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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2)] 세계 경제의 기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 등록일
      2019-02-13
    • 조회수
      530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2)] 세계 경제의 기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보다 폴리스(polis) 시민권을 달라!
 
해양문명이 낳은 해군력과 무역·은광·노예제가 결합해 비약적 인구 팽창
장기적 경제성장은 시민 민주주의를 낳고, 중세를 능가한 공공서비스 제공
 
그렉시트(Grexit) 위기는 2010년대 국제뉴스면을 반복해서 장식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한 그리스가 유럽의 단일화폐 유로에서 탈퇴하는 시나리오를 표현한 신조어였다. 그리스 경제 위기의 원인은 정부가 해외에서 자금을 마구 빌려 무분별하게 지출한 결과, 거대한 국채 더미를 끌어안은 데서 왔다. 그러던 와중에 2008년 세계 경제 위기가 발생해 이자율이 높아지자 그리스 정부는 원금은커녕 이자도 지불하기 어려워져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수년 동안 허리띠를 동여매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위기를 넘겼다. 유로화를 계속 사용하면서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잔류하게 됐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이 겪어야 했던 멸시와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스에 돈을 빌려준 독일에서 그리스가 자국의 섬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아야 한다는 막말이 튀어나왔다. 2015년 총선 당시 그리스 국민은 유럽과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한 긴축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투표했지만, 이때 선출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결국 국제사회의 치욕적 조건을 수용하면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드높은 역사적 자부심으로 가득찬 그리스인들에게 21세기는 고난으로 시작한 셈이다.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야말로 유럽 문명이 잉태된 발상지가 아닌가. 시민들이 모여 공동 운명을 결정하는 민주주의를 발명하고, 합리적 사고를 통해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켰으며, 건축과 조각, 연극과 문학 등 빛나는 예술의 세계를 열었던 그리스는 유럽은 물론, 서구의 기원이라 여겨지는 곳이다.
 
부자나라 여행의 첫 방문지였던 바빌로니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지 그리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통해서 만난다. 기원전 6세기의 고대 바빌로니아는 인류 최초의 시장경제를 실험하면서 당시로서는 높은 생활수준을 구가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539년 이웃의 군사강국 페르시아에 점령을 당하면서 합병됐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를 넘어 아나톨리아를 단숨에 삼키고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90년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했고, 기원전 480년에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물리치면서 제국의 확장을 가로막는데 성공했다. 기원전 330년대에는 그리스에서 출범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뒤, 인도까지 뻗쳐나가는 거대한 그리스 문명의 제국을 만들었다.
 
이 처럼 고대부터 서남아시아의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남부 유럽의 그리스는 서로 대립하거나 전쟁을 치렀고, 심지어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면서 서로 경쟁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아까지 가세한 이 지역은 밀접한 문명과 교류의 그물로 연결됐다.
 
난파선이 증명한 고대 그리스의 번영
 
고대 그리스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800여 년부터의 시기를 지칭한다. 기원전 8~6세기의 아르카이크(Archaic) 시기, 기원전 5~4세기의 고전(Classic) 시기, 그리고 기원전 3~1세기의 헬레니즘(Hellenism) 시기로 나뉜다. 아르카이크 시기는 아직도 왕들이 지배하는 시대였다면, 고전 시기는 도시국가와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라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기는 알렉산더의 제국 건설 이후 그리스 문화가 지중해는 물론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까지 확장된 시대를 일컫는다.
 
그리스 경제는 느린 속도지만 고전 시기부터 시작해서 헬레니즘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실제 1인당 소득의 성장률은 연 0.07~0.14% 정도의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장도 장기적으로 누적되면 결국 상당히 높은 생활수준을 보장하게 된다. 그리스인의 넓은 저택에는 타일을 바른 천장과 물탱크가 있었다. 도자기나 금속으로 만든 식기나 항아리, (pan, 자루가 달린 접시 모양의 얕은 냄비) 등은 식생활의 다양성을, 또 욕조나 철제 문고리와 아동 완구 등은 상당히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수준을 보여준다. 게다가 망자를 위해 묘비를 세우는 관습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일부 노예까지 작은 묘비를 가질 수 있었다.
 
개인의 소비를 넘어 그리스의 특기(特技)는 공공 서비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조국답게 시민을 위한 시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의 하수도·공중목욕탕·분수 등은 물 관리의 철저함을 보여줬고, 운동장·ter-spacing: 0pt”>150척에 육박하고, 기원전 1세기에는 200척을 넘어섰다. 그리고 서기 1세기에는 250척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 만 서기 50년 이후에는 난파선의 숫자로 경제 발전을 측정하는데 장애물이 발생한다. 이때부터 그리스 특유의 암포라(amphora) 항아리 대신 나무통을 포도주 운반에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배가 난파하면 나무로 만든 배는 물론, 나무통도 바다 속에서 썩어버려 난파선의 수를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워졌다.
 
