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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마지막 회 세계사의 중심으로 재입장한 중국

    • 등록일
      2020-12-06
    • 조회수
      335

14억 경제 인해전술로 ‘팍스 시니카(Pax Sinica : 중국 주도 세계평화)’ 꿈

 

풍부한 노동력 바탕 국가 주도 투자, 세계 공장 넘어 최첨단 산업국가로 진격
개인 자유 억압하고 이룬 ‘차이나 모델’, 지구촌 지배할 새 질서 형성에 한계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입증하는 무대였다. 사진은 중국적 화려함을 과시한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지난 2014년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국가마다 다른 물가 수준을 고려해 산출된 구매력평가기준(PPP)을 적용한 결과다. 물론 달러와 위안화의 환율을 적용하면 여전히 미국의 경제 규모가 중국을 앞선다. 국제 기축 통화인 달러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배우면서 자란 세대에게 중국 구매력이 미국을 추월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세계의 관심은 중국 경제가 미국을 완전히 추월할 수 있을지에 모아졌다. 미·중간 환율을 적용해도 중국의 비중이 더 커진다면 그것은 세계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미국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존의 성장 패턴을 꾸준히 지속할 경우 2020년대에는 미국을 누를 수 있다는 예측이 최근까지 일반적이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세계 경제 위기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물론 중국의 생활 수준이 선진국보다 못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계산에 따르면 2019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 수준이고, 구매력평가기준을 적용해도 1만9000달러 정도이기 때문이다. 칠레의 명목소득 1만5000달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중국은 확실히 부자나라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중국은 1979년 개혁개방 정책으로 경제발전 궤도에 올라선 이후 40년간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초고속성장을 지속해왔다. 중국이 앞으로도 연평균 5%의 성장 속도를 유지한다면 13년 후 국민소득은 지금의 2배로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 최대 14억의 인구대국이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수천만 명이 사는 부유한 대도시의 소득수준은 이미 선진국을 바짝 쫓아와 있다. 또 20세기 후반부터 지속된 경제발전은 주택과 도시의 인프라 시설을 최신식, 최첨단으로 변화시켰다. 단순히 통계에서 나타나는 경제 지표보다 국민은 사실상 훨씬 더 현대화된 발전의 혜택을 누리며 산다.

 

 

개혁·개방 40년, 배고픔 벗어난 중국

 

2020년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경제발전으로 인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한다. 상하이 황푸강 건너편 넓은 불모지에 불과했던 푸둥은 경제발전과 더불어 중국의 맨해튼으로 돌변해 지금은 마천루 숲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고속철은 베이징이나 상하이로부터 전국을 촘촘하게 연결하고 심지어 서방 엔지니어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해발 5000m가 넘는 티베트의 라싸까지 일사천리로 달린다.

 

경제발전을 막 시작하던 1980년대 중국 신혼부부 살림에서 제일 비싼 물건은 자전거였다. 1970년대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대학을 다니던 청년들은 농촌에 파견돼 막노동을 하면서 공산사회 건설에 기여해야 했다. 그보다 앞서 1958년에는 마오쩌둥이 추진한 대약진운동 시기 사람들은 밥그릇을 녹여 철강을 만드는 희한한 실험에 동원됐고, 그 결과 경제 파탄으로 30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굶어죽기도 했다.

 

이 모든 역사적 불행의 시작은 1840년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중국의 근·현대사는 자국민에게 마약을 팔려는 외세 앞에 비참하게 굴복한 전쟁을 계기로 서방 세력이나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간섭, 유린(蹂躪)의 반복이었다. 1949년 공산당 세력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정치적 자율성은 회복됐으나 경제는 여전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40년의 개혁개방 경제발전은 중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역사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 지구촌에서 극빈 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인류의 형편이 급격하게 좋아진 1등 공신은 다름 아닌 중국의 경제발전이다. 중국의 14억 인구가 빠르게 가난에서 벗어나자 전 세계 극빈층 숫자도 감소한 것이다.

