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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일신문]유럽 민주주의를 공략하는 러시아

    • 등록일
      2023-05-15
    • 조회수
      143

유럽 민주주의를 공략하는 러시아

내일신문 5월 15일자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탈리아와 독일을 순방 중이다.

2년 차에 돌입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유럽 핵심 국가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크라이나 침략까지 독일은 러시아에 우호적인 동방정책의 나라였고, 이탈리아도 러시아 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유럽에서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러시아가 서방을 공략하는 방식은 입체적이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에서 드러난 군사적 폭력의 사용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다.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유럽연합(EU)에 동참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방이 개입하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확전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러시아는 또 아주 오래전부터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를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유럽 시민을 볼모로 잡고 겨울철 연료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는 협박 카드를 사용한 지도 한참이다.

러시아의 이웃 중·동유럽 국가들이 이런 위협에 특별히 취약하다.

군사나 경제적 위협만큼 가시적이지는 않으나 서방 정치를 조종하려는 시도도 무척 심각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가장 오랜 서방의 민주주의조차 러시아의 정치 조작에 노출되었으니 말이다.

러시아는 합법·불법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서방의 정치세력을 포섭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게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여론을 조작하여 민주주의 체제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프랑스의 프랑수아 피용,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은

모두 러시아와 연결된 스캔들의 정부 수반급 주인공들이다.

프랑스 극우파 마린 르펜이나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는 유럽 정계의 대표적인 친 러시아 인사들이다.

 

 

 

러시아는 솔직히 좌우를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의 기둥을 갉아 먹는 권위주의 세력들을 지원해 왔다.

헝가리에서 장기 집권하면서 러시아의 유럽 내 대변인을 자처하는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러시아 전략의 대표적 성공 사례에 속한다.

오르반은 국내에서는 헝가리 민주주의를 권위적 방향으로 이끌면서 유럽연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EU의 러시아 정책을 순화시키려고 목소리를 내왔다.

폴란드의 법과 정의당(PiS)도 헝가리의 오르반과 비슷하게 반(反)유럽적 성향을 갖고 있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완전히 태도를 바꾼 경우다.

 

 

 

체코나 슬로바키아도 반유럽 친(親)러시아 정권들이 한때 유럽연합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다가 최근에는 잦아든 경우다.

다만 슬로바키아는 오는 9월 총선에서 다시 러시아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우려가 실현된다면 유럽연합 안에서 헝가리와 슬로바키아가 러시아 대변 세력의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EU의 강경한 러시아 정책을 가로막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중부 유럽 비세그라드 그룹 국가(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는 모두 공산권에 속했던 경험이 있고

문화적으로 대부분 슬라브권이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확실한 서방 세력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여기도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하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나 스웨덴 등

전통적 중립국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선언했으나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중립주의를 고수하는 중이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정계, 언론, 재계 등에 다양한 촉수를 뻗쳐 친 러시아 정책을 도출해왔다.

2018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카린 크나이슬은 자신의 결혼식에 블라디미르 푸틴을 초청해 함께 춤도 추었다.

2019년 오스트리아 연정이 무너진 이유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부총리를 매수한 부패 스캔들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유기적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지 유럽의 정보기관들은 오스트리아와 협력하기를 꺼릴 정도다.

 

 

 

 

서방을 향한 러시아의 공략은 이처럼 종합적이고 집요하다.

특히 일부 약소국이나 극단주의 정치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지역에서 큰 힘을 발휘해 자칫 잘못하면

유럽연합의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러시아의 이런 총체적 능력은 공산주의 시절부터 서방을 향해 이어온 이데올로기 투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산주의의 실현이라는 건설적 목표가 이제는 민주 세계의 붕괴라는 파괴적 목적으로 대체되었지만 말이다.

아직 중국이 동맹 러시아처럼 서방 민주주의의 파괴에 체계적으로 나서지는 않으나 경각심을 늦춰서는 곤란하다.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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