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프랑스 바르니에정부와 마크롱의 유산
지난달 프랑스정부 수장이 바뀌면서 이색적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취임식 한자리에 서른다섯의 청년과 일흔셋의 노인이 섰는데 신기하게도 청년이 노인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희귀한 모습이었다. 청년은 젊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보다도 어린 가브리엘 아탈이었고 노인은 정치의 백전노장(百戰老將) 미셸 바르니에였다. 프랑스에서 청년의 역동적 힘이 무대의 전면에 섰던 시대는 가고 이제 노인의 경험이 정치를 지배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일까.
이색적인 장면은 젊은이가 노인에게 권좌를 물려주는 상징적 순간만이 아니었다. 노련한 백전노장 바르니에가 총리로 임명되자마자 프랑스는 동시다발적인 저항과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새로운 정부에 밀월(蜜月)이나 평가유예기간(grace period)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오히려 바르니에의 임명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부정이라는 비판이 자자했다.
대통령의 총리 임명은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규정된 고유 권한이지만 이번 마크롱의 선택에 대한 강력한 비난은 지금도 그칠 줄 모른다. 지난 7월 초 총선을 치렀는데 두달이라는 시간을 낭비하고서야 총리를 임명한 사실이 비판의 배경이다. 파리올림픽 기간의 공백을 고려하더라도 마크롱은 허송세월한 셈이다.
바르니에 총리를 선택하게 된 배경
대통령은 총선이 끝나면 바로 의회 다수세력의 인물 가운데 한명을 총리를 임명하는 것이 프랑스 정치 전통이다. 문제는 7월 총선에서 어느 세력도 명확한 과반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총 577석의 프랑스 의회는 좌파 신민중연합(NFP, 180석), 마크롱의 중도세력(159석), 그리고 극우 민족동맹(RN, 149석)으로 삼분되었다. 야당인 좌파연합과 민족동맹이 의석수에서는 승리했더라도 이들은 함께 집권하기에 어려운 세력이다. 1986년 1993년 1997년 등 야권연합이 승리해 바로 집권했던 동거정부 시기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의미다.
마크롱은 여름 내내 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끌어모으려고 노력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다. 실패는 다른 정치 세력의 이기적이고 경직된 태도 때문이라는 논리다. 중도를 뛰어넘어 극우와 좌파연합이 연합하는 일이 어렵다면 연정이란 마크롱의 중도를 중심으로 좌파나 극우가 동참해야 한다.
가장 대립적이었던 극우와 마크롱의 연정을 제외하면 마크롱은 결국 좌파연합과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데 좌파연합 내에서 제일 큰 세력인 극좌 ‘불굴의 프랑스’는 극우만큼이나 중도에 대해 비판적이다. 온건 좌파인 사회당이나 녹색당이 좌파연합을 깨고 나와 마크롱의 중도와 힘을 합쳐야만 연정 구성이 가능하다. 마크롱의 ‘작업’에도 좌파연합은 붕괴하지 않았다.
9월이 되어 마크롱이 선택한 총리 바르니에는 좌파연합도, 중도도, 극우도 아닌 온건 우파 공화당(LR, 39석) 소속이다. 1, 2, 3등을 제치고 4등 한 당에서 총리를 선택했기에 민주주의를 부정했다는 비판이 뼈아프다. 특히 의석수가 가장 많은 좌파연합은 마크롱이 민의를 왜곡했다며 이번달 정부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지난 8일 의회 투표에서 좌파연합의 불신임안은 197표를 획득했다. 가결에 필요한 289표에서 한참 모자란다. 하지만 이 숫자는 극좌의 강경한 ‘불굴의 프랑스’는 물론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 등 연합의 모든 세력이 빠짐없이 불신임했음을 증명해 주는 결과다. 동시에 극우가 일단은 마크롱이 임명한 바르니에의 소수 정부를 두고 보겠다는 태도임을 확인해 주었다. 달리 말해 바르니에정부는 의석수 3위의 마크롱 중도세력과 의석수 4위의 온건 우파 공화당의 연정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출범해 극우 덕분에 간신히 생존하는 신세다.