바다의 문명이 낳은 민주주의
 
고대 지중해 동부에는 두 종류의 정치 모델이 존재했다. 하나는 페르시아처럼 황제와 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제국이었다. 권력이 집중돼 강력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관료적 국가 모델이다. 이런 모델은 페르시아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이집트에도 파라오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나 나일강 유역처럼 거대한 평야를 중심으로 권력을 통일하기 쉬운 지리 조건을 갖춘 곳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처럼 여러 개의 소규모 도시국가가 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문명권이라는 큰 그물을 이루는 모델이다. 발칸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그리스 지역은 바다와 땅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데다 많은 섬들로 형성됐다. 게다가 해변을 마주하는 육지도 평야가 아닌 산악지역이 많아 정치 분열을 초래하는 형세였다. 결국 그리스는 다양한 도시가 바다를 통해 소통하면서 하나의 문명을 이루는 다원성의 체제를 갖게 됐다.
 
이런 도시국가의 모델이 그리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기원전 1200~800년 사이에 현재 시리아와 레바논에 해당하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는 페니키아 문명이 시돈, 티레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동부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에 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하면서 해양제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향후 로마와 대결을 벌이는 카르타고였다.
 
그리스는 페니키아로부터 도시국가 모델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고 소아시아, 에게해, 흑해, 이탈리아 남부 등에 식민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지중해에 도시국가 모델을 확산 시켰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고 툭하면 전쟁을 치르곤 했다.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하기 때문에 페르시아와 같은 외부세력이 침입하면 힘을 합쳐 싸우기도 했지만, 펠로폰네소스전쟁 때처럼 서로 편을 갈라 내부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그리스 문명이라는 하나의 세계에 속하지만 도시국가의 다양성이 존재하고, 그래서 서로 항상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이후 그리스를 넘어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특징이 된다. 거대한 제국의 지방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수동적 존재였지만, 다원적 문명에 속하는 도시국가는 창의력을 발휘하며 경쟁하는 주체가 돼야 했다.
 
도시국가의 또 다른 특징은 위계적 제국과는 달리 시민들 사이에 상당한 평등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상시적인 전쟁의 위협에서 도시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모든 시민이 군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시민을 군인으로 동원하자면 도시국가의 지배계급은 일반 시민과 권력을 나눠가질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광장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모델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도시 국가는 외부와의 전쟁 위협에 시달렸지만 내부적으로는 시민들이 모여 공동으로 결정한 법체계를 갖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시민이 직접 만든 법을 통해 평등한 지배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제도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경제 활동에 무척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줬다.
 
그리스 문명은 기본적으로 바다의 문명이다.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는 육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밖으로 확장해나갔다. 반면 페니키아와 그리스는 내륙을 향하지 않고, 바다를 통해 외부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바다를 통해 외부와 거래했고, 배를 타고 나가 먼 지역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지중해 기축 통화된 그리스 은화
 
미국의 역사학자 존 헤일은 [바다의 지배자: 아테네 해군의 서사와 민주주의의 탄생]이라는 역작을 통해 그리스 문명 황금기 아테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아테네가 그리스의 중심 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해군력이다.
 
고대의 해전이란 원래 배를 서로 옆에 대고 갑판에서 벌이는 백병전이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부터는 삼단노선(trireme)이라는 쾌속정이 등장해 상대 배에 부딪쳐 충격을 가함으로써 박살내는 전술이 중요해졌다. 삼단노선이란 노를 젓는 노잡이가 200명 정도 타는 배인데 조타(操舵)와 노 젓는 실력이 전쟁에서 승패를 갈랐다. 삼단노선은 날씨가 좋으면 하루에 100정도의 거리를 운항할 수 있는 무척 빠른 배였다.
 
아테네는 그 어느 경쟁 도시보다 견고한 배를 만들었고 도시의 시민들을 해군, 즉 노잡이로 동원했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전쟁이란 도시 공동체의 독립과 명예를 위한 숭고한 활동이었다. 따라서 시민만이 노잡이로 배에 승선할 수 있었고 이들은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원정을 나갔다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으로 돌아올 때면 멋들어지게 노를 저어 폼 나게 항구에 진입했다. 따라서 그리스에서는 어떤 일을 정확하게 할 때 아테네인이 항구로 진입하듯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러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물리치는 것은 물론, 경쟁 도시국가들보다 더 많은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가 매년 바치는 공물은 아테네의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부()의 근원이었다. 게다가 해군력의 필수요소였던 시민들이 강하게 권리를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맞았다.
 
