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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22)] 파괴하는 전쟁, 축적하는 자본주의

    • 등록일
      2022-10-17
    • 조회수
      164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22)] 파괴하는 전쟁, 축적하는 자본주의

전쟁, 역사를 근대로 이끌다

중세 유럽 왕들, 전쟁 위해 상인들과 금융 가문 자금까지 동원했다 패배하면 파산하기도
전쟁이 발전시킨 민주주의와 징병제, 평등 이념 확산시켜… 세계대전 후 탈식민지화 가속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모스크바를 바라보는 나폴레옹.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국민 징병제를 통해 근대 전면전의 시대를 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자본주의란 생산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체제다. 반면 전쟁은 쌓아둔 재산을 파괴하는 활동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와 전쟁은 상반된 개념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전쟁이 초래한 피해를 복구하려면 평소보다 큰 노력과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 ‘자본주의란 창조적 파괴’라는 슘페터의 사회과학적 상식이 그대로 적용되는 상황이다.

 

막스 베버는 자신의 정치경제학을 집대성한 [경제와 사회]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둘로 구분했다. 하나는 힘을 사용해 상대방의 것을 빼앗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교환을 통해 평화롭게 주고받는 방법이다. 전자는 폭력을 동원한 정치나 전쟁으로 연결되지만, 후자는 시장이라는 제도를 통해 경제 영역을 형성한다. 그 결과 기초적인 정치와 경제의 구분이 만들어지고, 폭력과 교환의 세상이 분리된다.

 

물론 현실은 이런 개념적 구분과 달리 두 영역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 힘이 세거나 자신이 영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정한 교환보다 속이고 빼앗는 편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이나 사기의 유혹을 방지하려면 강한 폭력, 즉 정치와 국가가 필요하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질서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시장이나 교환체제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자본의 도시, 영토의 국가


▎1643년 로크루아 전투의 스페인 부대. 유럽에서는 16세기부터 영토 국가가 도시 국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고대 문명이란 정치와 종교와 경제의 권력이 집중된 시대였다. 이집트의 파라오부터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거쳐 중국 황제까지 위정자는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인 힘, 경제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통제하는 권력이었다. 경제가 독립적인 영역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매우 긴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뤄진 과정이다.

 

유럽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가 드러난다. 동아시아는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지적했듯 이미 2000년 전 진시황 때, 국가라는 확고한 제도를 완성했다. 국가가 종교·정치·경제를 포괄하는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중국 공산당은 종교를 지휘하고 경제를 주도하는 강한 국가를 이끌고 있다.

 

반면 유럽은 이미 중세에 정치와 종교가 구분돼 있었다. 독립적인 지휘 체계를 갖는 가톨릭 교회와 다수의 왕국, 공국, 도시 국가 등이 공존했다. 로마에 중심을 둔 교회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했지만, 정치 체제는 매우 작은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 정치는 왕족과 귀족이 지배하는 영토 국가와 상인이 주도하는 도시 국가로 구분할 수 있다. 유럽에서 왕족과 귀족은 명예를 중시하고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사(武士) 집단이다. 반면 상인은 이윤을 추구하며 자본을 축적하는, 합리적이고 계산이 빠른, 실리를 추구하는 집단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각 집단을 대표하는 두 종류의 국가가 성장했다. 한편에는 전쟁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프랑스, 잉글랜드, 카스티야(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의 영토 국가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무역으로 돈을 벌어 자본을 쌓아가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 도시 국가가 번성했다. 전자가 혈통을 중시하고 전쟁 능력이 뛰어난 왕족이 지배했다면, 후자는 무역으로 번성한 가문이 협력해 공동으로 지배하는 공화국 체제를 운영했다.

