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영어 아닌 ‘제1외국어’ 선택권을
경향신문 2012-03-25
바야흐로 세계화의 시대다.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경제의 대외무역의존도는 G20 최고 수준이다. 한국은 이제 단일 민족이라는 획일성의 신화를 탈피해 다문화 사회로 향하고 있다. 지금 펼쳐지는 21세기형 세계화 경쟁 시대, 다문화 사회를 주도하려면 경제 발전뿐 아니라 정신적인 다양성과 창의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문화의 큰 축을 이루는 언어, 특히 외국어 교육에 있어서는 구태의연한 영어 독점 체제가 강화되는 모습이다. 대한민국 아이들은 왜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영어 학습에 ‘올인’하는 도박장에 투입되는 것일까. 영어는 우리 민족의 국어도, 공용어도 아니다.
정치적·법적·도덕적 근거를 찾아봐도 한국 사회가 영어를 제1외국어로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은 없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모국어를 되찾았지만, 동시에 영어가 미국 군정을 통해 관습적인 ‘필수’ 외국어로 은근슬쩍 침입하였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토론도 결정도 없이 무혈입성한 영어가 학교와 직장 등에서 모든 경쟁의 잣대로 군림하는 상황이다.
민주화 4반세기를 맞아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가 필요하다. 전 국민에게 영어만을 강요하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배울 수 있는 제1외국어의 선택권을 줘야 한다.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언어교육은 표준 국어 하나로 족하다. 영어를 배울지 가까운 이웃나라의 언어인 중국어나 일본어, 베트남어를 배울지, 아니면 더 멀리 프랑스어나 독일어, 에스파냐어를 배울지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이 될까. 민주주의 선진국치고 한국처럼 하나의 필수 외국어를 모두에게 강제하는 나라는 없다.
학생에게 외국어 선택권을 주는 교육은 인권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당연한 일이다. 축구가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다고, 전 국민에게 축구를 강요할 순 없지 않은가. 야구나 농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어릴 적부터 그 운동을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래야 결과적으로 다양한 종목에서 대한민국이 우수한 성적을 거둘 것이 아닌가.
이처럼 자유로운 선택과 다양성은 효율적이기도 하다. 미국은 세계 제1의 강대국임에 틀림없지만 중국과 일본은 각각 세계 제2, 제3의 경제대국이다. 우리와는 지정학적으로 운명을 떼어놓을 수 없는 이웃나라다. 또한 언어적 유사성으로 한국인이 초등학교부터 중국어나 일본어를 학습한다면 훨씬 빠르고 쉽게 능력이 향상한다. 대학생 정도면 원어민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준이 될 것이다. 다문화 사회의 통합에 있어서도 외국어 선택권은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외국 출신 아버지나 어머니의 언어가 학교에서 중시하는 교과목으로 부상한다면 그 아이들은 커다란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다문화 현실이 장애가 아니라 사회적 성공과 통합의 중요한 수단으로 돌변하게 된다.
외국어 교육의 다양성은 한국 유학생의 영·미권 편중 현상도 바로잡을 수 있다. 세계 유학 시장에서 미국보다 학비가 저렴하고 교육 경쟁력을 자랑하는 유럽연합은 130만명 규모로 세계 최고다. 그 가운데 프랑스가 25만명, 독일이 20만명인데 중국 유학생은 두 나라에 각각 2만명 이상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언어 장벽 때문에 진출하기 어렵다. 만일 초등학교 때부터 유럽 언어 교육을 받는다면 훨씬 수월하게 유학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높은 문화수준과 다양한 세계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강조하지만 여기서 제안하는 변화는 영어의 중요성이나 국제적 위상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의 외국어 교육에서 부당한 영어의 독재를 종식하고 다양성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교육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새누리당이 학생의 자유로운 선택을 확대하자는 제안에 찬성하리라 의심치 않는다. 교육에서 획일적 줄 세우기를 반대하고 다양성의 가치를 지향하는 민주통합당이나 진보세력도 환영하리라 굳게 믿는다.
조홍식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