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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7)] 태초부터 현대까지 세상을 바꾼 의류 변천사

    • 등록일
      2021-07-06
    • 조회수
      282

인류, 옷을 날개 삼아 지구 점령하다

중국의 비단, 실크로드 통해 문명 통합… 유럽 모직, 대항해 시대 기폭제
면직은 근대 산업혁명 이끌고, 현대엔 합성섬유 이어 바이오 복합천 등장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일어난 스타킹 반란. 전쟁 동안 살 수 없었던 스타킹을 다시 판매하자 백화점 앞에 줄을 선 여인들의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인간과 동물 사이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차이는 피부에 있다. 동물은 두꺼운 가죽과 털로 덮여 있으나 사람은 부드럽고 취약한 살갗에 털도 거의 없는 편이다. 만일 인간이 동물처럼 나체로 자연에서 생활해야 한다면 추위를 피해 따뜻한 지역에서만 살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기후만 해도 인간이 옷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초기 인류는 땡볕에서도 땀을 흘려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피부를 얇게 진화시켰다. 땀으로 체온을 조절하는 뛰어난 능력 덕분에 인간은 장기간 걷거나 달릴 수 있으며 노동에 몰두할 수 있다. 사람은 치타만큼 빨리 달리지는 못해도 40㎞가 넘는 장거리 마라톤을 뛰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게다가 도구가 문명의 세계를 열었듯 옷은 인류의 날개가 됐다. 목적에 따라 입고 벗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옷을 통해 인간은 기후 변화에 수시로 대처하는 맞춤형 피부를 장착하게 된 셈이다.

 

옷은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베리아부터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까지 인간의 활동 영역을 확장해줬다. 장기 간 자연에 적응해야 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의복을 통해 ‘전천후 카멜레온’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추우면 껴입고 더우면 벗어버림으로써 북극곰과 열대 기린의 환경에서 모두 생존하면서 지구촌 곳곳에 문명을 탄생시켰다.

 

옷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생리적 기능을 넘어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성경 창세기 3장 21절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면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다’는 내용이 있다.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되면서 알몸을 가리는 문화적 도구로서 의류가 등장하는 셈이다. 이처럼 의류는 출발부터 기능과 문화가 공존하는 복합 영역에서 탄생했다.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옷이 가죽으로 만들어졌듯 실제 사람이 수렵 채집시대 쉽게 구해 입을 수 있는 옷은 동물의 가죽과 털이었다.

 

비단, 인류를 통일한 최초의 사치품


▎12세기 송나라 작품인 비단을 검토하는 여인들. / 사진:위키피디아

주식(主食)에서 쌀과 밀의 문화가 나뉘듯 의류의 소재에서도 비교적 뚜렷하게 문화적 영역이 드러난다. 비단은 중국에서 개발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실크로드란 비단길을 뜻하는데 중국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라비아, 유럽으로 뻗어 나가는 고대 교역의 통로를 지목한다. 21세기 중국의 시진핑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사업이 현대판 실크로드로 불릴 정도로 비단과 중국 문화는 하나로 인식된다. 한국에서도 ‘비단 장수 왕서방’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중국의 민족 신화에서도 시조 복희씨는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기술을 사람들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비단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일 뿐 아니라 중국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단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등장한다. 주요 농작물을 언급하는 가운데 명주실은 신(神)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기술하고 있다. 서양 성경의 가죽옷처럼 동양에서는 비단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의미의 천인 셈이다.

 

명주실을 만들어내는 누에는 뽕나무 잎을 먹고 자란다. 비단의 주성분은 피브로인이라는 이름의 단백질이다. 누에는 섭취한 단백질의 60~70%까지 명주실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말하자면 누에는 자연이 보유하는 효율 만점의 제사(製絲) 기계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고대 중국인들이 자연의 누에를 활용해 실을 만들고, 그 실로 비단을 엮어내는 발명에 성공한 것은 문명사적으로 엄청난 혁신이었다.

 

비단을 만드는 명주실은 매우 얇다. 그만큼 정교하게 천을 짤 수 있다. 부드럽고 반짝이며 화려한 비단은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피브로인은 천연 방부제를 포함하는 천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가벼워 무역에도 적합한 상품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최초의 비단은 저장성에서 발견됐는데 4700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팔려나가 이미 고대 로마에도 비단이 전파됐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비단값의 급등 현상을 목격하고 비단 착용을 금지할 정도였다. 중국에서 로마까지 고대 세계는 이미 비단으로 연결돼 있었던 모양새다.

