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세계의 대표적인 군사 강국이라면 유럽은 단연 지구촌 복지의 중심이다. “유럽은 세계 인구의 7%를 차지하고 있지만 25%에 해당하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며, 세계 복지 지출의 절반을 책임진다.” 얼마 전 퇴임한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즐겨 인용하던 대목이다. 인류의 7%가 50%가 넘는 복지 혜택을 누린다는 뜻이니 유럽인은 얼마나 복 받은 집단인가. 세계 군사 지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과 대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2020년 초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위기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초래했다. 부유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 총생산의 13.5%에 해당하는 13.8조 달러를 쏟아붓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 국내총생산의 13%에 해당하는 정부 지출의 증가가 이뤄졌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은 노동자와 가계에 직접 지원되었다고 국제통화기금(IMF)은 분석했다. 코로나 이전 시기 세계적으로 심각했던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때도 이 정도의 대규모 경제 자원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번 코로나 위기는 인류를 포괄적으로 공격한 보건 위협이었으며 동시에 복지의 폭발적 증가를 초래한 전환점이었다는 뜻이다.
당장 코로나로 인한 지출만 본다면 미국의 초대형 현금 분배가 가장 인상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시기에 미국 성인 대부분은 두 차례에 걸쳐 1,200달러와 600달러의 지원금을 받았고, 조 바이든 역시 취임 이후 국민에게 비슷한 규모의 현금을 나눠주었다. 유럽은 기존에 복지와 실업 보험 제도가 이미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코로나로 인한 지출 증가는 미국만 못하다. 또 유럽의 경우 실업자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보다는 일시적 휴가·해고처럼 기존의 직장을 유지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코로나 대응 방식에 있어 자유시장의 원칙을 중시하는 미국 모델과 사회적 보호를 강조하는 유럽 모델의 차이가 드러난 셈이다.
물론 유럽 내부에서도 커다란 차이점은 존재한다. 시민 복지 관련 사회적 지출 규모를 비교해 보면 아일랜드가 국내총생산의 13%로 가장 낮고, 프랑스는 31%로 가장 높다. 스웨덴의 사회학자 G.에스핑앤더슨은 1990년 복지국가의 세 가지 고전적 유형을 제시한 바 있다. 영국식 자유주의 유형,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보수주의 유형,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사회 민주주의 유형이 있다는 설명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복지국가의 세 모델이 모두 유럽에 있다는 점이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당시의 설명은 상당한 수정이 필요하다. 아일랜드는 영국을 능가하는 시장 중심적 자유주의 모델이 되었고, 프랑스는 사회 민주주의의 스칸디나비아를 넘어서는 거대한 복지국가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복지의 유럽이라는 등식은 여전히 유효하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안에서 많은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우선 스칸디나비아는 예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시장의 요소를 도입했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강한 복지와 유연한 시장을 결합하여 성공적인 신(新)모델을 만들어냈다. 정부가 세금을 거둬 직접 분배 및 재분배에 나서던 전통을 접고 시장의 자율성에 조정 기능을 맡기는 쪽으로 진화했다는 의미다.
예컨대 덴마크는 법적 최저임금이라는 제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굽는 단순 노동자가 시간당 22달러의 고임금을 받는다. 노동과 자본의 대표들이 만나 정부 개입 없이 자율적으로 임금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신 고용주는 언제나 자유롭게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해고할 수 있다. 말하자면 덴마크는 ‘노동자의 천국’이자 ‘자본가의 꿈’을 실현하는 모델을 만든 셈이다.
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적 복지 개혁에 대한 반성과 전환점도 발견할 수 있다.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정책은 복지가 게으르고 의존적인 노동계급을 만든다는 비판을 앞세워 소위 ‘생산적 복지’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빈곤을 증명하고 구직활동을 통해 노력해야 하는 조건부 복지 정책이 유행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시장 붕괴로 인한 대규모 실업의 발생은 개인보다는 경제 체제의 구조적 문제가 더 심각함을 일깨워주었다. 이번 코로나 위기도 개인의 책임과 무관하게 실업이나 빈곤의 타격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경험이었다.
일부에서 보편적인 기본소득제도를 주장하는 배경이다. 아직은 지역이나 선별적 집단을 중심으로 소규모 실험을 진행하는 단계다. 스위스는 2016년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77%가 반대함으로써 이런 극단적 아이디어는 유럽에서조차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 주었다.
변화 가운데 최근 두드러지는 경향은 유럽연합이 복지 강화의 깃발을 들고 앞장선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복지 정책은 유럽연합이 아닌 회원국의 몫이다. 코로나 위기는 EU가 복지에서도 정책 통합의 역할을 하는 데 공헌했다.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회복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 차원의 채권을 발행해 회원국을 돕겠다는 새로운 접근법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하다. 유럽 채권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독일이 이런 변화를 수용했다는 사실은 반세기 넘게 계속된 금기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7,500억 유로의 회복 정책과 기존 7년 단위의 1.1조 유로 예산을 합쳐도 그 규모는 유럽 전체 국내총생산의 2% 미만이다. 세금을 통해 금융 자원을 끌어모아 국민에게 분배하는 복지는 유럽보다는 여전히 회원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복지 정책은 오히려 새로운 원칙과 기준을 제안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난 5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럽연합이 ‘슈퍼 복지국가’가 되려고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럽은 2017년 스웨덴 예테보리 정상회담에서 ‘유럽의 사회적 기둥’을 만들겠다고 합의했다. 유럽연합은 정책 기둥을 통해 20여 개의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천명했다. 평생 교육의 권리나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2016년 영국이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유럽 탈퇴를 결정한 직후의 충격 속에서 내린 새로운 방향 설정이다. 2010년대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유럽연합은 시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강요하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브렉시트는 이런 부작용의 총체적 결과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시민을 ‘보호하는 유럽’의 이미지를 강화해야 했다.
물론 유럽연합의 복지 드라이브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나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유럽 집행위원회의 사회정책 간섭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함께 표명한 바 있다. 복지 정책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유럽이 너무 낮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자국의 높은 복지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킬 것을 우려한 결과다.
2020년대를 시작하면서 출범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는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럽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일례로 2030년까지 모든 성인의 60% 정도가 매년 직업 훈련을 받도록 하며 유럽연합 시민 가운데 빈곤층 1,500만 명을 줄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20~64세 인구의 고용 수준을 78%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도 정했다. 노동인구를 최대한 늘리는 것이 노인층에 풍부한 연금을 계속 제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70년이 넘는 통합의 역사는 유럽연합이 근사한 목표를 설정하고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데 빼어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실제 그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분야에 따라 약간 다른 평가를 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브렉시트와 코로나의 위기는 유럽통합을 ‘자본가들의 음모’가 아닌 ‘노동과 시민의 복지’에 봉사하는 운동으로 방향을 조정하도록 만들었다. 위기가 지나가도 이런 방향이 유지될지는 유럽을 넘어 지구촌 복지의 미래에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