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유럽을 가르는 유로의 지정학
(내일신문 2019년 11월 15일자)
유럽에서 2019년은 두 개의 시대적 변화를 경축하는 해다. 한편에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려 냉전을 종결하고 다시 하나의 유럽이 된 30주년을 기념한다. 다른 한편에는 유럽연합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 국가들이 국민 화폐를 포기하고 유로라는 하나의 새로운 화폐를 만든 20년을 맞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 국가로 공산주의 체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중·동유럽의 국가들은 해방 이후 지난 30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공산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체제를 전환하는데 성공했고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서유럽과의 경제 격차도 많이 줄였다. 이 같은 이행기의 성공에는 유럽연합 가입이 결정적이었다. 구 공산권의 중·동유럽은 2004년 8개국이 대거 EU에 진입했고, 2007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2013년 크로아티아가 새로 가입하였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할 즈음 출범한 유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 성년에 도달했다. 특히 2010년대 그리스를 비롯한 일부 국가들이 유로를 포기할 수도 있는 지경의 위기를 맞았지만 협력을 강화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놀라운 점은 이 어려운 시기에 중·동유럽의 5개국이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 유로화의 배에 올라탔다는 사실이다. 2007년 슬로베니아, 스웨덴 등은 유럽연합에 속하지만 자국 화폐를 유지하고 있다.
중·동유럽에서 유로 채택의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국가의 규모다. 폴란드나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 등 인구와 경제규모가 비교적 큰 나라들은 자국의 화폐를 유지하였다. 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발트 3국이나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등은 모두 유로를 도입하였다. 유로 채택 국 가운데 인구가 제일 많은 것이 슬로바키아로 545만 명 정도다. 국가 규모가 작으면 외부의 충격에 저항할 능력도 부족하기에 아예 유로권에 진입하여 안정적 경제 환경을 누리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크로아티아는 인구 407만 명 규모의 작은 나라지만 유럽연합 가입 자체가 2013년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10여 년 정도 늦었고 따라서 유로 가입을 현재 준비하는 단계다.
물론 나라의 경제 규모가 작다는 이유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주변의 강대국으로부터 지정학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유럽연합이라는 커다란 공동체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음으로써 보호를 받으려는 심리도 존재한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이 대표적인 사례로 소련의 일부였던 나라들이며 탈 냉전기 1990년대에야 독립을 쟁취하여 여전히 러시아의 위협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다. 또 슬로베니아는 구 유고 연방에서, 그리고 슬로바키아는 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90년대 분리해 나온 신생국가들이다. 이들에게 유로의 채택은 독립을 확고하게 만드는 지정학적 보험에 해당한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소련의 위성국가였지만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고, 필요에 의해 유럽연합에 가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한 민족 독립과 자율성의 의지를 불태우는 나라들이다. 유럽이 주는 지원금과 거대한 수출시장을 누리지만 민족 화폐의 주권을 포기하거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하며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