 

유럽 지역에서 직접 실크 생산에 나선 것은 상업 자본주의가 발달하던 16세기다. 베네치아나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고부가가치 산업인 실크 생산을 위해 기술을 도입했고, 이런 현상은 프랑스의 리옹 등을 거쳐 유럽으로 확산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명품 산업이 21세기까지 유지하고 있는 고급 실크 상품 생산의 전통은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중국이 아닌 프랑스로 건너가 고급 실크 생산 기술을 배워왔을 정도로 산업혁명 과정에서 비단 산업의 주도권은 유럽으로 넘어가 버렸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는 직접 프랑스에 가서 최신 제사공장을 참관한 뒤, 그 모델을 따라 일본의 비단 산업을 진흥했다. 그 결과 일본 총 밭 면적의 25%는 뽕나무가 차지하게 되었고, 심지어 1922년 일본 수출의 절반 정도가 생사(生絲)였다.

 

모직으로 유럽 자본주의의 싹이 트다


▎양이 나무에서 자라는 모습을 그린 14세기 그림. 면을 표현한 것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중국에서 출발한 비단이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됐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는 세계화의 경로를 그렸다면 모직은 유럽에서 발전한 전통적인 천이다. 모직의 재료가 되는 털은 동물에서 얻는데 양의 긴 털이 실로 짜기 적합해 대표적으로 사용된다. 모직 기술은 이미 고대부터 서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비단이 화려함의 상징이었다면 모직은 추운 날씨에 따뜻함을 선사하는 소재였다. 물론 두꺼운 가죽이나 털이 추위를 이기는 데는 더 적합했겠으나 모직은 가죽이 줄 수 없는 색다른 촉감과 부드러움을 선사했다. 모직은 유럽에서 중세 무역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에 의하면 유럽에서는 이미 13세기에 모직 생산을 위한 도·농(都農)간 협력 체제가 만들어졌다. 영국의 푸팅 아웃 시스템(Putting-out system)은 사업가가 농가에 재료를 공급한 뒤 농가에서 천을 짜면 구매하는 방식을 말한다. 영국이나 스페인 지역이 양을 키워 양털을 공급하는 주요 기지였다면,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는 집중적으로 모직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성장했다. 이런 시스템은 도·농간 협력을 촉진하는 것은 물론 유럽 차원의 국제적 분업체계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특히 모직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피렌체의 유명한 메디치(Medici) 가문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모직 산업과 은행업 덕분이었다. 피렌체의 모직 산업 노동자들의 조합 아르테 데라 라나(Arte della Lana)는 전성기에 3만 명 이상의 회원을 가졌고, 피렌체 인구 3분의 1이 모직 산업에 간접적으로 간여할 정도로 이 도시의 주요 산업이었다. 이들은 또 피렌체 정치를 좌우할 정도로 강력한 조직이었기에 1378년 ‘치옴피(Ciompi)의 난’을 주도한 바 있다. 말하자면 근대 사회주의 운동의 전형을 제공했던 셈이다.

 

모든 산업의 발전은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진다. 비단을 대량으로 만들려면 국토가 뽕나무밭으로 변하듯 모직은 양의 축산이 필수다. 유럽에서는 모직 산업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농토에서 농민을 쫓아내고 대신 양을 기르는 일이 빈번해졌다.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양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이야기는 바로 자본의 논리가 생존의 터전을 잠식하는 현상을 표현한 결과다.

 

