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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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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공지사항

제목 - 설명
  • [내일신문] 백신의 세계지도와 민족주의 (21.04.13)

    • 등록일
      2021-04-20
    • 조회수
      280

백신의 세계지도와 민족주의

 

2021년 들어 백신을 놓고 전쟁이나 민족주의라는 표현이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백신의 공급은 부족한데 세계적 수요는 엄청나고 국가끼리 백신 확보 경쟁을 벌이다 보니 잦은 대립이 발생한다. 나라마다 신속하게 백신을 확보하여 국민 접종을 시행함으로써 코로나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숨 막히는 거리 두기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과열 노력이 초래한 결과다.

 

그러나 백신을 둘러싼 충돌을 전쟁이나 민족주의로 이해하고 속단해 버리는 것은 곤란하다. 국제 경쟁만큼 협력도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종종 백신의 공급을 두고 국가들이 대립하지만, 코백스처럼 개발도상국을 위한 국제협력의 사례도 존재한다. 민족주의의 렌즈로 최근 백신의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차분한 지정학적 분석이 더 필요하다.

 

첫째, 세계는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나라와 나머지로 나뉜다. 러시아는 작년 여름 세계 최초로 백신을 개발했다.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던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며 ‘스푸트니크’라 이름 붙였다. 중국도 국가 역량을 동원하여 일찍이 백신을 국제시장에 내놓았다. 서방 선진국 가운데는 미국의 화이자(독일과 협력)와 모더나, 영국·스웨덴의 아스트라 제네카 등의 제약업계 대기업들이 조기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반면 파스퇴르의 조국 프랑스는 자국 회사 사노피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으나 백신 개발에는 실패했다. 중국도 너무 서둘러 쾌재를 불렀는지 며칠 전 보건 고위 관료가 직접 나서 자국 백신의 효과가 신통치 못하다고 발표하였다.

 

둘째, 지구는 백신을 생산하는 나라와 소비하는 나라로 나뉜다. 이 부분에서 민족주의 논쟁이 제일 크게 제기되었다. 아스트라 제네카(AZ)의 백신은 영국에서 개발했으나 세계 각지에서 생산한다. 유럽연합(EU)은 AZ가 영국 시장만을 집중적으로 공급한다며 불만을 표했고, EU 내 생산 백신을 역외로 수출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AZ의 다른 생산 기지인 인도 역시 자국 사정이 급하다며 수출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

 

셋째, 사전 구매로 백신을 확보한 나라와 무방비의 나라로 갈라진다. 예를 들어 캐나다나 이스라엘은 직접 백신 개발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분량을 예약해 놓았다. 캐나다는 인구 몇 배에 달하는 분량을 확보한 대표 사례이고, 이스라엘은 국민 백신 접종률이 세계 선두를 달리는 경우다. 반대로 다수의 개발도상국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 백신 구매에 미리 나서지 못했다.

 

넷째, 백신을 개발하여 생산하는 강대국은 자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민주국가와 외교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독재로 구분된다. 미국과 영국은 자국민의 접종률을 높이는데 국가 역량을 동원했다. 영국은 현재 접종률이 50%를 넘어서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도 국민의 38%까지 적어도 한 번의 접종을 마쳤다고 알려졌다. 반면 중국이나 러시아는 국민의 건강보다는 국가의 명예를 앞세워 외교의 수단으로 백신을 활용한다. 중국은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백신 원조 정책을 펴 세계인의 건강을 보호하는 강대국의 이미지 홍보에 나섰다. 다만 중국 백신의 효과가 현저하게 떨어지면 오히려 이미지에 먹칠할 수도 있다.

 

이상에서 보듯 백신의 지정학이 제시하는 세계지도는 각국의 다양한 국가 능력을 반영한다. 백신의 개발은 국가의 과학기술 능력을 대변하고, 생산은 경제를 신속하게 동원하는 힘을 보여준다. 사전 구매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국가의 기획력과 경제력을 나타내고, 국민 접종률은 민주주의 및 정부의 총체적 행정력의 거울이다. 지정학적 분석에 비쳐 보면 결국 민족주의 반응이나 정책은 정부의 무능력이나 실수를 뒤늦게 만회해 보려는 꼼수가 대부분이다.

 

지금 지구촌 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국 사람들은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먼저 백신을 맞게 되어 특별히 기뻐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국인조차 자국이 개발한 아스트라 제네카보다는 화이자 접종을 선호한다. 여기서 백신 민족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러시아 국민조차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외제’ 백신을 신속히 접종받길 원치 않을까.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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