 

 

같이 출발한 인도 앞지른 비결


▎1966년 문화혁명 당시 천안문광장에 집결한 인파. 문화혁명의 대실패는 자본주의를 촉진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사실 인류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중국의 부상은 갑작스러운 상황 반전이라기보다는 정상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진시황(秦始皇)의 통일 제국 시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중국은 거의 지속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중세 송나라의 선진성은 원·명·청나라를 거치면서 줄곧 유지됐다. 미국 버클리대의 케네스 포메란츠 교수는 [대분기(大分岐): 중국과 유럽, 그리고 근대세계 경제의 형성]이라는 역작을 통해 실증적으로 다양한 지역의 경제발전 수준을 비교하면서 서구의 특수성을 분석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서유럽이 중국이나 일본, 인도 등을 추월해 압도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한 시점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장기적인 거시 역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발전은 19~20세기 발생했던 예외적인 낙후성을 바로 잡는 과정인 셈이다. 지금의 중국은 지난 2000여 년 동안 그러했듯, 다시 세계에서 인구도 제일 많고 부도 가장 풍부한 나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일본이나 대만,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따라잡기에 먼저 성공한 뒤, 이제는 동아시아의 무게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이 육중한 기세로 뒤늦게 추격하는 모양새다.

 

중국과 인도는 1800년 무렵까지 세계 경제의 중심을 형성했다. 인구 규모로 보나 생산 수준으로 따지나 중국과 인도를 합치면 세계 경제력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19~20세기에도 대륙 규모의 두 나라는 서구의 압도적 우위에 눌리기는 했지만,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현재 중국인은 14억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인도 인구도 13억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두 나라를 비교해 보면 중국 경제발전의 특수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식민지나 반(半)식민지의 경험을 극복하고 중국(1949년)과 인도(1947년)는 비슷한 시기 새로운 나라를 세워 경제발전을 도모했다. 중국은 공산당의 주도 아래 독재 체제로 경제발전을 추진한 반면 인도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발전을 노렸다. 하지만 중국 경제발전의 성과가 인도에 비해 월등하다고 해서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중국처럼 공산당이 제멋대로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곳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대약진운동처럼 처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경제발전에 획기적인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사회문화적 근대화 과정에서 인도보다 월등하게 앞선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의 핵심은 시민들의 평등의식이다. “나도 남처럼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행히도 현대 인도는 형식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사회와 문화는 여전히 봉건적 카스트 제도에 묶여 있다. 실제 대다수의 사람은 카스트 안에서만 결혼한다.

 

반면 중국 정치체제는 일당독재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의식을 공유한다. 그것은 유교나 불교가 지닌 인문주의 전통의 결과일 수도 있고, 공산당 정부가 적극적으로 봉건 시대의 사회적 차별을 제거하면서 평등의식을 고조시킨 결과일 수도 있다. 유교에서는 누구나 노력해서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 인격을 고양할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공산당 정부는 전족(纏足)과 같은 구시대의 악습을 폐지하는 것은 물론 남녀차별의 폐습을 개선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마오쩌둥부터 농민까지 서로 동지(同志)라고 부르는 중국 사회와 카스트가 다르면 어울리지도 않는 인도 사회의 경제발전 잠재력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것이 1979년이고, 인도가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다. 사실상 개방사회를 향한 두 나라의 정책 실험이 시기적으로 큰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은 세계 경제에 성공적으로 통합된 반면, 인도는 여전히 일부 산업을 제외하면 불평등 문화의 특성을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다. 2020년에도 명목상 1인당 국민소득도 중국이 인도보다 대략 다섯 배나 많다.

 

 

공산주의 실험 접고 자본주의 접목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이끈 덩샤오핑(가운데). / 사진:위키피디아

 

중국과 인도가 거시 역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을 형성한 두 거인이라면, 중국과 소련은 20세기 냉전 시기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한 강대국들이다.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경제정책에서 1917년부터 지속해온 소련의 공산주의 경험을 학습, 모방했다. 소련의 공산주의란 국가가 경제의 중심축이 되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체제다. 1950년대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의 주요 도시에는 소련이 파견한 고문관들이 중국의 산업화를 위해 비지땀을 흘렸다.