모직 산업의 발전은 해양 문명을 발전시키는 기폭제도 됐다. 모직을 염색하는 데는 명반(明礬)이라는 매염제가 필요한데 주로 지중해 남동부에서 생산된다. 따라서 명반을 대량으로 영국이나 네덜란드까지 운반하기 위해 14세기 이탈리아의 제노바 상인들은 1000t이 넘는 대형 범선을 개발했다. 규모가 기존의 2~300t급 배보다 4배 정도 늘어난 것이다. 양의 목축은 영국의 제국주의를 통해 호주와 뉴질랜드라는 거대한 지역을 삼켜버렸다. 유럽에서 시작된 양털 생산의 필요가 대양주를 뒤덮었다. 제노바 상인들이 개발한 거대한 배는 국제무역을 넘어 세계를 누비는 군함이자 상선으로 발돋움했다. 지구적 자본주의 네트워크 형성에 모직 산업이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비단과 유럽의 모직이 자연스러운 조합을 이룬다면, 면은 인도를 대표하는 소재다. 실제 면은 아메리카의 페루 지역이나 동아프리카에서 독립적으로 개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를 하나로 묶는 면의 확산은 인도에서 시작했다. 인더스 문명은 제일 먼저 면직을 개발해 냈고, 면은 인도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됐다. 유럽 언어에서 면은 아랍어 쿠툰(qutun)을 따라 영어나 프랑스어의 코튼이나 꼬똥(cotton), 스페인어의 알고돈(algodón) 등으로 전해졌다. 독일어에서는 면을 바움볼러(Baumwolle), 즉 ‘양털의 나무’라고 부른다. 양털로 모직을 만들 듯, 면화는 양이 나무에서 자란다는 생각을 반영한 표현이다.

 

면화, 나무에서 자라는 양


▎18세기 얇은 모슬린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벵골 지역의 여인. / 사진:위키피디아

다른 천과 비교해 면은 뛰어난 장점을 많이 갖고 있다. 면은 비단이나 모직보다 흡수력이 탁월하다. 속옷이 주로 면으로 만들어지는 중요한 이유다. 또 빨래하기가 수월하기에 실용적이고 경제적이다. 대중이 면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또 염색이 쉬워 화려한 색상을 담는 데도 적합하다. 용도도 다양해서 단순한 손수건부터 최고급 드레스까지 모두 면으로 제작할 수 있다.

 

면화를 생산할 수 있는 지역은 양모와 비교했을 때 한정적이다. 양은 덥거나 추운 지역을 가리지 않고 키울 수 있으나 면화는 남반구 35도에서 북반구 37도 사이의 열대 혹은 아열대 지역에서 주로 재배할 수 있다. 게다가 면은 면화 재배와 수확 과정이 노동 집약적이고 면직을 만드는 생산 단계에서도 많은 노동력이 투입돼야 한다. 이런 특징을 볼 때 기후가 따뜻하고 인구가 많은 인도가 세계 면직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6세기 유럽 세력이 큰 배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누비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혜택을 누린 것은 인도의 면직물처럼 경쟁력을 가진 상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세계 자본주의 네트워크가 서서히 만들어지는 초기에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상품은 인도네시아의 후추나 중국의 도자기였지만, 인도의 면직물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일본의 영주 다이묘와 태국의 왕실, 페르시아 귀족부터 유럽의 부르주아 등 전 세계는 유럽 배들이 실어 나르는 인도 면직물에 열광했다. 21세기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명품을 사려고 전 세계 부자들이 몰려들 듯 16~18세기 인도는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천과 옷을 수출했다. 인도 북동부의 벵갈은 얇은 모슬린(Muslin)을 전문적으로 생산했고, 동부 해안 코로만델에서는 캘리코(Calico)나 친츠(Chintz)를 만들었으며, 서부 수라트에서는 다양하고 저렴한 면제품을 생산해 수출했다. 태평양의 일본부터 대서양의 유럽까지 세계 각지에서 쇄도하는 다양한 취향과 주문에 인도 산업은 재빠르게 적응하며 호응했다. 유럽이 주도하는 네트워크가 인도의 면화 재배와 면직 산업을 크게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비단이 중국의 한나라와 로마제국을 연결하면서 세계를 처음으로 통일한 사치품이었다면, 면은 최초의 세계적인 대중 소비 상품인 셈이다. 이미 1000~1900년 사이 면을 생산하는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는 최대 산업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지역의 모술과 바스라, 아프리카의 팀북투까지 면으로 천을 짜는 일은 대규모 산업을 형성했다. 유럽도 중세의 십자군 원정 때 서아시아에서 면을 접한 뒤 터키나 시리아 등의 지역에서 면 재료를 수입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볼로냐, 베로나 등지는 면직 산업이 조성됐고 베네치아는 면 원료의 유럽 창고 역할을 담당했다. 서아시아의 원료가 베네치아를 거쳐 이탈리아와 유럽의 다른 도시로 퍼져 나갔다.

