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그리스는 ‘피해자’가 아니다
경향신문 | 2015-07-05
그리스 국민의 선택에 세계의 눈이 쏠려 있다. 그리스는 지난 5년간 유로의 운명을 결정할 태풍의 눈으로 주목을 끌어왔다. 2010년 세계 경제위기가 유럽의 재정위기로 전이되자 한국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대통령을 위시한 보수 논객들이 복지국가가 그리스 위기의 주범이라고 소리쳤고, 나는 5년 전 이 칼럼에서 복합적 현실을 제멋대로 축소하고 왜곡하는 편파적 시각을 비판했다. 지난 1월 그리스에 좌파 시리자 정권이 들어선 뒤 이번에는 진보의 입장에서 국제 채권단을 비판하면서 그리스 정부와 국민을 주요 피해자로 규정하는 편향적 논리가 등장했다. 하지만 보수건, 진보건 정확한 분석의 출발은 현실이어야 한다.
우선 오늘 그리스의 국민투표는 상식적 민주주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정부가 국제협상을 망쳐놓고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뒤늦게 국민을 불러내 열흘 만에 해치우는 국민투표는 비정상이다. 민주주의는 단순 다수결이 아니라 토론과 숙의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투표 질문의 내용이 너무 기술적이고 복잡하며, 국제 채권단이 이미 거둬들인 제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황당한 선택지다. 그리스 치프라스 총리는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이 이겨도 유로존 탈퇴는 없다며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유로존의 모든 주요 리더는 투표 결과에 따라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가 결정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선택은 민주주의를 빙자한 포퓰리즘의 도박이고 감정싸움이다.
다음은 국제 채권단에 대한 비난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전통적으로 개발도상국에 적용한 신자유주의 정책 패러다임의 오류는 비난할 수 있다. 또 그리스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가장 큰 요인은 1981년 유럽연합(EU) 가입이다. 유로가 출범한 2000년대 그리스는 10여년의 호황을 누렸다. 이 과거는 모두 생략하고 지난 5년의 긴축만을 언급하며 유럽을 억압과 착취의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리다. 그리스는 호황기에 충분한 경쟁력을 키우지 않고 빚으로 잔치를 벌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끝으로 유로존 이탈이 그리스 경제를 부활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크루그먼과 스티글리츠 등 미국 진보 경제학자들의 주장인데 이는 역사나 현실, 국제사회의 역학을 무시한 경제학적 근시안에 불과하다. EU의 그리스 처방이 너무 긴축적이라는 이들의 비판은 경제적으로 의미가 있고 유효하다. 하지만 이 처방이 잘못됐다고 유로존 이탈이 그리스에 번영을 가져오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리스 경제와 국민을 심각한 파탄에 빠뜨릴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은 그리스에 경제발전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정치를 민주주의로 안착시켰다. 유로존 탈퇴로 인한 경제파탄은 정치·사회적 혼란을 가중하고 좌우 세력의 극단적 충돌을 초래한다. 극우 폭력세력 황금새벽이 활개 치는 그리스에 관광 갈 사람은 없다. 그리스에 지친 유럽은 당분간 이 나라를 외면할 것이고, 유럽에서 이탈한 그리스는 지중해의 레바논이나 튀니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불안정한 개발도상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의 국민투표가 유로존 유지·탈퇴와 같은 명확한 선택에 대해 충분한 토의를 거쳐 진정한 민주적 결정의 방식으로 치러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외세와의 대립 프레임으로 성급하게 민족 자존심을 부추겨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세력의 도박이 그리스의 비극으로 종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한국 진보의 목소리가 뜨거운 가슴 못지않은 냉철한 이성의 균형적 시각을 견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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