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 과학사를 통해 본 과학의 발전 과정 –
토마스 쿤의 저작 「과학혁명의 구조」는 대중에게 익숙한 책이면서, 동시에 낯선 책이다.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과학이 기존의 주류 과학을 의미하는 정, 그리고 기존 규칙에 대한 의문에서 생겨난 반, 그리고 그 패러다임 경쟁 끝에 새로운 주류 과학으로서 생겨난 합으로 이루어짐을 배웠다. 또 그 합이 다시 정이됨으로써 생겨난 ‘정반합’의 순환에 대해서도 대부분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난 뒤 느낀 점은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과학의 성격과 그 발전에 대한 신화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과학 교육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토마스 쿤은 과학사를 통해서 과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반화의 한계를 염두에 두도록 하자). 먼저 저자는 과거의 지동설이나 플루지스톤 이론(죽은 시체를 태울 때 오히려 그 재의 무게가 늘어나는 현상)등의 과거를 ‘비과학적’이고 ‘패러다임’의 개념을 이야기해 봐야 한다. 과학에 있어서 패러다임은 명확히 설명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그 모호함은 오늘날 교과서에서 ‘당연한’것으로 이야기하는 그 모든 것의 총체가 바로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이는 방대한 규모를 가지며, 우리의 사고방식과 경험 및 실험을 세우고, 무엇을 규명해야 할지를 설명한다. 다시 과거의 ‘과학적 행위’들을 비과학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주제로 돌아가 보자. 토마스 쿤의 이해에 따르면, 오늘날의 시각으로 과거의 행위가 과학적인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심지어 4원소설을 주장하는 고대 아테네의 과학이라도 말이다. 오늘날의 패러다임과 당시의 패러다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고하고 규명하며 중요하게 발견해야 할 문제가 서로 다르고, 그렇기에 발생하는 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늘날의 패러다임은 교과서를 통해서 전파되는데, 저자는 이를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 세계관의 차원으로 이야기하며 보통 이 패러다임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패러다임이 세워지기 이전, 즉 초기의 과학은 어떠하였는가? 저자는 당시의 과학이 행하는 ‘사실수집’의 과정이 오늘날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작위적인 활동’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전기에 대한 역사에서 비벼준 유리 막대에 끌려왔던 왕겨가 다시 튕겨나가는 일 등은 전기의 작용에 대한 패러다임이 생성되기 오래 전부터 발견되어 온 현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경험적 자료의 선택, 평가 그리고 비판을 허용하는 이론적 및 방법론적 신념이 서로 얽힌 최소한의 함의된 본체’가 없이는 그 작용이나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는 패러다임이 없이는 과학이 한 방향으로의 깊이 있는 탐구를 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저자는 당시의 과학을 ‘정성적定性的’ 과학이라 설명한다. 이는 수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다. 뉴턴역학은 ‘단위 거리에 있는 두 단위 질량을 가진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우주 어디에서나 일정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 힘의 성격을 이야기할 뿐 어느 정도의 힘이 작용하는가를 명확히 법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정량적定量的’ 과학은 정성적 과학이 패러다임으로서 자리매김한 뒤 그것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난제를 풀고, 그 패러다임을 조금 더 명확히 규명한다. 이를 통해 해당 패러다임은 그 위치를 공고화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를 ‘정상 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표현한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연구와 기여는 이 정상과학의 안에서 벌어지며, 대부분의 실험 역시 패러다임을 확실시 하는 데 투자된다. 뉴턴 역학의 경우도 줄의 연구와 같은 수량화를 통해 법칙을 명료화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과학은 귀납적인가? 이 말은, 과학이 과거로부터 실험과 이론을 통해 현상을 분석하고 쌓여 옴으로써 하나의 법칙을 만들어내면서 발전해 왔다는 기존의 인식에 대한 물음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다<="EN-US"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background: #ffffff; letter-spacing: 0pt;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 mso-ascii-font-family: 맑은 고딕">, 이론, 실험설계 등을 했기 때문이다. 즉, 반대로 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량적 증거들을 통해 규칙으로 나타나게 된다.
과학의 혁명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현상을 이론이 잘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의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토마스 쿤이 내린 결론은 칼 포퍼가 이야기한 것처럼 오류입증에 의한 검증이 아니라, ‘사실입증’에 의해서 과학 혁명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오류입증과 사실입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유무이다. 과학혁명은 옛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리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기존의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의 제시만으로는 기존 패러다임을 흔들지 못한다. 옛 것에 비해 보다 적합하고 간결한 새 패러다임이 갖춘 심미적인 호소력이 소수의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채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초기의 패러다임은 정성적인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초기 패러다임을 문제 해결에 의해 제공되는 증거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채택의 과정은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 즉 새 패러다임이 당면한 다수의 주요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과 신념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설득력이 있다면 더 많은 논증이 추가될 것이고, 보다 많은 과학자들을 끌어들여 새 패러다임에 기초한 실험, 기기, 논문, 서적 등의 수효가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새 패러다임은 점차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고도의 전문적인 연구로 진행되며, 초기 패러다임의 등장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쉽게 이해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정량화 및 전문화를 통해 일반 대중은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상과학화 되기 시작한다면, 이에 대한 기존 패러다임 지지자들의 저항이 없을 수 없다. 이 저항자들을 비논리적 혹은 비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가 또한 우리가 너무도 쉽게 낙인찍었지만, 과학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evolution-from-what-we-do-know)가 아닌 알고 싶어 하는 것을 향한 진화(evolution-toward-what-we-wish-to-know)이다. 또 부득이하게 서평의 부제에서 ‘과학의 발전’이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과학의 발전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했던 명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학을 객관적 진리의 파악이라는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 과학 연구의 진일보는 당장 코앞의 미래에 가장 걸맞은 과학적 패러다임을 찾으려는 노력이었을 뿐이다. 이는 저 먼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앞밖에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가장 안전한 길 같아 보이는’곳으로 발걸음을 계속 옮겨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덧붙여서, 사회과학도라고 해서 자연과학에 눈과 귀를 닫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과 그 패러다임에 대한 토마스 쿤의 심도 깊은 연구는 사회과학에서도 일부 통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점차 전문화, 정량화 되는 경제학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다른 이유로는 아무리 사회과학을 전공으로 삼을지라도 학문을 편식하는 사람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이 복잡하고 어려워 보일지라도, 세계를 보는 또 다른 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THE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