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유럽정치공동체(EPC)라는 새로운 층이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EPC는 일상적으로 유럽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44개국을 총괄하는 모임으로, 유럽이라는 가족의 경계를 제공한다. 유럽연합과 그 준회원에 해당하는 나라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유럽은 다양한 층으로 이뤄진 케이크라고 볼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익숙한 층은 유럽연합(EU)이라고 불린다. 모두 27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탄탄한 집합으로 일부 영역에서는 국가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할 정도다. 유럽연합 안에서 가장 적극적인 20개 회원국은 아예 화폐를 하나로 묶어 유로권을 형성하고 있다. EU 위에 유로라는 복층을 만들어 지배하는 셈이다.
최근까지 유럽연합 밑부분은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유럽정치공동체(EPC)라는 새로운 층이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EPC는 일상적으로 유럽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44개국을 총괄하는 모임으로 유럽이라는 가족의 경계를 제공한다. 유럽연합과 그 준회원에 해당하는 나라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과 오래전부터 가입 협상을 벌여온 터키와 발칸반도 국가들(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 코소보), 그리고 가입을 강력하게 희망하는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전 그루지야)는 물론, 코카서스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까지 포함한다. 최근 탈퇴한 영국이나 EU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회원국 급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노르웨이 스위스 아이슬란드 등도 EPC에 참여한다.
우크라전쟁, EU 외연확대 움직임 가속화
지난 6일 스페인 그라나다에서는 유럽정치공동체의 제3차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44개국의 EPC, 27개국의 EU, 20개국의 유로권이라는 3층 유럽 케이크가 한자리에 모였다. 전쟁의 위협을 통해 EPC의 출범을 촉진한 러시아와 그 동맹 벨라루스만 초대받지 못했다. 터키나 아제르바이잔 정상은 직접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번 EPC가 유럽대륙의 거대하고 화려한 외교 무대였음은 확실하다.
이번 회담에서 국제뉴스의 초점이 된 안건은 유럽연합의 이주민 관련 협약이다. 유럽은 지난 2015년 난민의 대규모 이동으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올해는 2015년 이후 가장 많은 난민이 유럽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다시 난민위기가 부상하는 모양새다. 난민이 집중되는 지중해의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회원국은 지난 10여년 간 계속 난민 부담의 유럽 분산을 요구해 왔고 유럽연합은 최근 이주민에 관한 협약에 합의했다. 지리적으로 난민에 노출된 회원국의 부담을 다른 회원국들이 나눠 짊어지자는 약속이다.
다만 난민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중부유럽 회원국들은 그라나다 회담에서 새로운 이민 협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이주민 협약을 ‘법적 강간’이라고 비난했다. 폴란드의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총리도 새 협약은 ‘불법 이주자의 분배’를 위한 제도라고 비꼬았다. 폴란드나 헝가리의 반(反)이민, 반(反)난민 성향이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유럽연합의 정책 결정을 이처럼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언행은 27개국의 정책을 조율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전에는 유럽의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가치를 모두 공유한다고 천명해 놓고 막상 가입 후에는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행태를 보이는 헝가리나 폴란드의 이중성은 유럽이 회원국 확대를 포기하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었다. 유럽연합은 2013년 크로아티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이후 지난 10년 동안 신입 회원국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폴란드나 헝가리처럼 21세기에 가입한 회원국 입장에서 새로운 회원국은 기존의 재원을 가로챌 위험이 크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국가, 농업이 중요한 나라일수록 유럽연합 예산이 많이 배당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확대가 가로막힌 상황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우크라이나전쟁이다. 우크라이나나 몰도바, 조지아 등 러시아의 위협이 직접 가해지는 국가들을 유럽에 빠르게 흡수함으로써 공동의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폴란드나 루마니아, 발트 3국 등이 가장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주장하는 배경이다.
중·동유럽의 신입 회원국들로 골머리를 앓아 왔던 프랑스나 독일도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봄까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은 수십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제 우크라이나의 신속한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봄 마크롱의 유럽정치공동체 제안은 이런 정책 변화의 결과다. 프라하에서 시작한 EPC 정상회담은 몰도바의 키시나우 회담을 거쳐 이제 3번째 모임을 가졌고, 내년에는 영국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마크롱은 가입 협상이 너무 길어져 조바심을 내는 국가에 EPC를 통해 구체적인 가입 루트를 제시하겠다는 계산이다.
독일은 최근 프랑스보다도 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21세기 계속 누리던 유럽의 경제 기관차 역할이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독일 모델은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와 중국 시장으로의 수출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전쟁과 중국과의 거리두기 전략은 독일 모델의 시대를 마감했다. 따라서 유럽의 새로운 확대는 독일에 더 크고 안정적인 시장을 선사할 약속의 땅으로 보일 수 있다. 앙겔라 메르켈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집권한 독일의 연정도 발칸반도 국가들의 신속한 유럽 가입에 합의했다.
내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 회원국 모두의 걱정은 사실 2024년 미국 대선이다. 상당한 독자적 국방력을 자랑하는 프랑스를 제외한다면 유럽연합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구조다. 프랑스조차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매우 취약한 세력에 불과하다. 지난 임기 동안 도널드 트럼프가 보여준 외교·안보 분야의 변덕과 불확실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어우러져 유럽에 안보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유럽은 트럼프가 아닌 바이든행정부에서조차 미국의 독단적 정책으로 인한 폐해를 체험한 바 있다. 지난 202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을 결정할 때 유럽 동맹국들은 최후의 순간 일방적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동맹을 중시한다는 바이든정부가 이 정도라면 트럼프행정부의 잠재적 독선이 유럽인들에게 얼마나 불안하게 다가올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전쟁을 24시간 안에 끝내겠다”는 트럼프의 최근 발언은 심각한 협박으로 들린다.
유럽통합의 기관차라 불린 독일과 프랑스가 긴밀히 협력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유럽은 위기의 2020년대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두 나라의 관계는 매우 불안하다. 독일이 지정학적 위기를 맞아 ‘유럽의 환자’가 됐다면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잘 나가는’ 형국이다. 이처럼 대조적인 경제 상황은 양국의 협력을 촉진하기보다는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지난 주말 독일 바이에른과 헤세 지방선거에서 보듯 연정을 형성하는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이 모두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야당인 기독교민주당과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선거에서 선전함으로써 연정 내 불협화음은 더 커질 추세다.
유럽연합이 EPC 흡수할 수 있을지 관심
2023년 그라나다 유럽정치공동체 정상회담은 유럽이 놓인 기로를 압축 표현한다. 이주민 협약과 관련한 폴란드와 헝가리의 불만은 유럽이 넘어야 할 내부적 분열을 상징한다. 기존에 서로 다른 철학이나 국가 전통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은 지속적인 작업과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장기적으로 10개 가까운 새로운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흡수하려면 통합의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유럽이라는 층층의 케이크에서 가장 탄탄한 유럽연합이 바닥을 형성하는 EPC를 점차 흡수할 수 있을지가 21세기 유럽 지정학의 핵심적인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