 

동아시아 역사를 기준으로 유럽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충격으로 다가오는 사실은 바로 군주들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외국에서 자금을 빌린다는 점이다. 국가가 자국민을 동원하고 세금을 거둬 전쟁을 치르는 동아시아적 개념과 전혀 다른 논리다. 잉글랜드나 프랑스 국왕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 피렌체나 제노바, 베네치아의 상인·금융 가문에서 자금을 동원했고 그에 대한 이자를 지불했다.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지출이 너무 많으면 종종 파산을 선고하기도 했다! 유럽 역사는 전쟁만큼이나 빈번한 왕실 파산으로 점철돼 있다. 달리 말해 유럽에서 전쟁은 국가가 ‘충성스러운’ 국민을 동원해 무력으로 충돌하는, 어느 정도 ‘성스러운’ 활동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비즈니스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투자한 만큼 자금을 뽑아낼 수 있을지 세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전쟁에 동원되는 군사력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용병(傭兵) 시스템도 일찍부터 존재했다. 가난한 산골 마을 출신의 스위스 용병부대는 계약에 따라 전투를 벌이는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원래 유럽에서 안트러프러너(entrepreneur)란 중세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을 가리키는 프랑스어였다. 이후 음악 단장을 지칭하다가 19세기가 되면 기업가를 부르는 용어로 돌변한다. 21세기 현재는 중세의 군대나 음악에 관한 어원은 완전히 사라지고 기업가라는 의미만 남았다.

 

영토와 자본이 경쟁하는 중세에서 승자는 더 넓은 땅을 지배하는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실제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왕실이 빈번하게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침공해 굴복시켰다. 영토는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중세 말기에는 기마병보다 보병이 전투에서 훨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영토 국가가 우위를 점하게 됐다. 경제적으로 표현한다면 노동이 자본보다 우세한 상황이 된 셈이다.

 

민족국가와 군대의 대중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한 리버티 본드 포스터. 금융 동원 능력은 역사적으로 전쟁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16세기 유럽에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유럽 국가들은 더 많은 배를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 노동력은 물론 목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거대한 해군으로 바다를 누비던 영국은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 석탄 개발에 나섰다. 18세기 말 함포 72정을 장착한 중형 함선을 만들려면 100년 이상 자란 큰 떡갈나무 3000그루, 즉 15헥타르(15만㎡, 4만5375평)의 숲이 필요했다. 함선을 만들기 위한 군비 경쟁으로 유럽의 숲이 모두 파괴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은 왕들이 지배하는 영토국가를 넘어 민족국가 시대를 열었다. 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주권재민의 원칙을 확고하게 선포함과 동시에 전쟁 비즈니스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왕들의 전쟁을 넘어 국민의 전쟁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시민이라면 당연히 무기를 들고 국방에 나서야 한다는 ‘시민-군인(Citizen-Soldier)’ 모델이 등장했다. 수십만 시민을 동원한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를 막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징병제가 확산했다. 프로이센은 1806년 프랑스에 패한 뒤, 철저하게 징병제를 도입한 대표 사례다.

 

물론 유럽도 나라마다 문화적 차이는 있다. 자유의 나라 영국은 징병제의 강제성이 자원병 제도보다 열등하다고 여겼다. 영국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애국심을 발휘해 군대에 지원해야 도덕적 우월성을 유지한다고 믿었다. 실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초기 5주 동안 영국 시민 48만 명이 군대에 자원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1916년까지 장기간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자 더는 자원병을 동원하기가 어려워졌고, 이때부터 영국도 징병제를 도입했다.

 

중세 유럽의 안트러프러너는 작은 규모의 부대를 경영했다. 하지만 근대 국가가 되면서 수십만 또는 수백만 규모의 시민 군대를 운영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시작된 징병제는 20세기 들어 영국이나 미국, 일본이나 러시아 및 소련까지 확대됐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정치가 독립하고 경제 분야가 정치에서 분리된 상황에서 전쟁 비즈니스라는 영역 또한 새로운 자율적 시스템으로 등장하게 된 셈이다.

 

중세 유럽의 왕들은 도시 자본으로부터 돈을 빌려 전쟁을 치렀다. 국제정치와 금융의 밀접한 관계가 일찍 형성된 모양새다. 왕조가 근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금융과의 관계도 변모하게 됐다. 금융시장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쉽게 자금을 빌릴 수 있었고, 국제관계에서 전쟁을 치르거나 동맹국을 끌어들일 때 우위를 점하게 됐다.

 

‘영구 국채’를 동원하는 영국

 

암스테르담 금융시장의 발전은 네덜란드가 17세기 세계를 지배하는 군사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자본주의 발전의 모태로 여겨지는 주식회사 제도는 암스테르담에서 동인도주식회사(VOC: VereenigdeOost-IndischeCompagnie)의 형식으로 1600년경 출범했다. 이 회사는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동방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은 군사 집단이다.

