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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인의 오류?

신경림 시인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나온 자신의 시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했다. 신경림 시인뿐만 아니다. 최승호 시인 또한 자신이 쓴 시에 대한 문제를 다 틀려서 뿔이 났다. 뿔이 난건 비단 한국의 시인들만이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 말기 이탈리아의 사상가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관이었던 마키아벨리는 흔히 ‘현실 정치 이론가’,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오늘날의 자신에 대한 평가를 마키아벨리가 본다면 분명 그도 뿔이 날 것이다. 그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그의 저작 중 하나인 ‘군주론’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많은 저작 중 ‘군주론’ 하나만을 보고 그를 ‘권모술수의 대가’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쩌면 ‘시인의 오류’보다 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를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신영복 선생님은 ‘강의’라는 책에서 “사회경제적 배경은 사상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도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언급하셨다. 마찬가지로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도 마키아벨리를 잘 이해하기 위해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통해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세밀히 묘사하며 그 시대 속의 마키아벨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를 보는 것이 곧 르네상스를 보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유 없이 관직에서 쫓겨난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인근 산장에서 두오모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에게 쏟아 부었을 들끓는 분노를 생각하며 그의 생애를 쓰리라 마음먹었다”고 적었다. 그녀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애정이 이렇듯 각별해서일까?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시작부터 읽는 이로 하여금 15세기 이탈리아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착각을 들게 한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보았는가.’로 마키아벨리가 태어나기 전의 이탈리아 반도의 상황을 설명하고, 정치에 입문하기 전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일들이 다루어진다. 제2부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하였는가.’에서는 1498년 28세의 나이로 제2서기국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피렌체의 외교관으로서 동분서주 보낸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제3부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생각하였는가’에서는 반메디치파로 몰려 관직에서 쫓겨난 뒤 ’군주론‘을 비롯한 저술들을 쓰며 이탈리아와 유럽의 정세에 대해 숙고하던 정치사상가로서의 활동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음흉한 권모술수가가 아니었다. 그는 엉뚱하고 늘 유쾌한 남자였다. 도리어 역사상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다. 그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점이었다. 한 가지 예로 마키아벨리는 용병제가 판을 치던 당시에 국민개병제를 주창했다. 애국심을 가지지 않은 채 돈만 써서는 절대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이상주의자로 비쳐졌던 그의 주장들은 오늘날엔 당연시 여기는 현실이 되어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서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마키아벨리가 권모술수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며 그 자신을 불운하게 했다.


 1513년에서 1527년까지는 마키아벨리가 실직한 후부터 죽을 때까지의 기간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대로라면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생각했는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마키아벨리가 본의 아니게 글 쓰는 사람이 되어 버린 시기로 후세에 그의 이름을 깊게 새기는 문제의 저작들이 나오는 시기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때의 마키아벨리를 ‘정략론’이나 ‘군주론’을 통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친구 한 사람과 주고받은 왕복 서한을 바탕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글 쓰는 사람에게 있어 그의 작품은 그 사람의 에센스가 결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산 몸의 상태를 들여다보는 데는 최적의 대상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글 쓰는 사람이 누가 자신의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을 변용도 하지 않고 그대로 쓰겠는가?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몸을 정제한 다음, 옛사람들이 있는 옛 궁정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고, 그 음식물, 나만을 위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점지 받은 음식물을 먹는다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 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말일세. 그들의 세계에 전신전령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겠지.”


 정치에서 멀어져 있던 마키아벨리에게 ‘사는’ 계기를 마련해준 이 서신왕래에 나온 한 구절이다. 이 외에도 이 시기의 마키아벨리를 보면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 유력자에게 자기 저서를 바치고, 외국에 대사로 나가 있는 친구에게 일자리의 알선을 간청하는, 새 환경에 의적하게 자적하지 못하는, 위대한 사상가의 통념과는 거리가 먼 우리들 속물에 더 가까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를 두고 마키아벨리의 연구자들이 이 시대의 그를 불행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동시에 행복하고, 행복한 동시에 불행하다는 따위의 불행이 아니었을까?


 

당신은 당신의 친구를 사랑하십니까?

최근 들어 마키아벨리를 근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선구자로 보는 해석이 많아지면서, ‘군주론’보다는 ‘로마사논고’가 그의 진정한 대표작이라는 견해, ‘군주론’은 사실 메디치의 환심을 사기 위한 책이 아니라 군주의 악덕을 풍자하려는 책이었다는 주장 등도 나오고 있다. 중요한 점은 오늘날 마키아벨리를 긍정하는 사람이던 부정하는 사람이던, 그가 근대 정치사상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키아벨리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한 것 또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책의 마지막 ‘시오노 나나미’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독자 여러분, 이 책을 다 읽고 나신 지금, 여러분에게도 마키아벨리가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본인이 어떤 답을 내릴지 궁금한가? 당신은 정치는 다 썩었다면서 마키아벨리즘을 언급하고 있는 분인가? 그렇다면 내 친구 마키아벨리와 당신을 위해서 이 책을 한번 꼭 권해드리고 싶다.

THE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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