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적 충격은 유럽의 안보질서를 뒤흔드는 효과를 낳았다. 중립주의 전통이 강한 핀란드와 스웨덴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핀란드는 1년도 걸리지 않고 신속한 가입에 성공했고, 스웨덴 역시 터키의 반대를 무마하고 이번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서 가입이 결정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500일을 넘겼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 전쟁을 ‘특별군사작전’이라고 명명했으나 실제 우크라이나 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큰 전쟁이다. 러시아만 보더라도 군인 가운데 사망자가 이미 4만~6만명 이상 발생했으며 1300여대의 탱크가 파괴됐다. 우크라이나도 다수의 사상자가 희생되었고 국토 상당 부분이 폐허로 돌변한 것은 물론 수백만명의 피란민이 국외로 피했다.
전쟁 초기 서방의 실수와 착각
80여년 만에 유럽에서 발생한 대규모 전쟁은 대륙의 지정학적 인식을 크게 바꿔 놓았다. 첫째는 군사적 차원의 충격이다. 유럽대륙에서 전통적 전쟁이 다시 돌아오리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소련 영국 프랑스 등이 핵무기를 개발했고, 냉전기에는 공포의 균형이 역설적으로 평화를 안겨주었다. 소련이 스스로 붕괴한 뒤 1990년대부터 유럽 대부분 국가는 미국의 핵우산에 기대 징병제를 폐기하고 국방예산을 점차 줄였다.
둘째는 정치적 차원의 오판이다. 서방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똘똘 뭉친 소련보다 개인 독재의 러시아를 가벼운 상대로 생각했다.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 자원을 팔아 독재자 푸틴과 주변 부패세력이 독점하는 체제, 기껏해야 부도덕하고 불편한 이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러시아가 국제적으로 보여준 행태는 예측이 어려운 깡패국가의 모습이었고,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질서의 핵심인 주권을 파괴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모험 세력의 모습이었다. 푸틴독재보다 공산체제가 더 안정적이었던 셈이다.
셋째는 경제적 차원의 착각이다. 서유럽은 경제협력을 통해 러시아의 공격성을 길들일 수 있다고 자만했다. 특히 독일은 동독을 향해 펼쳤던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통일을 얻었다고 믿으며 러시아에도 같은 정책을 확장했다. 사실 독일의 통일은 동독과의 경제협력보다는 소련의 붕괴 덕분이었지만 정책적 오해와 착각은 재생됐다. 유럽은 점차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 공급에 중독됐고 다수의 파이프라인은 이런 의존성의 상징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경제협력이 러시아의 공격성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침략의 야망과 능력만 키웠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넷째는 외교적 차원의 패착이다. 돌이켜보면 2008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부쿠레슈티 정상회담의 어정쩡한 결론은 큰 실수였다. 당시 나토는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에 대해 가입의 원칙은 확인하면서도 구체적 방식이나 일정은 제시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당장 추진하자고 주장했으나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를 자극해서는 곤란하다며 반대했었다.
러시아의 체면을 살려주고 입장을 배려하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는 외교전략은 독일과 프랑스의 기본 방향이었고, 전쟁이 터지던 지난해 2월까지도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접근법이었다. 결과적으로 21세기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반복된 외교적 배려는 전략적 취약함으로 인식됐고, 러시아가 전쟁을 불사하도록 부추기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동한 셈이다.
군사적 충격, 유럽 안보질서 뒤흔들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러시아 침공 이후 서방이 실수에서 교훈을 얻고 신속하게 변했다는 점이다. 군사적 충격은 유럽의 안보질서를 뒤흔드는 효과를 낳았다. 중립주의 전통이 강한 핀란드와 스웨덴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핀란드는 1년도 걸리지 않고 신속한 가입에 성공했고, 스웨덴 역시 터키의 반대를 무마하고 이번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서 가입이 결정됐다. 발칸반도 몬테네그로의 나토 가입이 무려 8년이나 걸린 상황과 무척 대조적이다. 나토와 러시아의 직접 경계선은 기존 800㎞에서 핀란드의 가입으로 이제 2배로 늘어났다.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안정을 추구하는 세력일 것이라는 정치적 오판도 수정됐다. 전통적 전쟁의 모험을 일삼으면서 여차하면 핵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하는 러시아의 위협은 유럽의 군사적 반응을 초래했다. 나토는 이제 전쟁이 발발하면 10일 안에 10만명, 그리고 30일 안에 30만명의 군인을 동원해 투입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4만명 수준에서 10배 가까이 늘리는 셈이다. 나치즘의 과거로 해외파병을 금기시하던 독일도 이제 리투아니아에 사단 수준의 4000명 병사를 배치할 계획이다.
경제적 미끼로 러시아를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오랜 착각도 폐기됐다. 유럽은 지난 500일 동안 러시아 가스와 석유의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국제시장에서 러시아산 원유 가격도 견제하고 있다. 당근은 내던지고 채찍을 든 셈이다. 나토 회원국의 국방예산도 급속한 증가세다. 2023년 이들의 국방예산 증가율은 평균 8.3%로 수십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탈냉전 시기 줄었던 국방예산이 다시 늘고 있으며 독일은 2024년, 그리고 프랑스는 2025년 국내총생산 대비 2%를 넘어설 예정이다. 오랜 기간 미국이 요구해 왔던 나토 회원국의 비용 분담 문제가 러시아 ‘덕분에’ 단숨에 해결된 모양새다.
우크라이나를 나토의 ‘대기실’에 무한방치했던 외교적 패착을 해결하는 과제는 아직 남아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외교적 해결에 희망을 걸고 푸틴을 만나 국제적 망신을 당했던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이제 제일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프랑스는 발트해 연안 국가나 폴란드 등 동유럽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신속한 나토 가입을 원한다. 반면 미국이나 독일은 전쟁 진행 상황이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집단안보체제를 규정하는 나토 헌장 제5조는 한 나라에 대한 침공을 모든 나라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조차 당장 나토 가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래의 가입을 확실하게 약속받기를 바란다. 따라서 서방의 고민은 우크라이나를 확실하게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러시아와 전쟁의 확산이나 심화를 방지하는 일이다.
유럽연합은 이미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가입 협상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게다가 터키는 스웨덴을 나토 회원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유럽연합으로부터 관세동맹과 무비자 여행 원칙을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충격적인 침공이 우크라이나와 터키를 유럽연합 편으로 강력하게 밀어낸 셈이다.
서방은 전쟁 초기 러시아에 확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대포 탱크 전투기 등 처음에 망설이던 군사 지원을 하나씩 추가로 제공하기로 했다. 최근 미국은 다른 나토 회원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집속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맞서 러시아는 벨라루스에 전술적 핵을 배치하겠다고 나섰다. 서서히 장기전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형국이다.
정치변화 무관하게 러시아 견제 추진 중
민주국가 연합체인 나토는 내년 6월 유럽의회 선거와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있다. 최근 러시아에서 일어난 짧은 군사반란으로 시간이 반드시 독재 러시아의 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줬으나 서방에서도 전쟁이 계속될 경우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유럽에서 친 러시아 성향의 극우가 부상하거나 반전세력이 고개를 들고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되는 시나리오다.
나토는 이런 변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다년간 군사지원 계획을 추진하려 한다. 10년 계획(2019~2028)을 결정해 실행하는 미국의 이스라엘 장기 지원책이 하나의 모델이다. 러시아를 서방의 주적(主敵)으로 제도화해 정치변화가 있더라도 계속 견제할 수 있도록 못박아 두는 방식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