기존 정치구도 바꾼 마크롱 시대의 종언
2024년 가을 프랑스 정국은 2017년 마크롱의 놀라운 부상으로 시작된 한 정치 시대가 끝나감을 알린다. 마크롱은 인물이 조직을 능가하는 21세기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마크롱은 100년 전통의 사회당에 잠시 몸 담았으나 장관을 거친 뒤 혈혈단신으로 대선에 뛰어들어 단숨에 당선됐고 급조한 자신의 정당으로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2022년에는 의회 과반까지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고 여전히 제1당 위상을 유지했다.
마크롱은 또 인기의 바람이 전통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이변을 낳았다. 마크롱의 부상은 단순한 한 인물의 성공만은 아니다. 그는 좌우가 대립하는 프랑스의 정치구도를 아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도의 입지가 좁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마크롱은 ‘좌도 우도 아닌 중도’를 내세워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커다란 정치혁명을 이룩했다. 마크롱의 성공으로 폭락한 세력은 온건 좌파의 사회당이고, 온건 우파의 공화당이다.
인물이 전면에 나서고 인기몰이로 바람을 일으키는 패턴은 포퓰리즘의 전매특허다. 마크롱은 중도에서도 포퓰리즘이 가능하다는 특이한 공식을 증명한 사례다. 전통적 집권세력인 사회당이나 공화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극단세력으로 표를 줄 수도 있지만 마크롱과 같은 중도 신흥세력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만 마크롱은 이들을 충실한 지지 세력으로 만들어 새로운 조직과 전통을 만들어 내는 데는 실패한 듯하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마크롱과 함께 부상한 세력은 좌와 우, 양극단을 형성하는 ‘불굴의 프랑스’와 ‘민족동맹’이다. 올해 흥미로운 현상은 좌파 안에서 포퓰리즘 세력인 극좌 ‘불굴의 프랑스’ 인기가 식어가고 오히려 사회당이 다시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회당(13.8%)은 중도의 집권당(14.6%)과 비슷한 득표율을 보였고 좌파 내 경쟁 세력인 불굴의 프랑스(10%)를 눌렀다.
극우 민족동맹은 올 유럽선거에서 31% 득표율로 1등을 차지한 데 이어 곧바로 치른 총선에서도 득표율을 33%까지 끌어올려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극우정당은 사회불만을 대변하기에 실제 집권과 상관없는 유럽선거에서 더 높은 득표율을 보여왔다. 이번에는 오히려 집권세력을 결정하는 총선에서 유럽선거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획득함으로써 집권 가능함을 증명한 셈이다.
극우 민족동맹 손에 달린 바르니에정부
프랑스는 이제 안개정국이다. 바르니에정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온전히 극우 민족동맹의 손에 달렸다. 극우가 좌파연합과 힘을 합쳐 정부를 불신임하면 바르니에는 사임할 수밖에 없다. 다만 1년 동안은 의회를 다시 해산할 수 없기에 이 경우 정국은 마비될 것이다. 책임 있는 집권세력 이미지를 확보하려는 민족동맹이 정국을 마비시키는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바르니에정부가 지속적으로 안정감을 보여준다면 바르니에와 온건 우파가 인기를 얻으며 부상할 수도 있다. 1990년대부터 이미 장관을 역임하며 프랑스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바르니에는 유럽 무대에 가서도 성공적 이미지를 쌓았다. EU를 대표해 영국의 탈퇴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27개 회원국의 의견을 적절하게 조정함으로써 단일 전선을 유지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난국에서 영웅이 탄생하듯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바르니에가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대선 주자로 부상해 중도와 극우의 세력을 흡수하면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는 이제 모두가 2027년 대선을 바라보는 국면으로 돌입했다. 그 사이에 의회 해산이 또 있을지, 불안정한 임시정부가 유지될지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지만 정치권의 계산은 모두 대선에 초점을 맞춰 진행될 예정이다. 내정의 소용돌이에 빠진 프랑스의 목소리가 유럽 무대에서 축소되면서 오히려 재임에 성공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활동영역이 상대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유엔 상임이사국 프랑스의 비중은 여전하겠지만 경제·사회 분야에서는 파리보다 브뤼셀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추세일 것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