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세계속으로] 유럽의 ‘헤어질 결심’
돌아온 트럼프, ‘동맹’ 유럽을 노골적으로 무시
역내 협력 없는 동아시아, 美 감당할 수 있을까

경악, 충격, 쇼크. 미국 도널드 트럼프의 새로운 행정부가 2월 들어 유럽에 초래한 감정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미국과 유럽은 지난 80년 동안 굳건한 군사 동맹과 경제 협력을 바탕으로 국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해 왔다. 미국이 주도하고 유럽이 보조하는 역할이었으나 트럼프 정부처럼 노골적으로 유럽을 무시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적대시한 사례는 없었다.
지난 14~16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미국의 J D 밴스 부통령은 “유럽의 문제는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유럽 내부의 위협”이라는 적대적이고 황당한 독설을 퍼부었다. 유럽 측 참여자들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가 독재자라며 전쟁의 책임도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로 돌렸다!
러시아의 주장을 따라 침략국과 피해국을 뒤바꾸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곧바로 미국은 러시아와 외무장관 회담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어 정전(停戰)을 넘는 관계 정상화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정작 당사국 우크라이나나 러시아로부터 안보위협을 받는 유럽은 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다.
혁명, 지진, 전쟁. 미국과 유럽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유럽은 트럼프 1기를 상기하며 예전처럼 미국이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에 유럽의 군사ᄋ경제적 기여를 높이라는 정도의 정책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트럼프는 아예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적으로 삼아 러시아와 연대하는 혁명적 변신을 보였다.
독일 총선 캠페인의 막바지에 밴스 부통령은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 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트럼프의 미국이 푸틴의 러시아와 독재 연대를 맺으며 유럽도 백인 중심 권위주의의 길로 나가라고 권하는 셈이다. 유럽에서 새로운 트럼프 정부의 기조를 ‘이데올로기적 전쟁’이라고 분석하는 이유다.
유럽은 이제 미국과 헤어질 결심을 다지고 있다. 실제 미국과 유럽의 긴밀한 동맹 관계는 앞서 언급한 80년을 넘어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 즉 100년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도와 권위주의 독일과 오스트리아ᄋ헝가리 제국들을 무너뜨렸다. 미국은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신뢰할 수 없는 동맹이 되었다고 유럽은 판단하고 있다. 안보 분야에서 동맹 관계는 신뢰가 핵심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유럽을 위협하는 러시아와 힘을 합쳐 유럽의 생존과 정체성을 공격함으로써 이미 신뢰를 잃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주 파리에서 유럽 대책회의를 열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우크라이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파병도 할 수 있다는 태세다. 유럽연합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유럽의 국방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며 ‘방위 유럽’의 강화를 강조했다.
미국의 리더십을 인정하면서 미국의 보호 우산에서 안보를 하청주고 편하게 지내던 시대는 끝났다. 유럽이 미국에 먼저 헤어지자고 선언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순간이다. 유럽이 더 큰 비용과 더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스스로 자립하지 못한다면 미국과 러시아의 압력에 힘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한국, 일본, 대만의 사정도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은 그나마 EU라는 제도적 틀과 오랜 역내 협력의 전통이 있으나 동아시아는 그마저도 없으니 트럼프의 이기적이고 무자비한 외교 거래로 심각하고 결정적인 피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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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