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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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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설명

 

포퓰리즘

  

오늘날은 대중정치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언론과 미디어 매체들이 매일같이 정치적 이슈를 전달하고 있고 그와 함께 수많은 정치인들이 미디어 매체를 활용해 이미지 정치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선거에서 이기는 것을 중시한 나머지 선심성 공약을 마구 남발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런 대중 영합적인 포퓰리즘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저자는 포퓰리즘을 일컬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라고 말한다. 이는 개념은 있는데, 그에 꼭 맞는 실례가 없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포퓰리즘은 다양한 역사적, 지역적 사례가 있다. 이 모두를 명쾌히 설명할 단 하나의 포퓰리즘의 개념을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다만 저자는 포퓰리즘의 주요한 특성 두 가지를 분석함으로써 포퓰리즘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인민에의 호소선동적 정치인에 의한 감성 자극적 정치이다.

  

민주주의는 정치를 인민에게 기속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통치자인 소수 엘리트들과 주권자인 인민의 격차가 커지고, 인민의 의사가 소외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포퓰리즘은 이러한 현실에 힘입어 등장한다. -US”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background: #ffffff; letter-spacing: 0pt;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pt; mso-ascii-font-family: 맑은 고딕”>, 이분법적으로 정치를 인식한다.

  

포퓰리스트들은 다수 인민의 주권이라는 인민 민주주의의 편을 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하지만, 그 속내는 사실 모순된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선동가라 이야기한 것처럼, 포퓰리즘은 개인적 이득을 위해 인민의 편인 척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구체적인 계획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 동기는 제도권 내에서의 성공에 불과하다. 때문에 포퓰리스트들은 개혁을 주장하지만, 정작 집권 이후에는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퓰리즘과 인민민주주의 옹호자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민의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표방하는 가치는 인민 민주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민주주의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둘은 구분된다. 첫째, 인민은 명분일 뿐, 실제로는 카리스마를 앞세운 지도자가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규정과 절차, 통상적 관행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로 이성적 토론이 배제되고 감성적 정치 선동이 만연하게 된다. 넷째로 민주적 자유와 대치되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시민과 시민, 집단과 집단 사이의 정치적 대화와 합의보다 지도자, 혹은 다수 시민에 의한 다수결주의로 귀결된다. 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민주적 다원주의와 배치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개혁을 통해 노동자의 지위를 상승시켰던 것처럼, 포퓰리즘이 때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민이 다수인 이상 민주주의가 시대의 대세가 되는 것은 불가역적인 흐름이지만, 온전히 인민의 의도대로 흐르는 정치는 결국 폐단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토크빌은 민주사회가 결국 고귀한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 평등을 중요시하고, 평범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정당한 평등보다 남을 자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저급한 평등을 더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가들이 정신을 소중히 여기고, 인민의 변심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인민의 전면적인 정치 참여를 제한하려 했다. 밀은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가져야 하는 것모두에게 같은 발언권이 주어져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눈앞의 이익만 보며 사는 무식한 사람과 공동체와 자유, 정신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같은 발언권을 준다면 민주주의는 물질적 이기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 자유주의자들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논의가 있어 왔다. 이들은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인민의 지배는 이를 위한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한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법에 의한 지배를 통해 인민의 무제한적인 의사가 법에 의해 저지될 여지를 남겨두는 방안을 선호한다.

 

저자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내재적인 긴장에서 포퓰리즘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포퓰리스트들은 대중과 유리된 지식인과 정치꾼 그리고 기득권을 비판하며 인민의 주권 회복을 호소한다. 소외된 다수에게 이익을 돌려주겠다는 민주적 명분을 등에 업은 만큼, 포퓰리즘의 파괴력은 단순한 대중영합적인 감정 정치로 치부될 수 없을 정도다.

  

캐노번은 정치를 인간 삶을 구원. 즉 인민이 소외되는 환경적 측면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내적인 긴장 또한 포퓰리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결핍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이 봐야 한다.

  

포퓰리즘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석유 비축 자금을 풀어 기름값을 내려주겠다는 정치인의 선심성 공약에 미국인들은 호응하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는 예처럼 인민의 깨어있는 의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높은 수준의 고결함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유를 사회 전체의 발전과 연결시키고, 자유와 책임감 사이의 긴장을 파악할 정도만 되어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 언론과 시민 단체들의 역할이 중대하다. 또 한편으로, 포퓰리스트들이 주장하는 인민 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대중의 참여와 전문가의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포퓰리즘은 단순한 대중영합적인 사기꾼들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내재적 한계 및 현대 민주주의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일반 대중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정신적 가치보다 개인적·물질적 이익의 달성이 정치참여의 목적이 되는 오늘날의 행태 또한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THE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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