기원전 6세기에 정치와 경제의 전성기를 맞았던 바빌로니아는 은화를 대량 사용해 시장경제의 원형을 형성했다. 바빌로니아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은을 공물로 받거나 수입해서 사용해야 했다. 반면 그리스는 아테네 남동쪽으로 불과 60 . 반면 그리스는 해운을 통해 처음으로 곡식과 같은 상품을 대량 수입하는 최초의 국제 무역체계를 형성한 것이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곡식이나 올리브기름, 포도주 외에도 도자기·가구·무기·의류·향수·도서 등 다양한 상품도 지중해를 오가게 됐다. 특히 올리브와 포도주의 문화는 아직까지도 유럽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예컨대 북해 연안에서는 주로 버터로 요리를 하고, 맥주를 마시지만 지중해 연안에서는 올리브기름에 빵을 찍어 먹으면서 포도주를 마시는 문화적 차이를 보인다.
 
일부 정치경제학자들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구성되는 최초의 세계 경제’(world economy)가 고대 그리스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이는 중심부가 주변을 착취하고 수탈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중심주변의 관계는 대부분 중심의 압도적 군사력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성이라는 고민을 안게 된다.
 
부자나라 그리스의 비결은 강한 군사력과 이를 통한 노예의 공급, 그리고 국제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이다. [고대 경제][고대 그리스의 경제와 사회] 등의 역작으로 유명한 핀리(Moses I. Finley)는 그리스 문명은 노예 제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군사와 강제 노동만으로 그리스 경제와 문명이 만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는 정치나 문화의 중심이었다.
 
특히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지중해 전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제도였다. 신분이나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누구나 시민이라면 국가의 일에 동참한다는 점에서 아테네 시민권은 은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아테네의 시민권은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일 경우에만 이어받을 수 있는 권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의 경우, 예외적으로 외지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또 펠로폰네소스전쟁 말기인 기원전 406년처럼 해군으로 징집할 시민이 부족한 경우, 외국인과 노예에게 해군에 복무하는 조건으로 시민권을 예외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도시국가에서 제국의 시대로
 
민주주의는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는 다시 학문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스의 합리적 사고와 비판적 문화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서구 철학의 뼈대를 형성했고, 소포클레스·아이스킬루스·에우리피데스로 대표되는 문학과 연극의 황금기를 일구는 토대를 제공했다. 의학의 히포크라테스, 수학의 아르키메데스, 역사의 헤로도투스나 투키디데스, 지리학의 프톨레마이오스 등은 아직까지도 해당 학문의 창시자로 통한다.
 
전통적으로 학계에서는 고대 그리스가 노예제 사회였기 때문에 기술의 혁신이나 발전이 더뎠다는 시각이 지배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이런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사실 그리스 사회는 도시국가 내부에 아고라라는 시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동시에 국제적으로 경쟁하는 무역망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경쟁의 상황에서는 노예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노예의 노동력과 기술 혁신을 적절히 혼합하는 전략이 더 유효했을 것이다. 노예 역시 광산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것만이 아니고 수공업이나 도시의 다양한 직업에 종사할 경우, 자신의 해방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혁신 기술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 고대 그리스는 물레방아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올리브나 포도를 짜기 위한 스크루, 그리고 광산에서 물을 빼기 위한 스크루 등을 개발해서 사용했다. 또 항구에서 배의 짐을 싣고 내리는 크레인을 고안하기도 했다. 이런 기술 발전은 근대 유럽까지 지속되는 장기적 기반을 제공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합병한 페르시아도 그리스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통일 제국 페르시아와 분산된 문명 그리스는 에게해를 가운데 놓고 기원전 5세기부터 200여 년을 대립했다.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문명권 도시들과 남쪽 페니키아 문명권의 도시들을 차지했지만 바다 건너 그리스 본토를 점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대립과 긴장의 시기에 그리스는 전성기를 맞아 부흥했다. 고전시대의 그리스란 바로 이 기원전 5~4세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 출발한 알렉산더 대왕의 신흥 군대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모두 집어삼킨 뒤, 부유한 이집트와 인도까지 세력을 넓혔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바빌로니아·페르시아·페니키아·그리스·이집트·인도 등 고대 문명을 총망라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다. 이 시기에 고대 그리스 문명은 경제 발전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다만 앞의 인구 상황에서 보았듯이 헬레니즘 시기부터는 부의 무게 중심이 그리스 본토에서 소아시아나 에게해로 옮겨가지만 말이다. 그것은 마치 도시국가의 시대가 저물고 다시 거대한 제국의 시대가 등장하는 것과 같다. 같은 시기, 지중해 동쪽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 문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흡수해간 로마 세력이었다.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사진자료가 포함된 기사 원문 보기 :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4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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