈이다. 미국 의회는 1792년 ‘우체국 법’을 채택해 연방 우편제도를 설립했다. 덕분에 미국은 편지와 소포를 통해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유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우체국은 설립되면서 곧바로 미국이라는 신생국의 뼈대로 우뚝 섰다. 실제 창립 후 연방 정부에서 가장 많은 직원을 거느린 부처로 부상했다. 또 1816년 미국의 연방 공무원 가운데 69%가 우체국장일 정도였다. 이 비중은 1841년 79%까지 증가한다. 게다가 우체국 실무를 보는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연방 우편제도는 많은 민간업자들과 협력 체제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1831년 미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우편제도가 가능하게 만든 편지와 신문의 유통에 놀라움을 표했다. 토크빌은 아이디어의 유통을 미국의 활발한 ‘지적(知的) 운동’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미국 전역의 우체국 숫자는 9000여 개로 인구대비 영국의 2배, 프랑스보다는 5배나 많았다. 뉴욕타임스에서 우체국이야말로 미국 ‘민간 정부의 가장 강력한 팔’(mighty arm)이라고 지칭할 정도였다. 우체국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로는 프랭클린에 이어 존 워너메이커를 들 수 있다. 그는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체신부장으로 재임하면서 농촌 무료배송(Rural Free Delivery) 제도를 계획했다. 미국은 영토가 워낙 방대해서 시골 사람들은 도시까지 나가서 편지와 소포를 받아오거나 추가로 돈을 내고 민간 운송업자에게 배달을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농촌 무료배송이란 공공 서비스로 추가 부담 없이 우체국이 전국 방방곡곡까지 배달을 담당한다는 뜻이다.

 

워너메이커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실현되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전국적 우편 판매가 가능하게 됐다. 미국의 사례가 무척 흥미로운 이유는 민간 중심의 시장경제국가 미국에서조차 전국을 하나의 유통 구조로 통합한 주인공은 연방 정부의 가장 핵심적 기능을 담당한 우체국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UPS나 페덱스(Fedex)와 같은 국제적 배송 회사들도 우체국의 자식이라고 할만하다. 신생국의 조밀한 우편 제도가 신문이나 특허 신청 등 아이디어의 유통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면, 농촌 무료배송은 자칫 고립되기 쉬운 거대한 영토의 국민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어낸 셈이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발전은 보편적이고 획일적이지 않다. 나라마다 환경이 다르기에 그 특징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거대한 영토에 인구의 70%가 농촌에 거주했기 때문에 그곳에 적합한 유통 구조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우체국이 소포를 곳곳에 저렴하게 배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자 유통 혁명이 일어났다.

 

워너메이커가 만들어 놓은 제도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은 애런 몽고메리 워드라는 사업가다. 그는 시골 소도시에 자리 잡은 중간 상인들을 뛰어넘어 농민과 직접 거래에 나선 것이다. 농작물을 재배하여 도매상에게 넘기는 일이 익숙했던 미국의 농민들은 직거래의 장점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워드는 32쪽의 포켓 카탈로그를 만들어 163개의 다양한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우송(郵送) 판매하기 시작했다. 품질이 들쑥날쑥했던 소도시 상점의 상품과 비교했을 때 워드의 판매품은 균질적 품질을 보장할 수 있었다.

 

워드, 환불 정책 시행 통해 유통 혁명 완성

 

워드의 유통 혁명이 성공을 거두자 경쟁자들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돈만 받고 물건을 보내지 않거나 저질의 상품을 배달하는 사기꾼들도 다수 등장했다. 워드가 쌓아놓은 신뢰의 유통 시스템을 한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워드는 소비자가 원한다면 모든 상품에 대해 환불(還拂)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세계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유통의 혁명을 완성했다. 워드는 유통 사업이 성공하려면 전통적인 대면 거래가 아닌 경우 구매자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던 셈이다. 그의 회사 이름은 [몽고메리, 워드 & 컴퍼니]다. 마치 여러 명이 함께 꾸린 회사라는 환상을 줌으로써 신뢰도를 높였고 전 면적 환불 정책으로 신용을 쌓았다. 1895년 워드의 회사는 시카고를 중심으로 거대한 사업 구조를 형성했고 그의 카탈로그가 무려 600쪽에 달할 정도로 다양한 상품을 취급했다. 옷을 만드는 천부터 책까지, 장난감과 농기구, 피아노나 가구, 식기, 총기까지 워드의 카탈로그는 농촌의 풍요로운 상점이 됐다.

