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흔들리는 ‘메르코지’ 체제
경향신문 2012-02-27
2010년 봄 유럽의 재정위기가 세계경제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한 이후 이를 관리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유럽에서는 새로운 통합의 정치가 등장했다. 유럽 전체를 하나로 묶는 소위 범(汎) 유럽 정치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도 유럽 변수가 국내 정치를 좌우한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90년 영국 대처 총리의 사임에는 그의 이념적 반(反)유럽주의에 대한 보수당 내부의 반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유럽 정치가 떠오르는 듯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메르코지(Merkozy)’의 등장이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 이름을 섞어 만든 ‘메르코지’라는 표현은 양국의 지도자가 실질적으로 유럽 재정위기 관리를 독점하면서 부상한 표현이다. 유럽이 27개 회원국으로 확장되면서 다소 빛이 바랬던 독일과 프랑스의 쌍두마차가 다시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 일종의 유럽 차원의 권력 집중 현상이다.
‘메르코지’ 지도체제는 유럽 전체의 재정정책과 위기관리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회원국 국내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2011년 가을 그리스의 파판드레우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도박을 벌였다가 메르켈과 사르코지의 압력에 결국 국민투표 계획을 접고 사임했다. 그리고 중립적인 관료 출신의 파파데모스 위기 관리 내각이 들어섰다.
유로권의 제3대 경제세력인 이탈리아에서조차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실각시킨 것은 ‘메르코지’ 커플이었다. 이탈리아에서도 교수 출신의 몬티 위기 관리 내각이 등장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권력 독점 현상에 대해 유럽에서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은 자신이 소외된 데 대해 강력한 불만을 표명했고, 일부 소규모 국가들은 독·불 지도체제가 비민주적이며 위기 해결도 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를 포괄적으로 평가할 때 권력 집중이나 남용에 대한 비판보다는 유럽 전체의 정치적 단결의 필요성이나 공동 해결책의 모색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기회로 작동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유럽의 재정 통합 계획에 반대했던 영국은 외톨이가 됐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 회원국이지만 단일화폐 유로는 유보했던 스웨덴이나 덴마크 같은 국가들이 모두 독일과 프랑스 편으로 재정통합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또한 위기 과정에서 ‘메르코지’ 체제의 외부적 압력으로 인해 정권 교체가 이뤄진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여론도 과도한 재정긴축에는 항의하지만 새 정부를 더 신뢰한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새해 들어 ‘메르코지’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S&P사가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강등시킴으로서 쌍두마차의 한 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5월의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사르코지의 재선 가능성이 낮게 평가되면서 유럽의 정치적 불안 요소가 강화됐다. 이에 메르켈 총리는 공개적으로 사르코지의 재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프랑스 국내 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지난 2009년 사르코지가 메르켈을 지지해 준 데 대한 답례다. 게다가 여론 조사에서 사르코지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있는 사회당의 올랑드 후보가 메르켈이 공들여 만든 유럽 재정긴축계획을 재론하겠다고 나선 것도 중요한 이유다. 또한 올랑드는 메르켈이 반대하는 유럽 차원의 유로본드에 호의적이다. 내년 총선을 준비하는 메르켈의 입장에서 올랑드와 자국 야당인 사민당의 유로본드에 대한 같은 입장은 껄끄러운 사안이다.
결과적으로 독일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좌우 대립각이 형성된 모양이다. 이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통합이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올봄 프랑스 대선 정국에서 ‘독풍(獨風)’이 어떤 역할을 할지 두고 볼 일이다.
조홍식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