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유로화는 인류의 희망
경향신문 | 2015-08-02
최근 그리스 사태를 비롯해 유로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빈번히 등장하는 표현이 ‘태생적 결함’이다.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문제나 장애를 안고 있어서 정상적으로 성장해 보통의 삶을 영유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혹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유로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화폐라고 단언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진단과 분석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유로의 태생적 결함이란 무척 단순하다. 서로 다른 재정정책을 가진 여러 나라가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기 때문에 불균형과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폐와 정치의 통합이 함께 가야 적절하다는 이론적 모델에 비추어 현실을 재단하려는 시각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시장은 하나가 되는데 정치통합이 없는 세계화도 ‘선천적 장애’를 안고 있으며, 하나의 국가에 여러 문화단위가 공존하는 다민족국가도 결함투성이 ‘불량국가’일 것이다. 왜, 누가 태생적 결함과 같은 폭력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정치통합은커녕 국제사회의 합의나 동의도 없이 달러가 독점적 패권을 누리는 국제통화 질서야말로 태생적 결함을 안고 있는데도 말이다. 두 번째 집단은 유로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권력을 확보하려는 정치세력들이다. 여기서는 유럽의 진보와 보수가 유로를 반대하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프랑스의 극우 민족전선은 프랑스가 유로에서 탈퇴하는 것이 경제의 살길이라고 소리친다. 그리스의 극좌 시리자 역시 독일이 지배하는 유로권 운영이 그리스 불행의 근원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외부의 적을 만들어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면서 증오의 목소리를 키우는 전략은 단기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성공의 미래를 준비하는 길은 아니다.
유로는 미국에 눈엣가시다. 유로는 기회주의적 정치세력에게 인기의 제단에 바치는 희생양이다. 그러나 유로는 여전히 인류의 희망이다. 미국 달러의 일방적 독주에 제동을 걸고 견제를 할 수 있는 다원적 통화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70년대 일방적으로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켰고, 그 후 반세기 가까이 세계는 미국의 통화정책 결과를 그대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이 유로를 만든 이유는 이런 불평등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덕분에 유럽은 미국 연준의 금리 인상에 크게 개의치 않고 독자적 양적완화를 시행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율성을 확보했다. 동아시아가 참고할 만한 교훈이다.
유로가 인류의 희망인 또 다른 이유는 대등한 국제협력과 통합의 모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로 덕분에 그리스나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와 같은 작은 나라도 유로 운영에 대한 모든 결정에 참여한다. 유로 이전에 소국은 물론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대국도 독일의 정책에 무기력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독일이 유로를 원치 않았고 다른 나라들이 화폐통합을 희망했던 이유다. 현재 메르켈이 유럽의 여제로 군림하는 것 같지만, 유로가 없었더라면 독일은 주변국의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원하는 통화정책을 폈을 것이다. 그리고 이웃 나라들은 목소리를 낼 기회도 없이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이야말로 유로의 경험에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입장이다. 유로에 대한 미국의 볼멘소리를 앵무새처럼 읊조릴 것이 아니라 급속한 환율변동의 파고를 막아주는 방파제로서 화폐 협력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경제 상호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안정적 환율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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