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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일신문] 폴란드 정부의 ‘폴렉시트’ 불장난 (21.10.15)

    • 등록일
      2021-11-09
    • 조회수
      206

최근 유럽에서 폴렉시트(Polexit)가 갑자기 뉴스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정치에서 나라 이름과 퇴장을 의미하는 엑시트를 연결하면 유럽연합(EU) 탈퇴를 지칭한다. 브렉시트(Brexit)가 대표적이지만 유로 위기 당시에는 그리스를 두고 그렉시트의 위험이 대두되었으며, 이탈리아의 이탈렉시트를 언급하기도 했다. 폴렉시트는 폴란드의 EU 탈퇴라는 뜻이다.

 

지난 7일 폴란드의 헌법재판소는 유럽연합의 법체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결정을 공표함으로써 유럽 질서에 심각하게 도전했다. 이미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유럽법이 회원국법에 우선한다는 원칙은 기본에 속한다. EU 가입은 이 같은 원칙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폴란드 헌법재판소는 자국 헌법이 유럽법에 우선한다면서 유럽의 사법 질서를 뒤엎자고 나선 것이다. 폴란드는 2004년 유럽연합에 뒤늦게 가입하면서 기존의 유럽 질서를 수용했기에 이런 문제 제기는 생뚱맞은 행동이다. 그것도 가입한 뒤 17년이 지나서야 갑작스레 질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유럽연합이 자국 주권을 침해하여 정책 간섭이 심하다는 사실은 영국 브렉시트의 중요한 이유였다. 특히 브렉시트 세력은 유럽법원의 결정이 자국의 정책 주권을 침범한다고 보았다. 영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에서 탈퇴한 것이다.

 

하지만 폴란드는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원하지 않는다. 유럽의 질서를 부정하면서도 유럽이 주는 이익은 받아 챙기겠다는 심산이다. 폴란드는 2015년 ‘법과정의당’(PiS)이 집권한 이후 사법부를 정부의 입김 아래 두려는 정책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유럽과 빈번하게 부딪쳤다. 유럽연합은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인 사법부의 독립성이 회원국에서 무너지는 현실을 방관할 수 없다는 방침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문제의 선언을 주도한 헌법재판소는 지난 몇 년간 법과정의당 인사들이 지배하는 정파적 기구가 되었다. 폴란드의 법원과 판사들은 지난 10여 년 이상 유럽법의 우선이라는 원칙을 판결에 반영해 왔으나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법과정의당 정부가 수립한 법관 징계위원회가 법원 판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국민투표로 유럽 탈퇴를 결정한 2016년 당시 영국의 여론은 양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의 유럽연합 지지율은 80% 수준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폴란드 정부가 유럽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국민 여론을 대표하는 것도 아닌 셈이다. 이웃 헝가리에서 빅토르 오르반이 언론과 사법부를 자신의 정치적 통제 아래 두었듯이 폴란드의 집권당도 장기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구 공산권 국가와 유럽연합의 관계는 이처럼 복합적이다. 시민들은 유럽에 속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때로는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포퓰리스트 정치세력은 유럽의 지원금은 환영하면서도 유럽의 민주주의 원칙을 짓밟고 권위주의적 체제를 굳히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종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모양이다. 유럽의 틀 속에서 최대한 마음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욕심이다.

 

유럽의 격언 중 “버터와 버터 살 돈을 동시에 가질 순 없다”라는 말이 있다. 명백한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선택하지 못하는 자의 욕심과 미련함을 뜻하는 말이다. 기존에 유럽통합을 주도하고 만들어온 서유럽 국가들은 폴란드와 같은 이기적 행태에 이미 강한 거부감이 누적된 상태다. 게다가 같은 동유럽에서도 발트 3국이나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등 작은 규모의 회원국들은 오히려 유럽의 모범생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유로를 채택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들이 유럽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선언이 곧바로 폴렉시트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정파적으로 판단하는 폴란드 집권 세력의 불장난은 국가의 운명을 두고 도박을 벌이는 무책임한 태도다. 만에 하나 폴란드의 유럽 탈퇴가 실현된다면 폴란드의 미래는 아일랜드와 같은 ‘유럽의 호랑이’가 아니라 벨라루스와 같은 러시아의 위성 독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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