 

이에 질세라 런던에서도 영국판 동인도주식회사(EIC: East India Company)가 비슷한 시기에 발진했다. 네덜란드 회사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는 동안, 영국 회사는 인도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마치 일본의 도요타나 중국의 화웨이, 한국의 현대자동차가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해 지배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유럽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출범이 제국주의와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은 프랑스와 세계 각지에서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면서 금융 제도 발전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1694년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경제 발전보다는 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출범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 ‘영구(永久) 국채’를 발행해 원금 상환 걱정 없이 이자만 지불하는 금융혁신을 이뤘다.

 

18세기 중반 영구 국채는 콘솔(consol)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세계 금융의 가장 신뢰할 만한 자산으로 등장했다. 20세기 미국 국채(treasury bond)가 세계 금융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이미 영국의 콘솔이 개척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178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국채 수준은 비슷했으나 프랑스는 영국의 2배에 달하는 재정 부담을 져야 했다. 금융 제도와 시장의 차이로 유럽 자본가들이 프랑스보다 영국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한 나폴레옹 전쟁은 영국의 자금력과 프랑스의 병력 동원 능력의 대결이었던 셈이다.

 

산업혁명과 전면전의 시대


▎미국 캔자스 위치타의 보잉 공장, 폭격기 B29 생산 라인. / 사진:위키피디아

산업혁명은 경제 분야뿐 아니라 전쟁도 획기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걸어서 이동하던 군대는 기차를 타고 신속하게 대규모로 이동하게 됐다. 소총은 기관총으로 대체돼 군대의 파괴력은 놀랍게 커졌다. 이후 대포, 탱크나 장갑차, 전함, 비행기 등의 등장은 무기 생산력과 경제력이 전쟁의 결과를 결정하는 변수로 등장했음을 알렸다.

 

경제적 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대표적 사례는 미국의 남북전쟁이다. 남부는 전쟁 기간(1861~1865) 동안 10억 달러를 지출했는데 그중 40%만 세금과 채무로 충당하고 나머지 60%는 무작정 화폐를 찍어냈다. 그 결과 남부 지역 인플레이션은 4년간 92%에 달했다. 반면 북부는 23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그중 60%를 관세나 국채 등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자금 동원 능력의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셈이다.

 

산업 능력도 북부가 우수했다. 전쟁 초기 철도 길이는 북부가 3만5500㎞였고 남부는 1만4500㎞였다. 북부의 공장 수는 11만 개에 달했지만 남부는 1만8000개에 불과했다. 전쟁 기간 북부는 170만 정의 총을 생산했는데 남부는 생산량이 거의 없어 초기에 보유한 총으로 전쟁을 치렀다.

 

20세기 전반기를 피로 물들인 두 차례 세계대전은 사회 전체를 동원하는 남북전쟁의 불균형을 국제적 차원에서 재현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독일과 영국의 금융은 큰 차이를 드러냈다. 전쟁 중 독일은 6개월 단위의 단기 국채(kriegsanleihen) 발행에 의존했지만 영국은 장기 국채를 동원해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에 자금을 지원했다. 나중에는 미국까지 가세해 ‘자유 채권(liberty bonds)’으로 연합 세력의 전쟁 비용을 담당했다.

 

전면전 성격이 점차 강화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국 정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경제를 총체적으로 지배했다. 이미 계획경제 체제를 갖췄던 소련은 말할 나위도 없고, 나치 독일 역시 국가가 국민소득의 70%를 통제하는 상황이었다. 자유주의 영국도 국가 경제의 55% 정도를 정부가 관리했다. 미국 정부는 1944년 국민총생산의 42%를 전쟁 지출에 쏟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비중이지만 워낙 경제 규모가 커 절대 액수는 최고 수준이었다.

 

소련은 전쟁을 치르지 않았음에도 군비 경쟁으로 경제가 무너져버린 사례다. 핵무기가 등장해 미국과 소련은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피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군비 경쟁에서 소련은 무릎을 꿇었고, 1990년 해체의 길을 걸었다.

