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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식의세계속으로] 십자가를 짊어진 영웅 나발니

    • 등록일
      2024-02-23
    • 조회수
      100

목숨 바쳐 푸틴 부조리·잔악성 증명
독재 저항한 순교자의 상징 떠올라

 

 

러시아 독재의 가혹한 망치가 자유의 나무를 내리찍고 푸틴의 잔인한 낫이 나발니의 목을 베었다. 지난 16일 러시아 반체제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감옥에서 산책을 마친 뒤 돌연사했다는 소식이다. 크레믈은 그의 죽음과 상관이 없다며 시치미를 떼고 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의 체제가 다음 달 대선을 앞두고 성가신 야당 정치인을 제거해 버렸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나발니는 2010년대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치와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야당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푸틴은 2020년 탄압과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는 나발니의 속옷에 독극물을 넣어 죽이려 시도했다. 나발니는 다행히도 독살 시도에서 생존해 독일에서 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했다. 40대 정치인으로 나발니는 서방에 망명하여 러시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면서 언젠가는 무너질 푸틴체제의 종말을 기다리며 기회를 엿볼 수도 있었다. 전(全) 세계 정치인의 99%는 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발니는 십자가의 길을 택했다. 혈기 왕성한 20대의 치기(稚氣)도 아니었고 삶을 마감할 나이 노인의 희생도 아니었다. 죽음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람이 다시 죽음의 길로 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는 2021년 푸틴의 감옥이 기다리고 있는 ‘악마의 소굴’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귀국 즉시 ‘극단주의’라는 황당한 죄목으로 19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법정에서 “푸틴은 차르가 아니라 ‘팬티 독살범’일 뿐”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온몸을 던져 푸틴체제의 부조리와 잔악성을 증명하는 아이콘이 된 셈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발니는 영웅의 길을 택했다. 고대 그리스의 고전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처럼 나발니는 몸은 독재와의 전쟁에서 죽더라도 이름은 영원히 후세에 전해질 영웅의 운명을 택한 것이다. 치졸하게 목숨을 구하고 평범하게 사느니 불을 보듯 뻔하게 죽음이 기다리는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나발니는 21세기 민주 투쟁의 빛나는 열사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방에서 위험에 처한 지구촌이다. 하지만 나발니는 러시아는 물론 중국이나 수많은 개발도상국의 독재 정권에 경종(警鐘)을 울릴 예정이다. 푸틴은 나발니를 살해함으로써 일시적 승리를 거둔 것이지만 동시에 십자가를 짊어진 영웅 나발니를 영원한 투쟁과 희생의 상징으로 치켜세웠기 때문이다.

 

거대한 국가 기구를 총동원하여 한낱 개인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으깨버리는 광경을 보고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때 전진하는 인민군의 탱크를 시위 학생이 온몸으로 막아서던 이미지처럼 나발니의 죽음은 21세기 독재에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순교자의 상징으로 빛날 것이다.

 

 

 

이미 민주주의가 정착한 사회에서도 나발니의 정신은 공익과 정치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든다. 희생은커녕 민의를 대변하는 일을 단순 직업으로 여기거나 정치를 통해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수많은 정치꾼은 나발니를 통해 조금이라도 반성할까. 불행히도 입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몸으로 이익만을 끌어안는 족속들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시민이 깨어나 최소한의 윤리적 정치를 요구하는 수밖에. 나발니는 생전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외쳤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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