 

1960년부터 소련과 중국은 서로 다른 경로를 걷기 시작했다. 두 대국은 공산주의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고 초기의 협력 체제는 붕괴하면서 서로 다른 모델을 향해 제 갈 길을 갔다. 소련은 일관되게 국가 중심의 산업화라는 목표를 추구했다. 반면 중국은 대약진운동부터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이상주의적 실험에 나섰다. 사후적으로 보면 중국과 소련의 실험은 경제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역사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아이러니는 정책 실패 과정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

 

중국이 소련보다 더 확실하게 더 일찍 실패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는 경제적 관점에서 수천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결정적인 실책이었고 도시나 농촌, 그 어디에도 풍요를 가져오지 못했다. 소련의 국가 중심 산업체제가 시장에서 쓸모없는 철강과 기계들을 생산하며 1980년대까지 버텼다면, 중국은 아예 일찍 실패한 탓에 마오쩌둥이 사라지자 곧바로 개혁에 나서는 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도 중국이 자본주의를 넘보기 시작한 1979년부터는 지구촌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의 집권은 세계화의 출발을 알렸다. 중국이 고통스러운 개혁 개방의 변화를 시도하며 세계화의 기회를 백분 활용할 수 있었다면,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는 1990년대 후발 주자다 보니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탈(脫)공산화 과정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러시아에서 선택한 ‘충격요법’(Choc therapy)과 중국이 걸어온 점진적 개혁을 대조시킨다. 1990년대 러시아의 충격요법은 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과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1970년대 경험한 문화대혁명만 한 충격요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혼돈과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던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 충격요법이었다. 러시아는 충격의 경험이 시장과 동일시됐다면 중국에서는 공산주의와 등식을 이룬 셈이다.

 

일찍 실패한 덕분에 빨리 자본주의 세계에 적응하려고 노력을 시작한 중국은 성공의 선순환을 그릴 수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가 갖지 못한 홍콩과 대만이라는 동포 세력이 존재한 데다 같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일본과 싱가포르, 한국이라는 성공 모델도 있었다. 중국이 제일 먼저 자본주의 실험에 나선 경제특구가 모두 대만, 홍콩, 마카오를 마주보는 도시인 샤먼과 산토우, 선전, 주하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은 경제 개발을 위한 실험지역을 저장, 장수, 산동, 허베이, 요동 등 한국 및 일본과 마주 보는 연안 지역으로 확대했다. 이어서 연안에서 점차 내륙까지 발전의 동력을 확산시킨 결과 21세기가 되면 중국 전역이 경제 개발특구가 됐다.

 

외부에서는 중국의 현실을 공산당의 철통 같은 독재로 보지만 실제 발전 과정에서 중국은 중앙 집중보다는 연방주의적 접근을 택했다.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에 충분한 자율적 권한을 부여한 뒤 서로 간에 경쟁을 유도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이를 ‘중국 스타일의 연방주의’라고 부른다. 사실상 인구 14억의 나라를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매우 비효율적이다. 마오쩌둥의 집중적 권력 시대가 가고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 검건 희건 고양이는 쥐만 잡으면 된다)의 실용주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공산 독재 중국은 민주주의를 택한 인도보다 봉건주의 관습을 타파하고 평등 의식을 공유하는 현대 사회를 만드는데 훨씬 효율적이었다. 경제정책에서 완전히 실패했던 공산 중국은 소련보다 먼저 자본주의와의 공존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 중국이 개혁개방의 시도에 나선 1970년대 일본은 자동차를 미국과 유럽 시장에 대량 수출하고 있었고, 한국과 대만·홍콩과 싱가포르는 수출 주도 경공업 산업화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중국은 촘촘한 철도망을 통해 하나의 중국을 증명한다.