 

워드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현대 유통의 문을 연 다른 사업가로는 리처드 시어스를 들 수 있다. 그는 미네소타에서 유통관리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시계업자가 보낸 500개의 시계를 보석상들이 거부하면서 헐값에 수백 개의 시계를 떠맡게 되었다. 집단구매의 힘을 깨달은 시어스는 1894년 [시어스, 로벅 & 컴퍼니]라는 회사를 차리고 시계에서 다양한 상품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구매자가 상품을 반환할 경우 그 배송 비용을 부담한다는 원칙까지 내세웠다. 워드의 단순한 환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소비자의 믿음을 확보하려는 전략은 워드나 시어스나 마찬가지였다. 시어스는 모든 상품을 판매하더라도 주류(酒類)만큼을 취급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유통 회사임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시어스의 회사는 술이나 담배를 끊는 별의별 약품을 취급했고, 전기가 인간에게 에너지를 전달해 줄 것이라며 ‘하이델베르크 전기벨트’와 같은 희한한 상품도 판매했다. 기독교 사회의 도덕적 가치에 편승하는 한편,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는 큰 망설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토크빌이 보고 놀랐던 미국의 우체국 제도는 아이디어와 특허의 지적 운동만을 추동했던 것이 아니다. 한 세기가 지나면서 워드와 시어스는 우송 시스템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소비와 유통의 종합 공간을 형성한 것이다. 중서부 농부가 드넓은 옥수수밭을 바라보면서 카탈로그에서 물건을 고르면 집까지 배달해 주는 편리한 세상이 열렸다.

 

여성이 소비의 주연으로 부상

 


▎제프 베이조스의 아마존은 21세기 세계를 지배하는 유통 공룡으로 입지를 굳혔다. / 사진:위키피디아

소비의 문화가 도시뿐 아니라 농촌까지 속속들이 파고드는 변화와 함께 19세기 후반은 또 다른 사회적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가정 내 여성의 역할을 집안을 관리하고 바느질로 옷을 만들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가정은 이제 생산이 아닌 소비의 단위로 부상하게 됐다. 마침내 여성이 소비의 핵심적인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노예제도 폐지에 큰 영향을 미친 [엉클 톰의 캐빈]의 작가 해리엣 비처의 언니 캐서린은 1869년 [미국 여성의 가정]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당시에는 노예제도의 철폐와 남녀 역할 구분은 자연스러운 조합이었던 셈이다. 남자들이 정치와 투표를 논한다면 여성이야말로 가정을 관리하면서 기독교적인 미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존재였다. 이 책은 여성이 가정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집안을 꾸미고, 가구를 선택하며, 남편과 아이들에게 시의적절한 옷을 골라주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남편이 밖에서 돈을 벌어오면 부인은 월급을 적절하게 저축하고 소비하는 가계 관리자로 부상했다. 가정학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구매력을 갖춘 여성을 위한 소비의 공간도 필요했다. 대도시의 백화점이야말로 19세기의 이런 사회문화적 변화를 동반하는 유통 혁신의 장이었다. 전통적으로 대도시에는 다양한 전문 상점들이 즐비했다. 고대 바빌론부터 근대 런던이나 뉴욕, 파리까지 이어지는 전통이다. 하지만 백화점은 한 공간에 모든 상점을 집중해 놓은 쇼핑 천국이다.

