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작위가 쌓여 예의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것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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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작위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은 본성과는 다르다는 것으로, 앞서 설명했던 작위와 본성의 구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예의라는 것은 성인이 만들어낸 것으로 ‘작위’이고, 작위가 쌓여 인간의 악한 본성을 누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이 본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제도와 법의 중요성이다. 만약 모든 인간이 작위로 하여금 성인의 본성을 가질 수 있다면, 언젠가 법이란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인간의 본성은 변함없이 악(惡)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예로써 다스려야 한다면 제도와 법의 중요성은 가히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 가지 더 찾아볼 수 있는 순자의 논리는 ‘누구나 다 악하지만 예를 통해서 교정할 수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우임금이 우임금으로서 존경을 받은 까닭은 그가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중략) 길거리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 수 있는 자질이 있고, 모두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 그들도 우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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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장에서 순자는 ‘길거리의 모든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하여 앞서 주장했던 인간의 본질적인 ‘악’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논리에서 전환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로 우임금이든 길거리의 소인이든 모두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같은 본성에서 시작해 우임금은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고 행했기 때문에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며, 나머지 길거리의 소인들은 그럴 능력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인으로 남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누구나가 다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만, 이것은 누구다 나 성인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이에 대해 순자는 ‘되지 못한 것과 될 수 있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797)’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길거리의 모든 사람에게도 우임금과 마찬가지로 어짐과 의로움과 올바른 법도를 ‘알 수 있는 능력’, 즉 ‘지(知)’가 존재하며, 그 때문에 모든 이들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성인이 되지 않은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이가 곧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되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번약(繁弱)과 거서(鋸黍)는 옛날의 좋은 활이다. 그러나 활을 바로잡아 주는 활도고리가 없다면 스스로 올바르게 될 수 없다.”
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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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마지막으로 활과 활도고리의 예를 들며 훌륭한 스승과 좋은 벗의 역할이 중요함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순자의 성악설이 단순히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관계론)’임을 나타내는 부분으로 보인다. 만약 인간의 본성이 다른 존재와는 전혀 상관없이 계속해서 악하다면 좋은 친구나 훌륭한 스승이라 한 들 그것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을 통해 ‘악을 선으로 이끌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순자는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 관계론적인 측면에서 강조되어야 함을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순자는 “지금 좋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면, 곧 그가 듣는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일일 것이며, 그가 보는 것은 더럽고 음란하고 사악하고 이익을 탐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중략) 주어진 환경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순자 저, 김학주 역, ⌜순자(2008)⌟, 을유문화사, P804)”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순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았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성인이든 소인이든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사악하고 이익을 좇으며 음란하다. 이러한 본성은 결코 다른 것으로 바뀌거나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성인들이 만들어낸 ‘예의’라는 작위를 통해 악한 본성의 교화(敎化)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지(知)’를 가지고 있으며, 성인 또한 그것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오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비록 인간의 본성은 틀림없이 악할지라도 예치(禮治)를 통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에 덕치(德治)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내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바른 이해
이렇게 본다면 순자의 성악설은 틀림없는 ‘존재론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양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관계론적 사고’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만약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데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다. 따라서 순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인성론이 아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순자의 성악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인성론이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순자의 학문을 대변하는 예(禮)와 제도(制度)를 이끌어내기 위해 성악설이라는 전제를 구성했다는 해석이다. 순자가 살던 시기는 전국시대로 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했던 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순자는 인(仁)보다는 예(禮)를 강조하기 위해 천명론에 근거한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 아래 두었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가지겠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불변한 본질’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통한 인성의 교화’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실천적 인성론이라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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