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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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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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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가장 교활한 역사 왜곡

  

  

 경향신문 2012-10-07

  

  

역사 왜곡의 전형적인 기술은 세 가지다. 가장 초보적이고 용감한 기법인 부정과 조금 더 세련된 기만, 그리고 제일 교묘하고 사악한 방법인 상대화다. 인류사에서 가장 야만적 국가 범죄로 꼽히는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왜곡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일부 학자와 정치인은 유태인을 집단 학살한 가스실의 존재를 단순히 부정함으로써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태인 희생자의 수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대중을 속이려는 기만행위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왜곡은 상대화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과 소련의 강제 수용소를 비교해 상대화함으로써 비난을 면제받으려는 노력이 대표적이다. “남도 했는데 왜 나만 갖고 난리냐”는 몰염치한 대응이자 교묘하게 문제의 심각성을 축소시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역사 왜곡과 부정에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의 많은 국가는 이를 법으로 다스리고 있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찬성하거나 정당화하는 언행은 물론 이를 부정하거나 축소시키는 일은 형법으로 다스린다. 범죄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유로의 벌금으로 처벌한다. 범죄 행위의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역시 입법을 통해 역사 부정과 왜곡에 엄중하게 대처함으로써 주변 피해국들과 화해의 발판을 마련했다. 국가와 정치 지도자들이 직접 나서 부정과 기만과 상대화의 기법을 동원해 자신의 역사적 책임과 범죄를 감추고 왜곡하는 일본은 유럽적 기준에서 본다면 법적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셈이다.

 

미국은 강한 유태인 로비가 존재하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입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인권법원은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인 인권임을 인정하면서도 권리의 남용은 제한할 수 있다고 밝혔다. 권리의 남용에는 반인륜적 범죄를 옹호하는 언행이나, 죽음의 협박과 같이 하나의 인권을 악용해 다른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포함한다.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권리의 남용이라는 의미다. 유태인 학살의 부정은 잠재적으로 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유발하는 인권 침해적 요소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자신의 침략과 폭력을 은폐하고 상대화함으로써 아직까지도 동아시아의 민족주의적 긴장과 충돌을 초래하고 있다.

 

그런데 욕하면서 닮는 것일까. 한국정치의 대선 과정에서 표출되는 역사 논의의 전개는 너무나도 한심하다. 한편에서는 일본의 역사 부정과 왜곡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5·16 쿠데타와 유신의 종신독재체제라는 절대 악을 ‘헌법가치의 훼손’이라는 완곡어법으로 기만하고 상대화하여 축소시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며, 제66조는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고 밝힌다. 헌정질서를 지켜야 할 대통령 후보가 총칼로부터 나온 권력에 대해 각종 수사(修辭)를 통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데도 보수 진영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진보 진영도 “그나마 사과했으니 잘했다”는 분위기다.

 

반복하지만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가장 교활하고 사악한 방법은 상대화다. 한국에서 박정희 시기와 관련해서 등장하는 역사 왜곡 기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공과(功過)론으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비교해서 계산해 보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고 나서 아무리 그 아이를 잘 길러준다고 범죄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민주화 대 산업화 세력론이다. 이는 온 국민이 이룬 산업화의 기적을 박정희와 군사 및 보수집단이 독점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역사 왜곡이다. 셋째, 역사를 과거사라는 용어로 대체함으로써 지난 일은 잊자는 뉘앙스를 덧칠하는 짓이다. 개인의 과거는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공동체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업적과 수치스러운 과오를 모두 길이 기억하고 반추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조홍식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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