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그리스 위기, 이념 타령은 그만
경향신문 2012-06-17
주말에 프랑스와 그리스에서 각각 치러진 총선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프랑스 총선 결과는 지난달 새 대통령으로 취임한 올랑드의 유로권 성장 전략에 얼마만큼의 힘을 실어줄 수 있을지를, 그리스 총선은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정부 구성이 가능할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한국이 유럽발 위기의 진화와 향방에 촉각이 곤두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행히도 유럽 위기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쏟아내고 있는 시각과 해석은 지나치리만큼 정치적 이념 다툼으로 물들어 있다. 예컨대 2010년, 유럽위기가 확산되자마자 대통령을 필두로 한 한국의 보수 진영은 경제위기가 과잉 복지국가 때문이라는 타령을 늘어놓았다. 반대로 이번 상황에선 진보 진영이 위기의 주요 원인을 신자유주의 탓으로 규정하고, 강대국 독일은 오만한 가해자이며 약소국 그리스는 순수한 피해자라는 식의 이념적 프레임으로 덧칠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그리스의 위기는 과도한 복지국가를 지향하다 초래된 것이 아니듯, 과감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현한 결과로 생긴 것도 아니다. 통상 신자유주의란 경제사회 영역에서 국가의 개입을 차단하고 정부의 비중을 축소시키는 변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리스는 오히려 공무원 숫자를 꾸준히 증가시키면서 정부의 체중을 늘렸다. 또 국제금융시장에서 무분별하게 돈을 빌려 쓰는 무책임한 정책도 추구했다. 국제금융시장이라는 것이 신자유주의로 인해 확대되었고, 그 때문에 그리스가 그곳에서 큰돈을 빌렸으니, 작금의 위기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신자유주의는 위기를 허용한 배경일 뿐, 위기를 초래한 주체이자 원인은 국가를 방만하게 경영했던 그리스 정부와 정책이다.
다음으로 독일을 유럽 통합과 유로 출범의 최대 수혜자이면서도 그에 따른 책임은 회피하려고 하는 오만한 강대국으로 묘사하는 것도 명백한 오류다. 60년이 넘는 유럽 통합의 역사에서 독일은 지속적으로 통합의 비용을 부담했다. 유럽연합을 주변 지역에서 중심으로 부를 집중시켰던 과거의 제국과 달리, 중심에서 주변 지역으로 부를 이전하는 새로운 성격의 정치통합체로 부르는 이유다. 게다가 독일은 유로 출범을 바랐던 나라가 아니다. 자국의 강한 도이치마르크를 유지하려 했고, 지금도 자국만의 화폐를 가지기를 희망하는 여론이 강하다. 독일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경제적 지위는 유로 출범 이후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결과이며, 유로가 도입됐다는 사실 때문에 시장을 공짜로 차지한 것이 아니다.
끝으로 그리스를 유로권의 희생양인양 그리는 것도 현실 오도다. 그리스는 유로 출범 이후 위기 발생 직전까지 임금과 소득을 가장 많이 늘린 국가다. 달리 말해서 유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렸던 나라다. 다만 좋은 시절, 미래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소비를 하면서 나랏빚을 늘렸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그간 유로의 혜택을 그다지 누리지 못했던 포르투갈은 유럽의 지원에 대한 긴축 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이다. 아일랜드 역시 지난달 31일 국민투표에서 유럽이 요구하는 긴축협약을 60%의 찬성으로 받아들였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80%가 유로를 지지하면서 동시에 유럽이 제시하는 긴축안에 대해선 70%가 반대한다는 그리스 상황에 대해 유럽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다.
그리스의 만성 질환은 정치다. 사회당의 파판드레우 가문과 신민주당의 카라만리스 가문 등 좌우를 막론한 정치권력의 세습, 폐쇄적 엘리트 집단의 정경유착으로 인한 감세와 탈세, 정치적 지지자를 위해 비효율적 공직을 만들어 주는 악습,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벌이는 통계 조작 등은 그리스의 고질적인 병폐다. 국민을 무시하고 속이는 정치권의 자기 이익 챙기기가 나라를 수렁에 빠뜨린 그리스 사태는 12월 대선을 앞둔 한국 국민이 복지국가나 신자유주의 거대 담론은 잠시 접어두고 천천히 생각해봐야 할 사례다.
조홍식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