 

지구 산업화 척도가 된 면직


▎1820년대 영국 맨체스터의 대규모 면직 공장. / 사진:위키피디아

모직 산업에서 형성된 푸팅 아웃 시스템을 면직 산업도 도용해 도농 협력이 이루어졌다. 독일 남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한스 푸거는 1367년 면직 산업에 뛰어들어 유럽 자본가의 전형으로 부상했다. 독일의 도시 울름(Ulm)에는 2000여 명이 전문적으로 면직 산업에 종사했고, 주변 농촌에는 1만8000여 명이 면을 짜는 노동에 동원됐다. 하지만 16세기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면서 유럽의 면직 산업에 심각한 충격이 가해졌다. 새 제국은 유럽으로의 면화 수출을 금지하고 직물 산업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질도 우수하고 가격 경쟁력도 갖춘 인도의 상품이 대서양을 통해 유럽으로 대량 도입되면서 유럽 산업은 잠식당했다.

 

영국은 아시아의 선진 상품을 대거 수입해 유럽에 판매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자국에서 이들을 모방해 따라잡으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도자기 분야에서 중국의 기술을 수입해 결국 추월하는 데 성공했듯이 면직 산업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육성했다. 특히 영국은 미국을 통해 새로운 면화 공급선을 확보했다. 18세기 말 영국은 미국이라는 식민지를 잃었지만,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면화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거대한 원자재 창고를 얻은 셈이 되었다. 노예무역으로 인한 국제적 비난이나 흑백 갈등으로 일어나는 국내 정치적 문제를 피하면서 값싼 원자재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미국의 면화를 영국에서 천과 옷으로 만드는 거대한 글로벌 분업체계가 자리를 잡는다. 18세기까지 세계 면직물의 고장은 인도였고, 중국이 뒤를 따르는 모양이었다. 이후 불과 100여 년 만에 대서양을 중심으로 미국 남부와 영국이 인도와 중국을 대체했다. 영국의 대표적 산업도시 맨체스터는 세계 면직 산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산업혁명에서 등장한 공장(Factory)이라는 근대의 장소는 면직 산업에서 만들어졌다. 증기기관을 통해 면화에서 실을 뽑아내는 작업과 실로 천을 짜는 작업은 공장의 대명사가 됐고, 인도에서 수레바퀴를 돌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모습은 전근대성(前近代性)의 상징이 됐다. 1860년 면을 기계로 뽑아내는 세계의 면 스핀들 가운데 3분의 2가 영국 공장에 있을 정도로 산업 집중도는 높아졌다.

 

면화 재배와 면직 산업은 미국과 영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점차 확산하면서 세계로 발을 뻗어 나갔다. 면직, 모직 등 소위 섬유산업은 산업화를 이행하는 모든 국가의 출발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 면직 산업은 영국에서 독일이나 미국, 일본으로 전해졌고 다시 한국과 중국을 거쳐 베트남이나 터키 등으로 옮겨갔다. 마치 지구 산업화의 리트머스 테스트라도 되는 듯 말이다.

 

부의 상징, 가죽과 밍크

 

비단이나 모(毛), 면 등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상징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누에와 양털, 식물 등 재료의 원천은 다양하나 기본으로 실을 짜내 씨줄과 날줄로 천을 만드는 생산의 과정은 유사하다. 동물을 잡아 가죽을 벗겨내 여러 용도로 사용하던 원시 시대의 기초적인 작업보다 한 단계 높은 문화 수준이다. 사냥으로부터 곧바로 가죽을 얻을 수 있는 방식에 비해 비단과 모, 면직은 인간의 집약된 노동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천을 화폐처럼 사용하게 된 이유다. 중국, 인도, 유럽 등 다양한 문명에서 천은 물건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기준을 제공했고, 심지어 국가가 세금을 거둘 때도 요긴한 가치의 저장고로 활용됐다.

 

직조는 남녀를 구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길쌈하는 남경여직(男耕女織) 분업 구조는 전통사회의 골격을 형성했다. 인도나 유럽에서도 직조에 노동을 제공하는 인력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푸팅 아웃 시스템에서 가내 수공업을 주로 여성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가장 오랫동안 가죽과 모피를 의류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했다.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에서 비단과 면이 고급 의류를 상징하게 된 이후에도 유럽은 중세까지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가죽과 모피를 즐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죽과 모피는 북방 유목민들의 상징이었고, 인도에서도 동물의 가죽은 더러운 오염을 의미했다. 유럽에서는 중세 후기부터 모직 산업의 부상과 함께 가죽에 대한 선호는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유럽에서도 가죽은 부자들의 신발이나 모자, 가방 등으로 용도가 제한됐다. 목도리나 모자 등에서 모피를 사용하는 것은 서양에 남아 있는 전통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부터는 북아메리카로부터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운 밍크가 시장에 등장하면서 고급 의류 소재로 모피가 다시 유행을 이끌기 시작했다.