 

덕분에 중국은 일본이나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가 걸었던 길, 이미 성공이 확인된 전략을 차근차근 재현하면 되는 후발주자의 이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중국은 소련 모델인 중화학 공업 중심의 근대화를 포기하고 해외 시장에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을 중점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이 선진화하면서 포기한 산업들을 차곡차곡 챙기며 모두 자국으로 끌어들였다. 민주화로 생산비용이 오르게 된 한국과 대만의 산업 생산을 이어받은 중국은 점차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해 나갔다.

 

동아시아에서 진행된 이런 산업의 흡수·통합 과정은 서구에서 미국이 유럽의 다양한 나라 산업을 모두 빨아들인 과정과 유사하다. 중국은 일본과 네 마리 호랑이의 산업들을 서서히 집어삼키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섰다. 경제사에서 세계의 공장이란 표현은 19세기 영국에 적용됐다. 영국은 19세기 중반 철강이나 면직 등 세계 주요 생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할 정도로 압도적인 경쟁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과거 영국 못지않은 생산기지로 우뚝선다.

 

2002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함으로써 중국은 생산품을 지구 곳곳에 판매할 계획을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실제 그 이후로 중국이 마음먹고 한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 몇 년이 지나 세계 시장을 독점해 버리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세계의 안경이나 속옷은 중국의 한 도시에 생산이 집중돼 만들어진다. 과거 영국의 맨체스터가 세계의 면직물 생산을 독점하던 현상과 유사하다.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은 노동력을 지녔고, 또 최신의 생산 설비를 갖출 수 있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2010년대가 되면 중국은 경공업에서 중화학 산업으로, 또 첨단산업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이는 일본이나 한국이 가지고 있던 비교우위의 영역까지 넘보게 됐다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자동차 생산과 소비에 있어 중국은 미국이나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시장, 최대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또 한국이 지배하던 조선업에도 도전장을 내밀며 불도저를 밀고 오는 중이다. 중국은 더 이상 ‘싸구려 생필품’을 생산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며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과 한국은 물론, 서구의 미국과 유럽도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 상황이다. 특히 국가가 과학기술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우주 탐사와 같은 분야에서는 이미 선두 개척자의 위상을 갖고 있다. 2010년대 말 중국 기업 화웨이를 둘러싼 분쟁은 정보통신산업의 최첨단 기술인 5G에 있어서 중국의 생산능력과 지배력이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세계 경제를 가장 빠른 속도로 연결하는 통신 기능마저 중국 기업이 가장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21세기는 일상생활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를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지구촌의 공장 중국에서 세계인의 삶을 지배하는 물질적 생산을 책임진다는 의미다. 동시에 중국 경제 그 자체가 풍요의 시대를 맞으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동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중국이 지난 40여년간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하면서 이미 천연자원을 생산하는 많은 나라는 중국발 경제 붐을 경험했다. 철광석을 생산하는 호주나 구리 수출국 칠레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제 중국은 생산의 기지뿐 아니라 소비의 주된 시장이 됐다. 중국인들의 삶이 윤택해지면서 육류나 낙농 제품의 수입이 대거 늘어났다. 지금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은 농산품 수출을 위해 중국 시장에 목멜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03년 사스 사태 이후 중국인은 붐비는 대중교통을 피해 대거 자가용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국 시장은 세계 자동차 브랜드들이 경쟁하는 치열한 경연장으로 부상했다. 그 어떤 국가나 기업도 중국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구매력에 있어 미국과 유럽이 여전히 월등하지만 중국은 성장력이 뛰어난 미래의 큰 시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잡기와 뛰어넘기


