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틴과 트럼프가 만드는 유럽 군사 통합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1월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불과 두달이 지났는데 유럽은 존재의 위기를 느끼는 충격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80년 동안 유럽은 미국에 안보를 송두리째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9년 출범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미국과 유럽을 하나로 묶는 군사 및 정치 동맹의 상징이었다.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나토 집단안보체제의 핵심인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제5항을 약화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안보 비용을 제대로 부담하지 않는 회원국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당해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식의 발언도 했다. 신뢰가 생명인 안보동맹에서 미국이 쌓아온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행태다.
실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중단시키겠다며 트럼프정부가 드러낸 정책은 우크라이나에 양보의 부담을 지우면서 침략국 러시아의 비위를 맞추는 형식이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을 독재자라 부르는가 하면 그를 백악관에 불러놓고 세계 언론 앞에서 망신을 주면서 압박하는 모습은 유럽 모든 지도자에게 충격을 안겼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모두 ‘패싱’하고 러시아와 먼저 협상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유럽과 맺어진 민주주의 정치 동맹이나 제1차 세계대전부터 100년 넘게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함께 투쟁한 역사 동맹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미국은 제국주의 러시아와 수구세력 사우디아라비아 영토에서 회담을 가졌다.
트럼프 취임 후 존재의 위기 느끼는 유럽
트럼프의 미국은 또 러시아와 동맹이라도 맺은 듯 유럽이나 우크라이나를 적처럼 대했다. 대표적으로 유럽 뮌헨 안보회의에서 미국 부통령 J.D.밴스는 유럽의 문제는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유럽 내부에 있다며 유럽을 비난했다. 유럽의 극우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유럽 사회는 이민·난민의 유입으로 오염되었다는 백인 우월주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트럼프 2.0의 시기에 유럽이 그나마 충격을 딛고 신속하게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비전을 보여준 정치인들 덕분이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는 유럽에 닥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협력할 것이고, 힘을 합쳐 대응하는 협력의 집합이 바로 유럽의 뼈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2020년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미국의 돌발적 배신은 유럽의 안보와 정체성을 위협하는 큰 위기다. 그러나 유럽은 모네가 시작한 70년이 넘는 통합의 경험과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
‘위대한 프랑스’를 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샤를 드골 대통령도 요즘 부쩍 자주 언급된다. 그는 미국이 언젠가는 유럽을 떠날 것이라며 유럽이 자체적인 방위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냉전 시기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여 군사적 독립을 추구한 배경이며 유럽이 지금 안보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 핵 능력에 기댈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국방비 증액에 적극 나선 독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첫 임기부터 ‘드골의 뒤를 이어 유럽이 안보 분야에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마크롱은 이미 2019년 나토가 뇌사(Brain death) 상태라고 선언했으며,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안보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는 작년 총선에서 패배함으로써 국내 정치적 기반은 크게 약화했으나 지정학적 지각변동의 와중에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펴면서 비전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모네와 드골, 그리고 마크롱은 프랑스가 유럽을 주도하는 비전에 충실한 편이라면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독일 국방 장관 출신으로 프·독 균형을 잡아주는 리더다. 폰데어라이엔은 제1기에 이미 공동 채권으로 유럽 재정을 동원해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십을 보여준 바 있다. 작년 임기 5년의 집행위원장 연임에 성공한 뒤 경험과 권위를 바탕으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추진할 적임자 가운데 한 명이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브렉시트로 이미 유럽에서 나가버린 영국을 다시 협력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가장 적극적인 지원자를 자임해 왔고 프랑스와 함께 정전 이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파병도 고려하는 중이다.
영국은 특히 프랑스와 함께 유럽의 양대 핵보유국으로 향후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에서 중심축이 될 나라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적대적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좌충우돌의 미국에 맞서 기존 국제 질서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2월 총선에서 승리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도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에 큰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유럽 안보에서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주의와 독일·영국이 지향하는 대서양주의가 대립해 왔다. 앞서 소개한 영국에 이어 이제 독일도 더는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며 유럽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아직 메르츠는 총리 취임 이전이지만 이미 사민당과 정책 방향에 대해 합의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여기서 두가지 전환이 특별히 중요하다.
하나는 유럽의 가장 커다란 경제 규모를 가진 독일이 국방비 증액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다. 이를 위해 독일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건전 재정의 틀을 깨고 국방비 증액과 관련해서는 적자 운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독일은 2009년 이후 재정 적자를 국내총생산 대비 0.35%로 제한하는 강력한 헌법 조항이 있었으나 이를 풀기 위해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럽 차원의 방위 정책에 능동적으로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프랑스의 핵우산을 유럽 차원으로 확대하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총리에 취임하기 이전부터 조율과 협상에 나섰다. 러시아의 위협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가운데 미국의 핵우산이 사라진다면 독일과 유럽은 프랑스나 영국의 핵우산이라도 확보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판단에서다.
위협적인 푸틴과 불안정한 트럼프 사이에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의제는 이제 수면으로 치솟아 올랐다. 물론 유럽이 독자적인 방위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아무리 정치적 의지가 강하더라도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지가 없다면 전략적 독립은 불가능하다.
유럽은 경제적으로 미국이나 중국의 성장 능력에 한참 뒤처진다. 게다가 냉전 이후 국방비를 워낙 줄였기에 급격하게 다시 복원하기는 매우 어렵다. 게다가 방위 능력 강화에 대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핀란드, 폴란드나 발트해 연안 국가 등은 적극적인 편이지만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 여론은 여전히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역내 강대국들의 리더십 역할이 결정적이다. 다행히도 마크롱, 메르츠, 스타머는 모두 전략적 자율성의 필요성을 공유하면서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유럽연합도 집행위의 폰데어라이엔이나 에스토니아 출신 EU 외교·안보 고위대표 카야 칼라스를 중심으로 유럽의 방위 통합을 주도하고 있다.
유럽 전략적 자율성 확보에 5~10년 걸려
물론 냉전이 종결된 이후 30년 넘게 미국에 의존하면서 뒤처진 국방 능력을 단숨에 회복하기는 어렵다. 유럽이 어느 정도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려면 5~10년가량 중기적 투자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유럽은 1950년대 유럽방위공동체 조약을 통해 군사 통합의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합의했으나 비준 과정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다.
장기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럽은 70여년 만에 방위 독립을 실현하는 기회의 창이 열린 셈이다. 푸틴과 트럼프가 유럽 군사통합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