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정상회의와 인공지능 지정학
이번주 파리에서 열린 인공지능(AI) 행동 정상회의는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첨단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EU)이 벌이는 치열한 지정학적 경쟁의 무대였다. 최근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하면서 AI의 가능성을 보여준 챗GPT가 미국이 이 분야에서 선두주자임을 증명했다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유사한 기능을 선보인 중국의 딥시크는 후발주자의 경쟁력을 드러냈다. 중국이 미국의 갖은 첨단부품 수출금지에도 불구하고 이런 효율적 AI를 만들어낸 사실은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파리 정상회의는 AI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유럽도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출 작품이다. 마크롱은 프랑스도 AI 경주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며 1000억유로가 넘는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미래의 공장’인 데이터 센터들을 프랑스에 유치함으로써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즉시 발표한 5000억달러 규모의 ‘스타게이트’와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프랑스의 1000억유로는 미국의 5000억달러보다 큰 액수라고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말이다.
유럽, 미국 중국 사이에서 제3의 길 모색
지구적 차원에서 AI와 관련해서는 두개의 시각이 대립한다. 하나는 혁신을 중요시하면서 AI 관련 연구와 사업을 최대한 자유롭게 놓아두고 지원해 역동성을 살리자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AI가 대단히 위험할 수 있고 다양한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기에 리스크를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번 정상회의를 준비한 마크롱 대통령이나 보다 전반적으로 EU 입장은 ‘제3의 길’을 내세운다. AI의 기회와 리스크를 모두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뜻이다.
미국은 트럼프정부가 들어서면서 혁신과 기회라는 측면을 활용한 역동성으로 확실히 정책 방향을 틀었다. 미국을 대표해 파리 정상회의에 참여한 JD 밴스 부통령은 AI 분야에서 번영과 자유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며 “미국은 현재 AI 리더이고 앞으로 그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앞세운 번영과 자유는 유럽의 규제나 중국의 검열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밴스는 자신의 연설을 마치자 다른 참여자들의 발언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떴고, 프랑스 대통령 주최 엘리제궁 만찬에서도 디저트를 포기하고 도중에 사라졌다. 디저트 시간에는 중국 부총리의 연설이 있었다. 이런 오만한 행태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르몽드 지의 정상회의 종합기사의 첫 문단을 장식했다. 국제사회의 관례나 의전은 안중에도 없다는 일방주의적 태도를 반영하는 셈이다.
AI 분야뿐 아니라 디지털 경제에서 미국과 유럽은 오랜 기간 대립각을 세웠다. 애플 페이스북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의 디지털 경제 공룡들은 EU의 다양한 규제로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엄청난 규모의 벌금을 두들겨 맞기도 했다. 2024년 유럽이 발동한 디지털서비스법(DSA)과 디지털시장법(DMA)은 불법적 콘텐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거나 시장지배적 권력을 남용할 경우 해당 기업 세계 매출액의 6~10%까지 벌금을 부과하거나 유럽 시장에서 활동을 금지할 수 있는 강력한 규제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트럼프의 품으로 달려간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의 다자주의 금 간 것 확인
파리 정상회의는 이틀 일정을 마치면서 환경, 인권, 정확한 정보, 지적 재산권 등을 존중해야 한다는 공동선언문을 58개국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EU와 인도 중국 등이 동참했다. 2023년 런던회의부터 서울회의에 이어 AI 분야 다자주의를 만들어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미국과 영국은 공동선언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미국은 다수의 국가가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국제적 규범은 거추장스러운 장치일 뿐 ‘마이웨이’를 가면서 일대일 거래와 협상으로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심산을 드러냈다.
기술 부문에서 놀라운 효율성을 보여준 중국과 기술·자본·에너지·인프라 등 전반적인 AI 분야에서 압도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미국의 대결이 흥미로운 가운데 유럽이 시장 AI만큼은 한몫 차지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뛰어들었다. 파리 정상회의는 미국과 유럽이 서구의 이름으로 다자주의를 추구하던 전통에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