▎5G 설비를 생산하는 화웨이 본사. 중국 공산당과의 유착설로 미국의 견제를 받고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또한 잘살게 된 14억의 중국인들은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엄청난 규모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열었던 철도의 시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일본의 고속철도 신칸센이다. 하지만 업그레이드된 고속철을 대륙 수준에서 보편화시킨 것은 바로 중국이다. 이제 세계 고속철의 절반 이상은 중국 땅에 깔려있다.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그리고 상하이에서 라싸까지 고속철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중국인들의 해외여행 붐 또한 세계를 뒤흔들어 놓는 엄청난 힘이다. 한국은 사드 사태로 중국 관광객이 끊기자 여행 업이 휘청거린 악몽을 겪었다. 중국 관광객은 이웃나라 한국을 넘어 세계 어디서나 최대 고객으로 부상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부터 뉴질랜드의 밀포드 사운드까지, 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인도양의 몰디브까지 미국인보다 해외여행을 훨씬 더 선호하는 중국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중국의 디지털 경제는 이제 선진국 따라잡기의 수준을 넘어 가장 앞서는 수준이 됐다. 예를 들어 지불 수단과 관련해 중국은 현찰 사용에서 수표나 카드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스마트폰 지불 방법으로 뛰어 넘어갔다. 실제로 중국 시골의 길가에서 수박을 파는 사람부터 대도시 골목에서 구걸하는 거지까지 모두 QR코드를 내밀며 디지털 수금을 한다. 중국에서 마오쩌둥 얼굴이 그려진 지폐를 냈다가는 외계인 취급당하기 딱 알맞을 정도로 중국인의 삶은 비약적인 속도로 앞서 나가고 있다.

 

중국인의 주거 조건 또한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기존의 소규모 주택을 상당 부분 유지한 일본이 한국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보면 현대화된 모습에 놀라곤 했다. 하지만 중국은 도시 자체를 새로 만든 듯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숲이 연안의 대도시부터 내륙의 주요 도시까지 속속들이 형성돼 있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첨단의 기능적 편리함을 최대한 누리는 환경을 갖춘 곳에서 생활하게 됐다는 의미다.

 

 

팍스 시니카(Pax Sinica)는 가능한가

 

2012년 집권한 시진핑은 이런 중국 성공의 자신감을 대변하는 듯하다. 인구가 워낙 많아 평균 소득과 같은 통계는 미국이나 유럽에 뒤지지만 현재 수준의 발전 행보를 적어도 20~30년만 지속할 수 있다면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시진핑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세계의 중심인 중국’ 프로젝트의 결정판이다.

 

19세기 영국이 철도와 해군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팍스 브리타니카를 만든 것처럼, 21세기 중국은 고속철과 바다를 연결하는 일대일로를 통해 팍스 시니카를 형성하겠다는 포부다.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이 전형적인 해양 세력이었다면 일대일로에서 볼 수 있듯이 21세기 중국은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는 세력이 될 수도 있다.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유럽까지 달려가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처럼 상징성을 지닌 프로젝트는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이 가지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21세기에도 도로와 항로는 지경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일대일로와 같은 계획이 이 시대 세계인을 꿈꾸게 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프 나이의 표현을 빌자면 하드 파워가 아니라 소프트 파워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은 과연 21세기 인류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줄 수 있는가.

 

일부에서는 서구의 개인주의와 자유에 기초한 모델을 부정하고, 집단과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이나 모델’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이나 모델은 세계인이 꿈꿀 정도로 퍼지기보다는 단지 중국 독재정부의 간판으로만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이 거대한 나라의 경제 부흥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해 온 세계 자본주의 질서가 없었다면 중국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차이나 모델의 성공은 남들은 모두 서구 모델을 따르고 중국만 차이나 모델을 추구할 때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만일 모든 나라가 차이나 모델을 따라 한다면 세계는 대립과 분쟁, 또는 각자도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영국이나 미국의 세계 지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매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질서다. 중국이 21세기에 자신을 세계의 한가운데 두는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려면 과거 영국이나 미국처럼 보편성과 객관성을 지닌 원칙을 중심으로 지구촌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2000여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유교적 질서를 예로 들 수 있다. 불행히도 2020년 중국이 보여주는 행태는 전통적 유교의 화이부동(和而不同)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미가 만들어놓은 자유주의 질서의 수용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지금은 20세기 제국주의 일본이나 소련이 보였던 후발주자의 일그러진 자만과 조급함이 눈에 띈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원문보기 링크 :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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