 

동인도 주식회사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인도양 진출을 주도한 세력이었다면, 허드슨베이주식회사(HBC, Hudson’s Bay Company)는 영국의 캐나다 개발을 이끈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불도저였다. 인도양의 후추가 무더운 지역에서 나오는 고가 상품이었다면, 북극 지역의 밍크는 혹한의 땅이 주는 노다지였던 셈이다. 19세기 말이 되면 유럽은 아메리카의 밍크를 유럽으로 수입해 대량 양식하기에 이르고 20세기 유럽은 세계 밍크 시장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누에가 명주실을 생산하듯 철장의 밍크는 열심히 모피 생산을 위해 삶을 바치게 된 것이다. 21세기에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은 이제 모피의 주요 소비 시장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로 옮겨왔다는 사실이다. 서방에서 동물보호단체의 캠페인이 모피 소비를 위축시키는 동안, 경제발전에 성공한 동아시아는 부의 표상으로 모피를 착용하는 행렬에 대거 나섰기 때문이다.

 

일반 재료의 영역에서 나무나 돌, 철을 넘어 플라스틱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인공 소재가 등장했듯이 옷의 재료로 합성 섬유가 부상한 것은 20세기의 대표적 현상이다. 페트병에 담긴 물이나 음료를 마시는 일이 일상이 되었듯 합성 섬유는 기존의 천을 대신하며 인간을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합성 섬유를 개발해 의류에 도입한 것은 미국의 화학 대기업 뒤퐁사다. 1930년대 일명 나일론을 개발한 뒤 시장에 내놓으면서 인간의 의류 소재는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에 돌입했다. 가벼우면서도 질기고, 화려한 색상에 구겨지지도 않아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해 나일론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비단보다 아름답고 강철보다 강한 섬유, 나일론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들어진 거미줄보다 가늘고 비단보다 아름다우며 강철보다 강한 섬유’, 나일론을 소개하는 문구다. 그야말로 의류계의 기적이었던 셈이다. 스타킹은 나일론의 성공을 가장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유럽과 미국의 여성들은 원래 면이나 모직, 비단 등으로 만든 스타킹을 신었다. 그러나 면이나 모직은 두꺼웠고 비단은 비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치마 길이가 짧아지면서 스타킹이 대유행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저렴하면서도 아름다운 나일론 스타킹이 등장했으니 일종의 혁명이 일어난 셈이다. 1940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뒤퐁사는 스타킹 생산을 중단하고 군복이나 낙하산 등 군수물자 생산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난 1945~1946년, 뒤퐁사의 스타킹 공급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미국 각지에서 여성들의 불만이 터져 일명 ‘스타킹 반란’(Stocking riots)이 일어날 정도였다. 스타킹과 하이힐은 20세기 후반기 여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1960년 대가 되면 짧은 치마가 대유행하면서 스타킹과 가터벨트의 시대는 가고 팬티형 스타킹(pantyhose)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처럼 옷은 기능성이 최소화하면서 몸을 드러내는 문화적 기호로 변해갔다.

 

물론 기능성도 끊임없이 혁신을 거듭하면서 점점 편리한 복합 천들이 등장했다. 21세기 옷을 살펴보면 한 종류의 천으로 만든 경우가 드물 정도다. 면과 모직, 비단과 합성 섬유를 다양하게 조합해 보온 효과를 늘리거나 모양새를 살리고, 방수 기능이나 신축성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의류 소재 분야에서도 자본주의 혁신의 리듬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수천 년 전 인류가 누에고치를 관찰하면서 비단을 발명해 냈듯이 21세기 인간도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거미줄은 무척 단단해 방탄 천을 만들 수 있으나 거미들은 동족끼리 잡아먹는 습성이 있어 양식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인간은 급기야 생명공학을 통해 거미의 유전자를 누에나방에 이식함으로써 강력한 실을 생산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또 동물을 보호하면서도 밍크를 즐길 수 있도록 식물과 합성 소재로 만든 인공 밍크 목도리나 코트도 등장했다. 인간의 다양한 취향과 성향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정도로 빠른 혁신의 리듬이라면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을 탄생시키는 옷의 개발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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