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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포커스] 폰 데어 라이엔, 유럽의 아이에서 통합의 어머니로?

    • 등록일
      2021-05-14
    • 조회수
      268

 

폰 데어 라이엔, 유럽의 아이에서 통합의 어머니로?

 

 

유럽은 여성 리더십의 시대가 한창이다. ‘유럽의 여제’로 불리며 강대국 독일을 이끄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위시하여 유럽중앙은행장(ECB) 크리스틴 라가르드, 그리고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인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까지 여걸 3인이 유럽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 여성 지도자는 한 세대를 대표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50년대 태어나 21세기 들어 권력의 정상에 도달했다. 1954년생 메르켈은 2005년부터 독일 총리를 역임했고 올 9월 퇴임 예정이다. 라가르드는 1956년생이며 프랑스에서 상무, 농무, 재무장관을 역임한 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거쳐 2019년부터 유럽중앙은행을 맡았다. 제일 막내 폰 데어 라이엔은 1958년생이며 독일에서 가족, 노동, 국방장관을 거쳐 2019년 유럽 집행위원장에 올랐다.

 

독일 정치에서 폰 데어 라이엔은 메르켈과 함께 온건 우파인 기독교민주당(CDU)에서 활동했으며 둘은 경쟁적 관계였다. 메르켈 총리가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했지만 폰 데어 라이엔은 독일 사상 최초로 여성 국방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메르켈을 이을 기민당 지도자로 한동안 주목받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사무총장 감으로 하마평에도 올랐다.

 

2019년 폰 데어 라이엔의 유럽집행위원장 임명은 다소 뜻밖이었다. 27개 회원국이 합의를 통해 임명하는 자리인 만큼 복합적인 정치 게임이 벌어졌다. 기독교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독일의 만프레드 베버나 사회주의 계열의 네덜란드인 프란스 티머만스 등에 대한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결정이 난감한 가운데 갑자기 폰 데어 라이엔이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강대국보다는 약소국 출신, 그리고 강한 카리스마보다는 무난한 화합의 리더십을 추구하는 유럽연합 정치의 전통이다. 소국 룩셈부르크의 총리 출신인 장 클로드 융커(2014~19년), 자크 상테르(1995~99년), 가스통 토른(1981~85년)을 비롯해 프랑스 국내정치에서 프랑수아 미테랑과 경쟁에서 밀린 자크 들로르(1985~95년) 같은 정치인이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을 담당하는 역사에서 이런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폰 데어 라이엔은 ‘유럽의 아이’라고 불릴 만한 배경도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유럽통합 초기 브뤼셀에서 근무하는 유럽 공무원이었기에 ‘유럽의 수도’ 브뤼셀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1970년대에는 영국 런던정경대(LSE)에 유학한 경험이 있고, 1990년대에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남편과 캘리포니아에 거주했다. ‘유럽의 아이’가 다양한 국제경험까지 쌓은 셈이다.

 

2019년 12월 1일 집행위원장에 취임한 폰 데어 라이엔에게 2020년 초 터진 코로나 위기는 전문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영국 유학 후 독일 하노버 의대를 졸업한 의사이며 남편도 의대에서 만난 의사 가족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의 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를 담당하게 된 순간 코로나라는 새로운 질병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는 2020년 놀라운 백신 리더십을 발휘했다. 원래 보건 정책은 유럽연합이 아니라 회원국 담당이다. 나라마다 의료 제도가 다르고 전통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폰 데어 라이엔은 유럽연합 차원에서 백신 구매를 총괄하고 배분하는 책임을 도맡았다. 전염병 위기가 대륙을 강타한 상황에서 집행위원회는 개발이 확실치도 않은 백신을 공동 선(先)구매에 나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2021년 상반기 유럽 집행위원회는 백신 정책에서 다양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영국, 미국 등이 백신 접종에서 앞서가는데 유럽은 백신 공급과 접종이 모두 부족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제약회사와 협상과 계약에 경험이 부족해 몇 달을 낭비했는데 신속한 백신 공급보다 제약사의 책임규정을 더 중시한 결과다. 아무래도 그동안 식품안전 정책 정도만 담당하던 유럽집행위가 인구 4억5천만 명을 위한 대규모 백신 공급 전략을 추진하는 일에는 서투른 모습이었다.