 

학자들은 국가 간 관계를 설명할 때 주로 영토의 변경이나 경제적 득실을 따져본다. 하지만 오랜 기간 유럽 역사를 탐구한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치렀다(War made the state, and the state made war)”고 말했다. 국가가 전쟁을 치른다는 기존의 전제에서 벗어나 전쟁을 통해 국가라는 존재가 탄생한다고 봐야 한다는 의미다.

 

전쟁, 사회를 바꾸다


▎핵무기 실험 장면. 절대적 파괴 무기가 등장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시대로 돌입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전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근대성은 국가만이 아니다.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물론, 금융도 상당 부분 전쟁의 필요에 따라 발전했음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군대 조직과 징병제는 평등 이념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봉건제 사회에서 무기를 지니는 권리는 무사 계급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징병제는 국민 누구나 총칼을 들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남성들이 징집돼 전쟁을 치르는 동안, 후방에서 공장을 가동하는 주역은 여성이었다. 이를 계기로 남성이 없어도 경제 활동은 지속하고 제품도 생산되며 세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20년대가 되면 여성의 권리가 대폭 증진되면서 투표권이 확산된다. 이런 역사적 변화는 성 평등과 전쟁의 관계를 증명한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식민지 인력을 군대에 동원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인력을 전쟁에 동원해 ‘총알받이’로 활용했다. 전쟁이 끝나자 목숨을 담보로 하는 ‘혈세’를 바친 식민지 주민들은 독립을 주장했고, 20세기 중후반 탈식민화 바람이 몰아쳤다. 이는 전쟁의 장기적 결과라고 봐야 한다.

 

전쟁의 목표는 인간의 평등이나 해방과 무관했다. 하지만 국가의 명운을 걸고 벌이는 다급한 위기 속에서 전통은 무너지고 혁신과 변화가 나타났다. 이런 사회 변동은 예기치 못했던 결과들을 낳았다. 가장 불평등한 조직이라 여겨진 상명하복의 군대, 파괴적인 전쟁이 평등한 민주 사회와 자본주의를 도래하게 한 주춧돌이 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2000년 전의 로마 정치인 키케로는 “전쟁의 핵심은 무한한 돈(nervosbelli, pecuniaminfinitam)”이라고 지적했다. 근대사는 키케로의 진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전면전이건 냉전이건 장기적 경쟁에서 경제력과 전투력은 비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매번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21세기는 몇 가지 구조적인 변화와 트렌드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중국의 부상이다. 국내총생산으로 비교했을 때 중국은 미국을 2014년 구매력평가기준(PPP)으로 따라잡았고 2020년대에는 명목상으로도 추월할 기세다. 중국은 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구도 미국의 4배 이상이다. 경제력까지 미국을 앞선다면 사실상 세계 최강 군사세력으로 부상할 기반을 갖게 된다. 실제 중국은 군사적 근대화를 중요한 목표로 삼고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21세기 전쟁의 새로운 양상

 

다만 분쟁이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런 경제력을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거 나치 독일이나 제국주의 일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막상 전쟁이 터지면 해당 국가의 자체 능력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동원하는 금융 분야의 능력과 우방을 끌어들이는 외교적 역량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은 여전히 세계 금융을 좌우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보다 강력한 동맹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안보와 관련된 또 다른 트렌드는 민주 사회에서 전쟁 중에 희생되는 인명(人命)에 대한 민감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군사대국이지만 사상자를 극소화하기 위한 전략을 펴고 있다. 이는 미국이 압도적 군사력을 지녔음에도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철수한 중요한 이유다. 미국을 비롯한 민주 세력의 군사력이 향후 점점 기술과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2001년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인 알카에다의 9·11 테러 충격은 긴 역사 속에서 분리돼온 종교와 군사와 경제를 하나로 다시 묶어버렸다. ‘알라의 분노’를 빙자해 소수의 광신 테러리스트들이 군사 대국 미국 국방성 펜타곤과 미국 경제를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마천루를 타격했기 때문이다. 유럽과 서방에서 종교·정치·경제 등 각자의 영역으로 분리돼 발전해온 역사는 단 한 번의 대형 참사로 순식간에 동시 호출됐다. 축적과 파괴, 자본주의와 전쟁의 복합적 관계는 여전히 서로 얽매여 진화하는 중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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