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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일신문] 민족이란 미래를 향한 공동의 꿈(22.04.19)

    • 등록일
      2022-04-20
    • 조회수
      166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적 존재를 부정한다. 언어나 관습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가족의 일원이기에 큰 형을 따르듯 러시아를 추종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실제 우크라이나 언어는 슬라브 계통으로 러시아어와 유사하고 우크라이나 국민 가운데 30% 정도는 아예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어가 모어(母語)다. 대통령이 되면서 유창한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했다는 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일상에서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두 언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나라다.

 

종교적으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동방정교의 가족에 속한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이지만 11세기 가톨릭과 동방정교의 분립은 중요한 문화적 경계를 만들어냈다. 일례로 폴란드는 슬라브계 언어를 사용하나 종교적으로는 가톨릭 권이라 러시아와 결이 다른 민족 문화를 갖고 있다. 동방정교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이 15세기 이슬람 세력의 손으로 넘어가 이스탄불이 되자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제3의 로마’를 자칭했다. 분열이 많았던 기독교의 역사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동방정교라는 믿음으로 탄탄하게 엮인 집합이다.

 

지리적으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4백만㎢에 달하는 거대한 동유럽 평야에 속한다. 북극부터 흑해까지 뻗은 이 평야의 평균 높이는 해발 170m에 불과하고 제일 높은 지역이 불과 350m일 뿐이다. 한반도 수십 배에 달하는 거대한 평원은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등으로 나뉘어 있다. 푸틴의 눈에 한 민족이 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인 셈이고 지정학자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하나로 묶어서 보는 이유다.

 

미국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1990년대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를 통해 냉전 이후 세계는 문화적 대립이 강조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911 테러 사건과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서구와 이슬람의 대립 구도를 드러내며 문명 충돌론을 뒷받침했다. 헌팅턴의 관점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동방정교 문명권으로 뭉치거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 힘을 합쳐 서구 문명권에 대항해 가야 하는 운명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러시아 문화가 지배하는 동부와 서구 영향력이 강한 서부가 분열할 위험을 기껏 지적했을 뿐이다.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문화나 지역과 상관없이 우크라이나 국민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무기를 들고 침략군을 영토에서 몰아내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중이다. 2004년과 2014년 두 번이나 키이우 마이단 광장에서 민주 혁명을 이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다른 미래를 꿈꾸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시민은 푸틴이 지난 20여 년 동안 다져온 독재에 굴종하는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연합의 이웃 국가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민주 사회를 원한다.

 

게다가 푸틴은 2014년 크림반도 합병에 이어 이번 우크라이나 전격 침공을 통해 두 나라가 공유하는 문화적 기반을 완전히 깨뜨리면서 철천지원수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으로 떠올랐다. 우크라이나를 서구의 품으로 밀어 넣는 역사적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이번 전쟁은 19세기 프랑스 사상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민족을 만드는 힘은 혈통이나 언어, 종교 등 객관적 요소가 아니라 미래를 건설하려는 시민들의 주관적 의지이고 꿈이라고 르낭은 강조했다. ‘미래에 실현할 공통의 계획’을 위해 ‘고통을 함께하고 즐기고 기대하는’ 과정이 근대 민족을 만든다는 말이다.

 

“종족이 하나의 민족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듯이 영토 역시 민족을 만들지 못합니다. 민족은 토지라는 외형에 의해 결정된 집단이 아니라 역사의 깊은 분규의 결과로 생긴 정신적 원칙이며 영적인 가족으로서의 집단입니다.” 대포와 탱크를 앞세우는 세상의 침략자들이 되새겨야 할 말이다.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얻지 못하면 깃발이 휘날리는 폐허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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