 

아일랜드 출신 알렉산더 터니 스튜어트는 1862년 뉴욕에 최초의 백화점을 열었다. 10번가와 브로드웨이 코너에 자리 잡은 ‘캐스트 아이언 플레이스’(Cast Iron Place)는 정가 정책으로 흥정의 불편함을 사라지게 했고 누구나 자유롭게 입장해 한가하게 아이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고급 부티크 상점에는 주눅이 들어 아무나 들어가기가 어색했으나 백화점의 개방성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했다. 오죽하면 백화점의 개방성을 두고 인간 ‘존엄성의 평등’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겠는가! 당시 백화점의 인기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남북전쟁(1860~1865)이 한창인데도 불구하고 링컨 대통령 부인의 과도한 쇼핑을 위해 의회에서 백악관 예산을 특별히 증액했을 정도였다. 스튜어트의 백화점 주변에는 연달아 메이시스(Macy’s), 로드 앤 테일러(Lord & Taylor), 김벨스(Gimbels) 등의 백화점이 경쟁적으로 들어서면서 일명 뉴욕의 ‘레이디스 마일’(Lady’s mile) 다시 말해 ‘여성의 거리’가 형성됐다.

 

대서양 건너 프랑스에서도 백화점은 새로운 쇼핑의 문화를 열어갔다. 파리에는 1887년에 완공된 봉마르셰 백화점에 이어 프랭탕, 라파예트 등 지금도 명성을 떨치는 쇼핑의 전당들이 문을 열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 문인 에밀 졸라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라는 소설을 발표할 정도로 백화점이란 당시 상업 시대를 반영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유통 구조가 해당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는 현실은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확인할 수 있다. 백화점이란 유통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시장이라는 같은 공간에 다양한 상인이 모여 구매의 편리를 제공했다면, 백화점은 한 상인이나 회사가 균질적인 조건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화점이라는 유통 구조는 도시가 이미 발달한 지역에서 유리하다. 백화점은 도시의 인프라에 편승해 유통시설을 건설하는 방법이다. 오래전부터 도시가 발달한 문명인 유럽에서 백화점이 인기를 끌고, 특히 프랑스처럼 고급 상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쇼핑 대국으로 성장한 나라에서 백화점이 발전한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반면 미국은 거대한 영토를 유통 구조로 뒤덮는 일이 급선무였다. 워드나 시어스처럼 우체국을 통한 통신판매의 발전이 이런 환경을 반영한다. 20세기 들어 미국이 개척한 유통의 혁신은 월마트로 상징된다. 허허벌판에 커다란 창고 같은 상점을 마련해 놓고 주변 시골 인구의 구매력을 끌어당기는 사업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경제 구조를 바꿔놓는 변화를 초래했다.

 

월마트의 성공, 한·중·일 산업화에 결정적 영향

 


▎중국 항저우의 알리바바 본사. 알리바바는 중국이 세계 최첨단 전자 상거래 국가로 성장했음을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월마트의 창시자 샘 월튼은 1960년대 미국의 중서부의 아칸소, 미주리, 오클라호마를 기반으로 다양한 상품의 염가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디스카운트스토어를 시작했다. 과거 통신판매의 기법과 마찬가지로 중간 상인을 없애면서 가격을 인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월튼은 아칸소 벤튼빌(Bentonville)을 월마트 네트워크의 총 사령부로 삼아 컴퓨터를 통한 재고 관리 시스템을 설립했다. 수천 개의 매장에서 팔리는 상품을 실시간으로 관리함으로써 효율적인 유통 체계를 추구했다.

 

시대적으로 월마트의 성공은 자동차가 미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소비자의 이동성이 수월해지면서 그들을 거대한 창고 매장으로 유인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월마트는 점진적으로 부상하여 2021년 현재 1만 개가 넘는 점포와 이제 230만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세계 최대의 유통기업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유사한 형태의 홈디포, 코스코, 타깃 등의 체인들도 덩달아 발전했다. 주말이면 차를 몰고 쇼핑몰에 가서 카트에 물건을 잔뜩 사 오는 일은 미국식 풍요로움의 상징이 됐다. 소비자를 대신해 거대한 유통 회사가 저렴한 가격을 흥정하는 구조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했다. 싼 제품을 찾으려는 노력은 일본과 한국을 거쳐 중국의 산업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아시아의 장난감과 전자 제품을 비롯한 소비 상품이 미국 시장을 지배하게 된 데는 월마트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자동차 시대의 대표 유통 기업이 월마트라면 인터넷 시대에는 아마존의 부상을 꼽을 수 있다. 제프 베이조스가 워싱턴주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소매를 시작한 것은 1994년, 즉 월마트보다 30여 년 뒤다. 처음에는 도서 판매로 시작했으나 아마존은 점차 모든 상품을 거래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했다. 오프라인의 월마트와 온라인의 아마존은 소비 천국 미국을 지배하는 양대 공룡이 됐고, 중국의 생산 능력은 두 회사에 상품을 공급하는 원천으로 떠올랐다.

