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0)] 최초의 세계제국 건설한 포르투갈의 해양자본주의
교역으로 흥하고 사치로 망하다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근교 도시인 마프라에 위치한 궁전. 포르투갈의 전성시대를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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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도를 펼쳐 보면 포르투갈은 대륙의 변방 중에서도 끝에 있다. 유럽의 남서부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쪽 해안을 타고 길게 자리 잡은 포르투갈은 몸집도 작다. 하지만 역사는 길다. 이베리아 반도 나머지를 차지한 스페인과 공유하는 1200㎞에 달하는 긴 국경은 1297년 알카니세스 조약으로 결정된 이후 지금까지 쭉 유지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국경이다.
포르투갈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400여 년 동안 세계를 하나로 묶어 교역의 네트워크로 만든 주인공이다. 지금까지 부국굴기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모두 지구의 한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과 부를 축적했던 경험들이다. 고대 서남아시아의 바빌로니아부터 지중해의 그리스와 로마, 중세의 이슬람 세계와 중국과 인도, 그리고 다시 지중해의 도시국가 등인데 그중에서 활동 영역이 가장 넓은 경우가 지중해부터 중국까지 연결했던 이슬람 제국이었다. 하지만 아랍인들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교역하지는 못했다.
반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발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인류 최초로 전 세계를 포괄하는 무역망을 건설한 것은 물론, 군사력을 세계 각지에 투입해 강력한 제국을 완성했다. 중세의 이슬람이나 인도, 중국의 상인들도 문화가 다른 지역까지 멀리 진출해 교역을 추진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군사적 우위를 앞세우면서 체계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5세기부터 경쟁적으로 대양을 제패하는 모험에 나섰고 마침내 1494년에는 교황의 중재로 지구를 양분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한다. 마치 사과를 반으로 자르듯이 지구를 둘로 쪼개 각자의 영역을 결정한 조약이다. 유럽 변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가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을 건설하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상인정신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 리베이라 광장의 18세기 무렵 풍경화.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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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의 지리적 조건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인도가 인도양에 던져진 다리이고, 이탈리아가 지중해로 뻗어나간 육지이듯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이 대서양을 향해 내민 머리라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 내에서 보면 변방 국가에 불과하지만, 바깥세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첨단 전진 기지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 유럽의 주요 무역 루트인 이탈리아와 북유럽 항로의 딱 가운데 위치한다. 이런 지리적 조건 덕분에 포르투갈 리스본에는 많은 외국 상인이나 자본가들이 정착해 활동하고 있었다. 핵심은 제노바 출신 금융가들이었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 상인들도 다수 있었다. 또한 문화·인적 자원도 풍부했으며 상업적 기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험정신이 투철한 인물도 많았다.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늘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구 도시인 포르투에서 12세기에 출범한 포르투갈 왕국은 백년이 넘는 전쟁을 통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자국 영토를 확보한 바 있다. 1415년, 포르투갈 해외 진출의 출발점으로 통하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지역을 점령한 것 역시 모로코의 이슬람 세력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이처럼 포르투갈은 왕국의 정체성 자체가 매우 호전적이었으며 기독교 확장의 임무를 특별하게 여기는 세력이었다.
물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외 진출에는 경제적 측면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실제 포르투갈은 가까운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별 재미를 보지 못하자 대서양의 섬들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스페인이 카나리아 군도를 점령하자 포르투갈은 마데이라(1419년) 군도를 차지, 사탕수수 재배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어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내려가며 세네갈 앞의 카페 베르데(1456년), 가나의 엘미나(1482년), 중앙아프리카의 상투메(1472년) 등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에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넘어(1488년) 인도양으로 진출하면서 형성한 제국이었다. 포르투갈은 대양을 넘어 항해하는 범선에 대포를 장착, 막강한 화력을 갖췄다. 게다가 수백 년간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훈련된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인도양의 이슬람·인도·중국 세력은 연안 항해에 적합한 소규모 배로 움직였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교역에 익숙한 상황이었다.
포르투갈은 동아프리카 소팔라, 페르시아 걸프 만의 호르무즈, 인도의 고아, 동남아의 말라카, 그리고 동아시아의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각 요지마다 요새를 만들어 무역을 총괄했다. 게다가 1500년경에는 포르투갈을 출발해 아프리카를 향하던 배가 우연히 브라질에 도달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포르투갈은 대서양은 물론 인도양을 넘어 태평양까지 이르는 제국을 보유하게 됐다.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가 바닷길을 개척해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향신료와 金으로 부를 독점하다
15세기가 포르투갈의 확장 시기였다면 16세기는 본격적으로 제국의 위상을 과시하면서 수확의 혜택을 누린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부흥 시기에는 동방무역이 중요했고 특히 향신료 수입을 독점했던 베네치아의 역할이 돋보였다. 포르투갈 제국도 리스본에서 출발한 범선이 인도와 동남아에서 직접 향신료를 싣고 돌아와 유럽 전역에 보급했다.
