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논의가 백가쟁명(百家爭鳴)식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합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독재자의 야욕부터 구(舊)소련이나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민족주의까지 언론과 학계는 다양한 요인을 제시한다. 전쟁이 일어난 원인의 분석은 당장 평화를 되찾기 위해 중요하고 장기적 미래에 이런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결정적이다. 진단이 처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위험하고 왜곡된 사고의 틀이 국제적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나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과 같은 저서로 대표되는 지정학적 사고다. 다른 하나는 존 미어샤이머의 ‘거대한 환상’(The Great Delusion) 류의 현실주의 주장이다. 강대국들은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다투는 본질을 갖기 때문에 상대의 권력과 영향력을 존중하지 않으면 전쟁과 같은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 미어샤이머는 다양한 기고를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주요 책임은 서방에 있다고 강조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동진(東進)이 러시아를 자극했고 바로 코앞에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유럽연합으로 끌어들여 포위하려 했기에 러시아는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설명이다.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에 대한 논쟁이 지루하게 이어질지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 사고하는 21세기 시민이라면 절대 수용하기 어려운 왜곡된 인식의 틀이다.
우선 이런 지정학적 시각은 철저하게 강대국 중심이다. 체스판이라는 표현이 잘 보여주듯 세계 정치는 강대국의 게임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필요에 따라 동원되거나 제거하는 말에 불과하다. 백번 양보해서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은 이런 시각을 만들어 세계 전략을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약소국은 강대국의 심기를 살피며 그들 게임의 충실한 말이 되라는 예속의 처방일 뿐이다. 우크라이나는 영원히 러시아의 종으로 살라는 운명적 낙인이고 한반도는 중국의 핵심 이익을 건드려서는 곤란하다는 명령이다.
게다가 이 같은 틀은 시대착오적이다. 지정학은 19세기 말부터 만들어진 ‘땅따먹기’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과거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세계를 놓고 경쟁하며 싸웠다. 하지만 유럽은 전쟁이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치명적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얻고 지난 80여 년 동안 국제 관계에서 무력을 추방했다. 전쟁의 대륙이었던 유럽연합 안에서 이제 전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야만적 수단으로 전락했고 인류는 한 단계 진보했다.
끝으로 이런 관점은 비민주적이다. 민주 또는 독재라는 해당 국가의 정치적 성격을 무시한 채 대등한 국제정치의 행위자로만 보는 태도는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부도덕하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우크라이나의 정부가 유럽연합에 가입하고자 하는 의지는 독재국가 카자흐스탄의 정부가 민중 봉기를 탄압하기 위해 러시아의 개입을 요청하는 행위와 본질이 다르다. 전자가 21세기 지구촌의 시대정신을 자연스럽게 반영한다면 후자는 국민을 국가의 부속물쯤으로 여기는 구시대적 사고의 표현이다.
물론 지정학이나 현실정치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영토와 깊숙이 뒤섞여 있고 러시아는 탈냉전 시기에도 여전히 최강의 핵 군사력을 자랑하는 강대국이다. 하지만 지정학과 레알폴리틱(realpolitik)이 진정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에 앞서 급부상하는 막강한 중국이 연해주를 러시아로부터 되찾아 와야 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현상의 설명에 사용되지만 동시에 미래의 세계를 그리는 도구다. 아무리 국력이 강한 강대국이라도 약소국을 침공하여 집어삼키는 일이 정상일 수는 없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어두운 제국주의의 과거로 시계를 맞추는 셈이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룩셈부르크나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 규모의 국가도 온전히 살아 숨 쉬는 세상만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거대 공룡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한반도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국제질서다.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