 

20세기 아시아의 경제 도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일본은 어떤 독특한 유통 구조를 만들어냈을까. 사실 자본주의가 부상하는 17세기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동인도주식회사는 아시아의 다양한 상품을 유럽 시장에 파는 세계 유통의 첨병이었다. 후추와 같은 인도와 동남아의 향신료,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면직물은 대륙 간 거래되는 무역의 핵심적인 상품이었다.

 

19세기 메이지 유신을 거쳐 세계의 생산 강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종합상사라는 특수한 형태의 유통 기업을 발전시켰다. 개항에 발맞추어 일본의 상업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미쓰이나 미쓰비시 등을 중심으로 무역과 유통을 담당하는 특수 회사들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50년대부터 일본의 종합상사는 세계의 원자재를 일본으로 수입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제조한 뒤 세계 시장으로 다시 유통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오죽하면 ‘소고쇼샤’(Sogo Shosha)라는 종합상사의 일본어 발음이 영어권에서까지 통용되었겠는가. 한국도 일본의 모델을 따라 종합상사 제도를 발전시킨 특수한 경우다.

 

소매 유통 구조에서 일본 모델은 편의점이라는 상점 체인을 발전시켰고 한국은 이를 답습했다. 거대한 영토에 농촌인구가 많은 미국에서 월마트와 아마존이 자라나고, 대도시에 귀족적 명품 쇼핑 전통이 있는 유럽에서 백화점이 만개했듯, 인구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일본과 한국에서는 편의점이 뿌리를 내렸다. 20세기 일본과 한국은 인구 밀도뿐 아니라 노동시간도 세계 최장이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에서 새벽이나 밤늦게 주먹밥이나 컵라면을 사 먹는 문화에서 탄생한 유통 패턴이었다.

 

일본, 무역·유통 담담 종합상사 형태가 발전

 

20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경제발전의 궤도에 오른 중국 또한 독특한 소비와 유통 문화를 생성했다. 대국답게 거대한 규모를 지향하는 중국의 취향은 공산주의의 집단적 의지와 결합해 더욱 큰 힘을 얻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합쳐지자 중국은 현기증이 날 정도의 대형 백화점들이 대도시마다 우후죽순 자라나기 시작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청두나 충칭과 같은 내륙 대도시까지 파리와 뉴욕 부럽지 않은 초호화 백화점들이 쑥쑥 자라났다.

 

게다가 21세기의 중국은 세계 최첨단의 전자 상거래 국가로 성장했다. 미국은 유럽보다 넓은 영토에 더 많은 인구가 살았고, 그 덕분에 세계적인 유통 시스템과 회사들이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인구는 미국보다 규모도 4~5배 많고 밀도도 더 높다. 이런 잠재력 높은 시장에 인터넷이나 모바일 기술이 합쳐지면서 중국은 알리바바로 상징되는 유통 및 금융 분야의 공룡을 생산했다.

 

샴페인에서 열리는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힘겹게 넘던 중세 이탈리아 상인들과 비교한다면,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을 통해 해외 물건을 소비자가 직접 구매하는 21세기는 지구촌 소비의 발전적 변화를 통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서울에 앉아 프랑스 샴페인의 종류와 브랜드, 생산 연도를 골라 주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미세 혈관은 지구촌 곳곳을 연결하며 속속들이 침투해 상품을 배달하는 유통 천국을 이루었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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