그중에서도 후추는 유럽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향신료였는데 아시아 무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실제 1518년 아시아에서 실어온 화물 중 95%가 후추였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동방 무역이 포르투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막대했다. 예컨대 1506년 포르투갈 왕국의 수입 가운데 아시아 향신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25%였으며, 이후 점차 증가해 1518년엔 무려 40%를 차지했다. 당시 향신료는 21세기 대표적인 산유국에서나 볼 수 있는 석유의 위상과 유사. 물론 16세기 물동량은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무척 적어 보일 수 있다. 해상 무역이 가장 활발했던 1530년대와 40년대 리스본을 출발하는 배는 매년 평균 7~8척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6~7척이 돌아왔을 정도다. 나머지 1~2척은 항해 도중에 해적에게 공격당하거나 사고로 침몰했다.
포르투갈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해양 교역에 덧붙여 현지의 지역 무역에서도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스페인이 멕시코와 페루에서 필리핀으로 실어온 은, 그리고 일본의 은을 가져다 중국 마카오에서 비단이나 도자기와 교환하던 무역이 대표적인 사례다. 동아시아 바다에서 해운업과 중개업으로 포르투갈이 재미를 본 셈이다.
또 포르투갈 군대는 인도양에서 아랍이나 인도 상인들에게 통행증을 팔아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덕분에 향신료 일부는 홍해를 통해 베네치아인들 손으로 들어갔고, 16세기 후반이 되면 향신료 루트는 아프리카 해로와 서아시아 육로로 양분된다.
16세기가 아시아 무역의 시대였다면 17~18세기는 브라질과 아프리카, 즉 대서양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분류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아시아 무역은 기본으로 군사력을 활용한 정치적 자본주의이자, 중개 무역을 담당하는 전통적 상업 자본주의다. 하지만 아프리카나 브라질을 활용한 자본주의는 산업 자본주의에 가깝다. 아직까지 공업 수준은 아니었지만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작물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였기 때문이다.
인도의 향신료에 이어 포르투갈을 부자로 만든 것은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사탕수수와 담배, 면화 등 열대 농작물들이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와 브라질 대규모 농장의 노동력으로 활용함으로써 제국 내 분업 체제를 발전시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690년대에는 브라질에서 미나스제라이스 금광이 발견됨으로써 포르투갈에 엄청난 부를 안겨줬다. 역사적으로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광이 유명하지만 브라질 금광은 초기 10여 년 만에 기존에 누적된 스페인의 수입을 초과했다. 생산량이 정상에 달했던 1750년대 브라질은 매년 3t의 금을 생산했다. 이에 더해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발견됐으니 포르투갈은 진정 황금향(黃金鄕) ‘엘도라도’를 품은 셈이었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뺏기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포르투갈을 통합했지만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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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어 성공한 것은 지리의 덕이 크다. 반면 바로 그 점 때문에 포르투갈은 지정학적으로, 또 지경학적으로 심각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15세기 이베리아반도 세력 재구성은 포르투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반도는 서부의 포르투갈과 중앙의 카스티야, 그리고 동부의 아라곤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1470년대에는 카스티야 왕위 승계를 놓고 전쟁까지 벌어졌다. 한편에는 포르투갈 국왕과 결혼한 호아나 공주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아라곤 페르난도 국왕과 결혼한 이복 여동생 이사벨이 있었다. 결과는 포르투갈 측이 패하고 아라곤 측이 승리함으로써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합쳐진 스페인이 탄생했다. 이후 스페인은 남부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전부를 통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포르투갈은 그 대상이었다. 물론 포르투갈도 자국이 왕실 통합의 주체라면 마다할 일은 없었다. 따라서 두 왕실은 서로 얽히고 설키는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1580년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함으로써 두 왕실이 하나로 통합됐다. 하지만 이 통합은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1640년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공이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은 뒤로 수십 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다시 독립을 쟁취했고 브라간사 공은 주앙 4세로 즉위했다.
포르투갈에 대한 위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양에 진출해 부를 얻게 되자 곧바로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뒤따라 대양 확장과 무역에 달려들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전 세계의 바다에서 포르투갈을 공격하고 나섰다. 대서양의 브라질과 아프리카 연안의 포르투갈 기지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 인도양과 태평양에서도 싸움을 벌였다. 17세기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치렀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긴 전쟁 끝에 인도양과 태평양에서는 네덜란드가 승리를 거둬 식민제국을 만들고, 대서양에서는 포르투갈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이와 같은 결과는 포르투갈의 지경학, 특히 인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는 인구가 100만에 불과했고, 17세기에도 200만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보다는 큰 규모였지만 세계 제국을 유지하고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연히 인도양의 포르투갈 기지나 식민지는 군사력이 취약했다. 그나마 대서양에서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질의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을 군대로 흡수해서 군인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군대를 아프리카로 이동시켜 제국을 방어하는데 요긴하게 활용했다.
앙골라 노예로 일군 브라질 사탕수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흑인을 브라질 농장에 파는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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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미국과 브