 

동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2021년 코로나의 급속한 확산으로 보건 체계가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헝가리나 체코, 슬로바키아 등은 급한 나머지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백신을 들여오는 상황이 되었다. 유럽 집행위원회가 추진했던 공동 전선이 무너진 것이다. 유럽연합이 인정하지 않는 중국·러시아 백신은 앞으로 유럽 내 백신 여권을 추진하는데도 큰 걸림돌로 작용할 예정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 유럽 차원의 총괄 조정이 기능이 없었다면 회원국 간 백신 확보 경쟁과 분쟁이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유럽의 공동 대응은 제약사와의 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유럽연합 집행위는 이번 기회에 연방주의를 향한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신 구매는 단기적인 대응일 뿐이다. 반면 코로나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마련한 7,500억 유로 규모의 예산은 획기적인 유럽통합의 발전을 의미한다. 특히 이 자금을 회원국의 개별적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유럽연합의 공동 채권을 발행해 마련하기로 했다.

 

미국 건국 시기의 연방주의 확립에 비추어 유럽도 ‘해밀턴의 모멘텀’을 갖게 되었다는 평가가 일부에서 나오는 이유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의 초대 워싱턴 대통령 아래 재무장관을 담당하며 재정 연방주의를 실현한 인물이다.

 

유럽연합은 1999년 단일 화폐 유로를 통해 공동통화정책을 실현했다. 그러나 재정정책은 철저하게 회원국별 차이를 유지해 왔다. 특히 재정정책이 건전하기로 유명한 독일은 다른 회원국의 채무를 자신이 책임지게 될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재정 연방주의에 반대했다. 코로나 위기는 이런 우려와 반대를 단숨에 제거해 주었다. 이번에 결정된 공동 채권을 통한 자금 마련은 향후 유럽 공동재정정책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이번 집행위원회가 강력하게 추진하는 또 다른 정책 분야는 환경이다. 유럽연합은 2050년까지 기후 중립적 경제 체제를 갖추겠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기후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아예 없애버리거나 적어도 보완하여 더 이상의 악화를 방지하는 정책 목표를 정한 셈이다.

 

유럽은 이미 1970~80년대부터 환경 분야에서 상당한 정책적 권한을 확보해 왔다. 당시에 환경은 그다지 회원국의 주요 관심 사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세기 뒤 환경은 이제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사안으로 부상했다. 예를 들어 회원국의 에너지 정책에서 환경 평가가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의미다.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는 앞으로 환경을 매개로 회원국의 다양한 정책을 좌우할 예정이다.

 

폰 데어 라이엔은 의사 면허증을 가졌음에도 1990년대 가정주부로 살며 7명의 자녀를 낳아 기른 경단녀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현대 여성의 고민을 체험한 것이다. 젠더나 노동과 관련해서도 폰 데어 라이엔은 여성 지도자의 특수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례로 지난 7~8일 유럽정상회의에서 폰 데어 라이엔은 ‘사회적 유럽’을 강력하게 추진한다는 포부를 밝혔고 앞으로 기업 이사회에 여성 진출을 강하게 뒷받침할 예정이다.

 

폰 데어 라이엔의 집행위원장 임기 초 1년 반 정도가 지났다. 코로나 사태는 유럽통합의 진전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었다. 보건 정책이라는 회원국들의 전통적 정책 영역을 유럽이 하나로 묶어 백신 확보와 분배를 주도했다. 또 재정을 하나로 연결하여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확보했다. 이 두 가지 변화만으로도 폰 데어 라이엔은 유럽통합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앞으로 더 돋보이는 주도력으로 유럽의 아버지 장 모네나 단일시장과 화폐를 만들어낸 자크 들로르에 버금가는 리더로 부상할지 살펴볼 일이다.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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